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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연 Apr 11. 2022

[2021] 지구 끝의 온실 │ 김초엽

K픽션 아카이브 - 장편소설 │ 연연

지구 끝의 온실 / 김초엽 / 2021

*도서 리뷰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김초엽 작가의 첫 장편소설. 스튜디오드래곤에서 드라마로 영상화하려는 이유를 알 것 같은 소설이었다. 분명 소설을 읽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영상이 재생되며 ‘이건 눈물 또르르각 명장면이다!’ 싶은 페이지들이 있었기 때문. (김초엽 작가가 등단을 못 하면 웹소설을 쓰려고 했다던데, 웹소설을 쓰면서 장르적 클리셰를 적절히 사용하는 작법을 익혔을지도 모르겠다.) 그중에서도 나를 크게 울린 것은 믿음과 희망에 관한 장면들이었다. 배신당했을 때 인물들이 보이는 행동과 말, 복잡한 감정, 믿음을 확인했을 때의 감동 등등…. <지구 끝의 온실>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분투하는 인물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를 응원한다.


한줄평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묵묵히 행해지는 노력들이 멍청한 선택으로 가치절하되는 요즘, 묵묵히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향한 격려의 이야기


줄거리

지금으로부터 100년쯤 지난 시기, 지구는 화학물질인 ‘더스트’가 생태계를 파괴한 사건인 더스트폴을 겪은 후 차근차근 생태계를 회복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강원도 해월이라는 지역에서 유해잡초(모스바나)가 증식한다는 민원이 쇄도하고, 더스트생태연구소의 연구원인 아영은 이 식물에서 불빛이 나온다는 제보를 듣고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린다. 아영 또한 어릴 적에 이웃 할머니인 이희수의 정원에서 불빛을 내는 식물을 보았던 것이다. 식물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아영은 음모론 괴담 사이트인 ‘스트레인지 테일스’에 빛을 내는 식물에 대한 제보를 받는단 글을 올린다. 이를 계기로 아영은 나오미를 만나게 된다. 나오미는 아영에게 더스트폴 직후, 아마라와 함께 살 곳을 찾아다니다 만난 대안공동체 ‘프림빌리지’와 그곳에서 만난 지수 씨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영은 곧 지수 씨가 이희수라는 사실과 유해잡초가 사실은 더스트폴과 큰 관련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김초엽 작가는 이런 사람

포항공과대(포스텍)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과학 공부는 즐거웠지만 연구에 필요한 끈기나 인내심 같은 자질이 부족해 훌륭한 과학자는 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대학 졸업 무렵 짧은 소설 창작모임을 만들고, 교내 SF 공모전에 참여했다. 그 연장선에서 투고한 소설이 웹진에 수록되었고, 그중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2017년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 가작을 받으며 작가로 데뷔했다. 딱 1년만 해보자고 시작한 전업작가의 삶이 지금까지 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방금 떠나온 세계>, <지구 끝의 온실>, <사이보그가 되다> 등을 펴냈다. 2019년 오늘의 작가상, 2020년 젊은 작가상을 수상하고, 2021년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다.

쓰고 싶은 이야기나 장면이 떠오르면 소설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게 떠오른 작품 아이디어는 휴대폰 메모장 앱에 적는다. 평소 게임을 즐겨 게임 시스템 메시지처럼 설명문을 띄우듯 소설을 써보기도 한다. 구상은 길게 하고, 초고는 빠르게 완성하되, 퇴고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계속한다. 독자가 읽을 때 술술 넘어가도록 가독성을 가장 신경 쓴다. 안 좋은 환경에 처해도 스스로를 연민하기보다는 탐구정신을 갖고 파헤쳐 나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캐릭터를 좋아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좋아하지 않는 인간상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나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진보하고 있다는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주관적 세계에 대한 이해, 닿으려도는 시도와 실패, 그 실패로부터 이어지는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세상이 지금보다 다른 존재들에 대해 열린 곳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독자들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실패를 겁내지 않고, 낯설고 과감한 시도와 잘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써나가고 싶다.

