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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선 Sep 14. 2020

절친 가영이

지음지기, 한명이면 족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홀로 왔다가 홀로 가는 것이라지만 누구나 한평생 살면서 오며 가며 친구들은 생기기 마련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우(學友), 직장에서 만나는 사우(社友), 군대에서 만나는 군우(軍友)등 시기와 때에 따라 만나서 엮이는 우정들이 습니다. 수많은 인연 중에서 속속들이 마음을 헤아리고 알아주는 친구는 지음지기로  되어  삶의 빛이 니다.

  요즘 사람들은  지음지기(知音知己)란 단어생소한것 같습니다.지음지기가  없는 삶이란 얼마나 삭막하고 허전하고 슬프고 불행할나는 생각합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리 울었던' 것처럼 나와 가영이의 인연은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25년간 천둥,번개,소나기,태풍들을 같이 마주하며 원숙해진 이 나이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우정의 꽃이 활짝 폈습니다. 아날로그적인 고전의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뿌듯해 하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우리끼리는 관포지교(管鲍之交, 옛날 중국 춘추시기의 관중과 포숙처럼 우정이 아주 돈독한 관계를 이르는 말),지란지교(芝蘭之交, 지초와 난초같은 향기로운 사귐이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고상한 교제를 이르는 말) 비견하며 흠뻑 자아도취해 살아갑니다.


  중국 고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우정에 관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백아(伯牙)와 종자기(鐘子期)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춘추시기 봉래산(蓬莱山)에서 백야는 자연과의 호흡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꿰뚫어 거문고를 잘 타는 연주자로 성장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배를 타고 오른 여행길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해 높은 산 옆에서 잠깐 멈추고 즉흥적으로 여유롭게 거문고를 타는데 누군가가 멀지 않은 곳에서 흠상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강가에서 나무꾼 종자기가 호응하고 있었습니다. 백야는 종자기를 배 위로 모셔와 거문고로 높은 산을 표현합니다. 종자기는 "웅장하고 장엄함이 거대한 같도다"하며  격하게 감탄합니다. 백아파도를 표현해 내니 종자기는 "도도하고 유유한 강물이 바다같도다" 라며 찬탄을 금치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만이 나의 소리를 알아듣는 구만요. 진정으로 자네는 나의 지음(知音)일세!" 백아는 감격에 겨워 하며 종자기와 그 자리에서 의형제를 맺습니다. 이듬해 추석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각자 길을 떠났습니다. 훗날 백아가 종자기를 찾아 갔을 때는 아쉽게도 종자기가 병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고 난 후 였습니다.  백아는 슬픈 나머지 종자기의 묘지 앞에서 마지막으로 "고산유수" 곡을 거문고로 타고 악기를 부숴 버립니다. 지음을 잃었으니 그 가치도 없다며 그 후로는 아예 악기를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음지기'의 유래입니다.


  25년전, 가영이와 나 우연하게 낯설고 물선 해변도시에서  마주쳤습니다. 첫 만남에서 서로는 상대방의 얼굴에 스쳐가는 싸늘한 기운에 튕겨나가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오고간 말 몇마디 없이 담담하게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똑같이  20대후반의 도도함과 차가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들이었습니다. 남편들이 고중동창생인지라 가끔씩 부부동반 모임으로 만나게 됩니다. 사람이 많은데서 조용하고 가만히 있는 둘이의 공통점, 자연스레 소곤소곤 둘만의 이야기가 오고가고 취향이나 습관들이 나타나며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 집니다. 따로 둘이 만나 밥도 먹고 음주도 하며 친구가 됩니다. 내성적이고 낯가림하고 편식 편애하고 책 읽기 좋아하고 비슷한 코드가 많다는 알아가게 됩니다.

  어느 주말 가영이가 우리 집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아들이 2살 때였습니다. 밖에서 만나기가  불편하니 집으로 와서 같이 저녁 먹고 수다 떨기로 했습니다. 가영이의 우리집  첫나들이었습니다. 주말이라 통근버스가 빨리 출발해 예상보다 이르게 도착했습니다.  잠깐 집구경하고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를 만들고 가영이는 아들이랑 놀아주며 기다렸습니다. 부랴부랴 요리를 다 만들고 거실 식사테이블로 셋팅하러 나와서 보니 거실소파에서 아들이랑 가영이가 머리를 맞대고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두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 쌕쌕 너무 곤하게 자고 있길래 깨우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아들을 안방 침대로 옮겨주고 나니 가영이가 기지개를 쭉 펼치며 깨어났습니다.  

