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끼리 덕수궁 돌담길을 같이 걸으면 얼마 안 되어 헤어지게 된다는 속설이 있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중학교 때쯤이었다. 당시 내가 즐겨 보던 TV 프로그램 중에 매주 한 가지 주제를 정해서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드라마 형식으로 보여주는 방송이 있었다. 한번은 주제가 미신이었다. 액운을 막으려고 미신에 집착하다가 오히려 불행한 일을 겪게 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드라마 후반부에서 남자는 여자 친구와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있었다.
남자는 줄곧 안절부절못했다.
“자기랑 여기 오면 안 되는데.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지게 되는데.”
여자 친구가 말했다.
“이제 미신 같은 거 안 믿기로 했잖아.”
“그건 그런데. 여긴 정말 오면 안 돼.”
“괜찮아.” “안 돼. 불안해.”
답답한 대화가 한참 이어진 끝에 마침내 여자 친구가 벌컥 화를 냈다.
“아, 정말 답답해! 나도 더 이상은 못 참겠어.”
결국 여자 친구는 이별을 선언하고 돌아섰다. 혼자 남은 남자가 멀어지는 여자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거 봐, 맞잖아.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지게 된다니까.”
주입식 교육 때문인지 그전까지는 덕수궁 하면 ‘아관파천’만 떠올렸다. 하지만 그날부터는 수많은 연인들의 이별 이야기가 봉인된 서랍 같은 회색 돌담을 머릿속에 그리게 되었다.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쩌다 보니 제이와 덕수궁 돌담길을 걷게 된 적이 있다. 종로에서 만나서 을지로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대한문 앞까지 와있었던 것이다.
“저쪽 길 참 예쁘다.”
제이는 덕수궁 돌담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래전에 봤던 그 드라마가 불현듯 떠올랐다. 내 눈 앞에는 숱한 연인들의 슬픈 사연이 봉인된 서랍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직도 새로운 이별을 담을 공간이 넉넉히 남아 있는 듯했다. 마음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평소 스스로를 이성적인 인간으로 자처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미신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돌담길에 들어섰다.
주말이라 그런지 나들이를 온 사람들이 많았다.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가로수가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디선가 번데기 냄새가 났다. 누군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소리도 들렸다. 사람들은 돌담을 따라 걷다가 잠깐씩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정동교회까지 천천히 걸어갔다가 거기서 방향을 돌려 다시 옛날 시청 건물로 돌아 나왔다. 중간에 잠깐 벤치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줄곧 두 가지 목소리가 서로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연인들은 절대 여기 오면 안 돼. 바보야, 그건 그저 미신일 뿐이야. 운동선수들이 징크스 같은 걸 괜히 믿는 게 아니라고. 그래 갖고서 어디 교양인이라고 할 수 있겠냐, 너.
초초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이는 내내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5년이 지났다. 요즘도 날씨가 좋은 주말이면 가끔 제이와 덕수궁 돌담길을 찾는다. 봄에는 덕수궁 벚꽃을 구경하러 갔다가 들르기도 하고, 가을에는 단풍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곳에 얽힌 속설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것이 우리를 비켜간 것만은 확실하다.
어쩌면 그 수많은 서랍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속설과 달리 기분 좋은 내용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씨 좋은 날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유모차를 밀며 걷던 남편이 아내를 졸라 사 먹은 번데기에 대한 기억 같은 것들.
그리고 돌담길에 관한 미신을 기억하고 있는 남자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여자 친구와 나란히 앉아있던 벤치도 어딘가 분명히 들어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