요즘 제이는 부쩍 영어 공부에 열심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보면 식탁 위에는 언제나 영어교재가 펼쳐져 있다. 밤에 침대에 누워서도 자기 전까지 스마트폰으로 강의를 들으며 영어를 중얼거린다.
제이의 영어는 억양이 우리말과 비슷해서 마치 익숙한 리듬에 가사만 바꿔 부르는 노래처럼 들린다. 게다가 제이만의 독특한 박자가 있다. 옛날 음악시간에 배운 강, 약, 중강, 약의 사분의사 박자를 떠올리게 한다.
저녁을 먹고 서재에 들어와 앉아 있으면 주방 쪽에서 제이의 사분의사 박자 영어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안 하던 공부를 하려면 좀이 쑤실 법도 할 텐데, 매일 저녁마다 식탁에 앉아 중얼중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는 서재에 앉아 있는데 제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여보.”
“왜?”
“공부에는 다 때가 있나 봐.”
“왜 그런 소리를 해?”
“이제 와서 아무리 열심히 해본들 얼마나 잘하게 될까 싶어.”
뒤늦게 영어를 공부하자니 익혀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제이의 답답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역시 제이가 머지않아 자막 없이 영화를 보거나 외국인과 막힘 없이 대화를 할 수 있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제이는 문법적인 부분에는 다소 약점이 있는 것 같다. 지금부터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만약 아내였다면 내게 어떤 말을 해줬을까?
나는 꿈꾸는 게 많은 사람이다. 누군가 내게 살면서 꼭 이뤄내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물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열 가지는 대답할 수 있다. 윌리엄 포크너나 레이먼드 카버처럼 훌륭한 소설을 써내는 것. 두세 종류 정도의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게 되는 것…
물론 실제로 그런 일들을 해내기에는 나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죽기 전까지 단 한 가지도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계속 꿈을 꾸는 것과 매일 노력하는 것밖에 없다. 이루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한숨을 쉴 때면 제이는 고개를 강하게 젓는다.
“아냐. 내가 볼 때 자기는 분명히 할 수 있어.”
“그러면야 더 바랄 게 없겠지만….”
“확실해. 분명히 할 수 있대두.”
“뭐, 언젠가는 그럴지도 모르지. 아주 먼 훗날,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가서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머잖아 분명히 뭔가 이뤄낼 거라는 예감이 들어.”
그러면서 제이는 내 엉덩이를 툭 쳐서 서재로 돌려보내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아내가 참 순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리 순진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로부터 그렇게 확고한 믿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때로는 엄청난 응원이 된다.
실망스러운 얼굴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제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뒤늦게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이 제이가 아니라 나였더라면,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아 답답한 마음을 늘어놓는 게 나였더라면, 제이는 분명 별처럼 확실한 믿음으로 응원을 해줬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마치 입시학원 강사처럼 문법이 약하다느니, 한계가 있을 것이라느니 하는 따위 생각들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를 믿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믿는다’는 말을 해왔던 것 같다. 그만큼 나의 믿음은 공허하고 차가웠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믿음 역시 아무나 줄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사랑도 믿음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남편은 한참 동안 서재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침실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제이는 침대에 엎드려 영어 교재를 보고 있었다. 그 특유의 사분의사 박자 억양에서는 조금 전의 실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보, 당신을 믿어. 그렇게 말해주려는 순간, 제이가 어떤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Keep your mouth shut! (입 다물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제이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믿음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거겠지.
그런데 정말로 교재에 그런 문장이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