(참고: 경향신문, 시사인 인터뷰)





<지구 끝의 온실>은 액자식으로 구성돼 있다. 더스트생태연구소 소속의 아영이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정체를 찾으려는 과정이 액자 바깥, 더스트폴 이후 디스토피아가 된 세상에서 나오미와 아마라가 프림빌리지를 찾아내 지수 씨와 레이첼을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가 액자 안의 내용이다. 두 이야기 사이에는 약 4~50년 정도의 간극이 있다. 바로 이 설정이 <지구 끝의 온실>의 메시지를 보다 명확히 보여준다. 보다 진보한 내일은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노력들이 세대를 거쳐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메시지 말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오미와 아마라는 더스트폴이 터진 후 내성종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다가 도망치는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사람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사냥꾼이 찾아왔다. 사냥꾼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아마라와 나오미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거짓말한다. 나오미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그것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 지내던 처소로 달려간다. 그들은 죽어있다. 사냥꾼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오미는 화를 참을 수 없다.

"넌 뒤로 가서 앉아. 제발 진정 좀 해."
"저 쓰레기들이 거짓말을 했어! 그 여자들이 우릴 팔아넘겼다고. 나는 그 말을 믿을 뻔했어. 우리가 만난 거의 유일하게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그 말을 믿을 뻔했다고!"
(…) 아마라는 이제 말을 하는 대신 화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아마라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침착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돌핀이 폐허를 빠져나왔을 때, 아마라가 조종 장치를 붙잡은 채 울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했다. (134-135쪽)


나오미와 아마라 모두 더 이상 살아야 하는 의미를 모르겠다. 자신에게 다정했던 유일한 사람들은 죽었고, 사냥꾼들은 살아남았으며, 심지어 다정한 사람들과 두 사람 모두를 모욕했다. 나오미는 처음으로 대가없이 잘해준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선 살아 있어봤자 아무 의미 없으니까(라고 생각하니까). 생에 대한 의지는 아래 두 가지 중 하나는 있어야 유지될 수 있는 것 같다.

1) 믿을 사람이 있다 - 사회안정성
2) 다른 내일이 있다 - 미래, 비전


더 이상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사라진 나오미와 아마라는, 살기 위해서 새로운 믿음을 세운다. 더스트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소문 속의 마을. 두 사람에게 마을의 실존 여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이 그 마을이 있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다른 미래를 꿈꾸며 함께 행동하고 있음이 중요하다. 사실, 오늘날 종교도 그렇지 않은가. 신이나 사후 세계의 실존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신과 사후세계는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믿음이라는 행위에 기생하여 존재'하게 된다'.


대안이 무너졌다고 실패가 아니다

결국 나오미와 아마라는 소문 속의 마을이자 대안공동체인 프림빌리지를 발견하고, 가까스로 마을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마을을 만든 핵심인물 지수 씨와 식물학자 레이첼을 만난다. 더스트를 막아주는 식물이 자라는 곳에서 알약이 아닌 식사를 하고 사람들의 호의를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곧 프림빌리지의 존재를 들키고, 바깥 사람들에 의해 공격을 받아 마을이 흩어질 위기에 처한다. 그러자 지수 씨는 나오미에게 식물(모스바나)을 심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말한다.

"(…) 우리가 혹시 이곳을 더 지킬 수 없게 되더라도, 이게 있으면 또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 수 있어."
나는 지수 씨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꾸 이곳을 떠나는 상황을 가정했던 이유도, 나에게 분해제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이유도 이제 알 것 같았다. 지수 씨는 이 풍경을 보면서 동시에 이 풍경의 끝을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에겐 여기 하나면 충분한데요. 또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지금 이곳, 여기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의미 없는걸요."
하루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사실은 나도 짐작하고 있었다. 프림 빌리지는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렇지만 이곳에 남겠다고 거듭 말하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곤 했다.
지수 씨는 평소의 그 장난기 어린 태도로 돌아와 물었다.
"그래도 심겠다고 약속해주는 건 어때?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잖아. 머물 곳이 있고, 식물들이 있다면. 잘 생각해 봐."
"몰라요. 생각은 해볼게요."
나는 키득거리며 말했지만 그 약속을 끝까지 피하고 싶었다. (236-237쪽)


하지만 나오미와 아마라는 결국 약속을 행하게 된다. 더 이상 프림 빌리지가 안전한 곳이 아니게 되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각지로 흩어져야 했던 것이다. 나오미와 아마라는 새로 정착한 곳에서 모스바나를 심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프림 빌리지 이야기를 하지만, 곧 사기꾼에 거짓말쟁이 또는 정신이상자로 몰린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끈질기게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정체를 추적한 아영에 의해 그 존재와 진실이 밝혀진다. 모스바나가 더스트를 감소시킨다는 사실도. 프림 빌리지는 결국 무너졌지만, 프림 빌리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식물, 그리고 지켜진 사람들이 남았다. 대안이 무너졌어도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움텄던 것이다.


