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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cos Aug 14. 2022

인류 최대의 전쟁 독-소전

2차 세계대전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던 전선은 크게 2가지다. 미영 연합국-독일 추축국이 붙었던 서부전선과 독-소가 전투했던 동부전선이다. 서부전선 역사는 여러 헐리웃 영화를 통해 잘 알려졌다. 덩케르크 철군부터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은 전쟁의 판도에 영향을 준 유명한 전투들이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사 중요 이벤트 마다 처칠이 시가를 물고 루즈벨트도 중재자로 등장한 삽화들을 보면 영국·미국이 연합국 승리에 지대한 역할을 했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 사실을 부정할 수 는 없지만 아래에 데이타를 보면 소련서 상당한 전투가 발생했음을 엿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서 독일과 소련이 격돌했던 것을 독소전쟁이라 할만큼 실제로는 독일군 전사자 80% 이상이 거기서 발생할 정도로 꽤나 비중이 컸다. 당시 독일은 슬라브와 유대인을 동일시 할 정도로 소련을 정복과 말살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던 차에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


기습공격을 당한 소련은 연전연패를 거듭 하다가 얼마 안있어 모스크바 근교까지 독일군에 내주고 말았다. 이 때 소련 정부는 주요 시설을 후방으로 옮기고 스탈린도 모스크바를 뜨니마니 하였지만 모스크바에 남기로 결정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큰 문제는 주요 장군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대거 숙청을 당하여 연대·여단급 지휘관이 떠밀려서 사단장을 맡다보니 전쟁 초기에는 감각이 떨어져 어이없는 참패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최근까지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서 구르고 굴렀던 실전 최강군이었다. 여튼 개전 초기에는 소련의 졸전으로 바르바로사 전투에서만 400만명에 가까운 전사자가 발생한다.



이런 졸전에도 소련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인권의 가치가 없는 공산주의 특성상 무한으로 공급될 수 있던 인적자원들이었다. 그리고 겨울로 접어들면서 독일군의 보급에도 문제가 생기고 소련군은 반격의 채비를 갖춘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에서 소련군의 저항은 독일군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영화 '에너미엣더게이트' 에서 잘 묘사되었는데, 어택땅을 찍듯이 소련 측 지원군들은 여기저기서 열차를 타고 계속 유입되어 온다. 그 어떤 국가보다 강압적으로 찍어 누르는 분위기에 이래나 저래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인 군인들은 무기가 모자라도 맨손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죽은 아군의 무기를 들고 싸우곤 했다. 오죽하면 '고기분쇄기'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당시 군인들의 목숨은 내던지는 소모품 수준이었다.


군인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의 근성도 대단했는데, 소련의 제2도시라 불리우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부르크) 는 900일간 독일군에 봉쇄당하고도 항복하지 않고 버텼다. 만약 레닌그라드서 오랫동안 독일군을 묶어두지 못하고 그 병력들이 모스크바로 진격했다면 모스크바는 함락 당하고 소련군은 패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유럽 수많은 나라들이 이렇다할 전투 없이 독일군에게 두 손들고 항복한 것을 보면 대조되는 풍경이다.



그만큼 물불 안가리며 목숨 따위 내버리고 버텨 온 탓에 소련군은 인류 역사상 유래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희생양을 남긴채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몰아낸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베를린까지 진격하여 제국의사당에 소련 깃발까지 꽂게 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소련이 이렇게 싸워주지 않았더라면 연합군이 승리하긴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소련이 고만고만하게 짓밟혀 동부전선 병력 상당수가 서부전선으로 집중되면 상당히 어려운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독일은 동부전선에 260개가 넘는 정예 사단을 배치한 반면에 서부전선에는 59개 사단을 배치했다. 이마저도 소련군과의 격전을 치느르나 진이 빠져 심신을 추스리기 위해 프랑스 등으로 이전 배치하기도 했다. 즉, 소련은 독일군 최정예 병력 7~80% 가량과 홀로 대적한 것이다. 우리에게 사상 최대의 작전으로 알려진 '노르망디 상륙작전' 서는 3천여명 가량 희생자가 발생했으나 이마저도 독일군의 저항에 부딪쳐 2달 정도 발이 묶였다. 반면 독소간 굵직한 전투들은 기본이 수십만 수백만의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동유럽 전 지역 통틀어 넓은 전선에서 전투가 이루어진 것을 보더라도 규모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소련이 2차 세계대전 연합국의 승리에 가장 큰 이바지를 한 나라임은 자명한 사실임에도 냉전 시대 이념 대결로 인해 자본주의 진영 내에서는 과소평가되긴 하였다. 이를 보더라도 역사는 참 평가하기 나름이고 어떻게 보느냐에 달라지는 것 같다. 지금의 러시아가 우크라를 침략하는 명분으로 '탈나치화' 을 들었는데, 실제로는 우크라가 나치 행위를 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치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크라는 소련에게 핍박당하고 수탈당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일부 반러시아 세력은 나치를 해방자로 여겨 그들에 협조하여 독일군의 방어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친러 주민들 입장에서는 그들이 나치 부역자로 보여 괘씸하겠지만 우크라의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름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알면 알수록 선악을 구분지을 수 없이 경계도 모호하고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다. 지금은 연합국 승자의 역사에서 당시 독일은 천하의 빌런이 되었지만 프랑스나 영국이 식민지에 자행한 만행들을 보면 그들도 나치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프랑스는 2차세계대전 승전 이후에 식민지 관리 차원에서 베트남과 알제리를 침공했었다. 둘에게 모두 패하여 두 나라 모두 독립을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는 진압 명목으로 수많은 이들이 학살되기도 하였다. 프랑스는 나치에 몇년 당한것으로 치를 떠는데 알제리 입장에서 본 프랑스는 나치보다 더 악랄한 침략국이었을 것이다. 만약 연합국이 패배하고 나치제국이 유럽을 지배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역사는 또 새롭게 평가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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