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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불편함에 길들여지는 중입니다

서호주 소도시

by Kafka

산책로는 늘 비슷한 풍경이지만, 그날따라 나무 그림자가 조금 더 길었습니다. 아내는 늘 그렇듯 러닝화를 신고, 저는 한 손에 작은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바람은 해안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불었고, 전봇대 사이로 지나갈 땐 살짝 웃는 얼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 걸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여긴 조용한 동네입니다.

마트는 예전처럼 그리 이르게 닫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음 놓고 밤에 장을 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닙니다. 처음엔 불편했고, 지금은… 그러려니 합니다. 애초에 “언제든 가능함”을 전제로 움직이던 몸이라, “오늘은 오늘 안에만”이라는 이 동네의 시간표가 좀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젠 그 낯섦을 밀어내려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후엔 커피를 마시거나, 빨래를 널거나, 그냥 천천히 앉아 창밖을 봅니다. 일은 분명히 하지만, 삶이 밀려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자주 일과 삶이 한 덩어리처럼 섞여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 둘이 선명히 나뉩니다. 그리 대단한 무언갈 하지 않더라도 ‘오후가 있는 삶’을 누리고 있다는 기분. 가끔은 그걸 누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됩니다.

불합리함은 여전히 존재하고, 느린 속도는 여전하지만, 살고 있습니다. 자연은 좋고, 사람들은 적당히 거리감 있게 친절하고, 시간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흘러갑니다. 특별할 것 없는 나날인데도, 이상하게 매일이 새롭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사는 게, 지금의 우리에게는 꽤 괜찮은 답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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