희망이 다시 뿌리 내리는 이야기

그러던 어느 날, 더스트대응협의체가 자신들의 연구결과로 더스트를 감소시킬 수 있었다고 발표한 것과 달리 그 전에도 전국적인 더스트 감소 정황이 있었다는 논문이 발견된다. 프림빌리지를 떠나 전 세계에 정착한 프림빌리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삶터에서 모스바나를 심었던 것이다. 아영은 이 사실을 나오미에게 알린다.

"한 명이 아니었어요. 한 장소도 아니었죠. 온실에서 떠난 이들이 거의 같은 시대에 각자 도착한 곳에서 모스바나를 기르기 시작했어요. (…) 그래서 모스바나들이 그렇게 단기간에 지구를 뒤덮을 수 있었던 것이죠."
아영은 자신이 이 논문의 데이터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어떤 놀라움과 슬픔,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나오미도 만나게 되기를 바랐다. 아영은 나오미가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오미의 표정이 점차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오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만이 아니었군요. 모두가 잊지 않았어요."
"맞아요. 당신들이 약속을 지켰고, 세계를 구한 거예요." (363-364쪽)


나오미와 아마라는 이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린다. 그건 아마도 오랜 세월 거짓말이라 여겨졌던 약속을 혼자 지켜 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혼자가 아니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읽는 입장에서도 이 장면에서 감정이 북받쳤다. 이희수가 살던 온유시와 유해잡초 민원이 들어온 해월시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서로의 소식을 모른 채 약속에 기대어 묵묵히 각자 할일을 했던 프림빌리지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려 노력한 나오미와 아마라, 루딘, 아영의 노력도 필요했다.


< 프림빌리지의 진실이 정설이 되기까지의 과정 >

1) 뿔뿔이 흩어진 프림빌리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모스바나 씨앗을 심는다.
2) 프림빌리지의 약속을 직,간접적으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 ex. 이희수(=지수) -> 아영, 나오미 -> 루딘
3) 더스트대응협의체의 정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더스트 1차 감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다.
4) 아영이 모스바나와 이희수에 대해 추적하고, 루딘이 프림빌리지의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한다. 그 결과 두 사람이 만나게 된다.
5) 아영이 학계에 프림빌리지의 존재를 알리고, 연구자들이 관련 연구를 아영에게 공유한다. 그 결과 아영이 3)의 연구를 알게 된다.


1)~5)까지의 노력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또한 이 노력이 결과로 이어지기까지도 얼마나 많은 우연이 필요한 것인지 우리는 안다. 그래서 더더욱 <지구 끝의 온실>이 감동적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지금 행동이 어떤 미래를 만들지 당장은 알 수 없지만 일단 공동체의 약속에 기대어 할 수 있는 것을 해 나가는 일’의 가치, 그 믿음을 갱신하게 됐다. 요즘 사회에서는 묵묵하고 곧은 노력들이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멍청한 선택으로 가치절하되는 것 같다. 더 쉽고 빠른 길도 있는데 왜 미련한 짓을 하느냐고. 그게 너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무심한 말들이 마음의 여유를 흔들고, 호혜성에 대한 믿음을 흔든다.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노력을 둘러싼 부정적인 평가들이다. 아마라가 세상의 질타에 스스로를 믿을 수 없게 되었듯 말이다. <지구 끝의 온실>은 아영이 아마라에게 들려준 이야기처럼, 묵묵히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향한 격려의 이야기인 것이다.






<지구 끝의 온실>에 대한 TMI

작가의 말에 따르면, 김초엽 작가는 《지구 끝의 온실》을 쓰면서 원예학을 전공한 아버지의 자문을 받았다. 하지만(?) 현재 김초엽의 아버지의 직업은 오카리니스트로, 김초엽 작가와 함께 울산 지역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해당 영상은 유튜브(아래)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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