  "신경도 좋으셔요. 어쩌면 머리를 아무대고 닿으면 잠을 들수가 있지? 낮에 일이 많이 피곤한가봐?"

  나는 무신경이 희한하다며 말했습니다.

  "직장 다니는게 그렇지머. 은행일이란 매일 기업체 사람들 만나 구걸 상담하는 것인지라 피곤하지. 세상에 제일 피곤한게 사람 따라다니며 서비스하는거잖아. 우리 일은 실적이 따라 줘야 하는지라 더 쫓기고 피곤."

  가영이는 일 얘기는 귀찮다는 듯 툴툴거립니다. 가영이가 유난히 좋아하는 오징어를 매콤하게 볶았습니다. 콧등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닦아내며 홀홀 너무나 맛있게 먹습니다.

마지막에 밥도 한숟갈 비벼 슥삭슥삭 말끔하게 비워 냅니다. 내가 요리한 오징어볶음이 요리집 보다 훨씬 맛있다며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 후로 오징어볶음은 고정메뉴로 자리매김하였고 가영이는 내가 만들어주는  요리들 아무거나 먹는 것을 엄청난 호사로 여기며 행복해 합니다. 골뱅이무침을 놓고 시원하게 맥주 한잔 기울이던 수많은 우정의 날들이 있었습니다.

  무심하게 있으면  쌀쌀맞고 차가워 보이는 기운은 어디론가 달아났고 생글생글 웃으며 조잘조잘 속사포처럼 이야기꽃 만발합니다. 시원하고 초롱초롱한 눈매는 맑고 밝은 심성이 엿보입니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순색의 말끔한 얼굴피부는 잡티 한점 없이 깨끗합니다.  흔치 않은 피부미인입니다. 지금까지도 얼굴에 분을 바르지 않는 그녀는 피부관리의 끝판왕이어서 실제 나이보다 10살이상은 젊게 비쳐집니다. 동안입니다. 옷맵시는 화려하지 않고 깔끔하게 단정합니다. 흐터러짐 없이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 빤듯한 몸태, 요조숙녀입니다. 나는 가영이의 높은 수양, 아량과 관용, 대틀, 호방함, 의리,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성장을 멈추지 않으며 부단히 변화하고 끝없이 도전하는 불굴의 정신,건강한 생명력, 활력은 세월이 가도 퇴색하지 않는 그 변함없음에 감탄니다. 긍정적인 에너지로 똘똘 뭉친 그녀입니다. 우리네 청담(清谈)의 경지는 세월이 갈수록 높아만 갑니다. 가족 돌보랴 일하랴 아주 바쁜 일상에서도 꼭 시간을 내서 한번씩 만나 즐거운 시간 보냅니다. 너무나 알차고 충분한 충전의 시간이라 절로 미소가 번집니다. 아하면 어하는 우리 사이, 척하면 척하는 못말리는 이심전심 텔레파시마음을 춤추게 하고 황홀경에 빠지 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길거리에 단풍들이 빨갛게 물들어 가던 운치있는 계절의 어느 주말에 우리는 밤새 열변을 토하며 함께 새벽을 맞이한 적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4대 고전 명작중의 하나인  "홍루몽"(红楼梦)이라는 바다에 풍덩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수백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고전명작의 블랙홀에 흠씬 빠져 낑낑 씨름하며 허우적대는 양상이었습니다. 서른을 바라보며 세번은 읽었다는 우리들은 그 고전소설의 매니아였습니다. 소위 "홍미"(红迷,중국에서 홍루몽 인물 배경 설정 등 모든 것에 빠삭하게 정통하는 매니아들을 일컫는 말)라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50대에는 다섯번은 읽었습니다. 읽으면 읽을 수록 다른 면들이 보여지고 새로운 느낌 끝없이 나온다는 것이 참 신묘한 소설입니다. 우리는 현란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힘들게 견뎌내며 살아가는 여자들이라면 "홍루몽"을 여러번 읽을 것을 강권합니다. 복잡하게 깔려있는 수많은 복선들을 단 한번에 읽어 터득해내기에는 쉽지가 않아서 입니다. 세심하게 꼭꼭 씹어서 음미하며 읽어야만 걸죽한 진미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너무 많은 인생의 지혜와 철학들이 숨어 있어 속세의 부대낌과 좌절 속에서 명쾌한 답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인생들을 엿보며 무릎을 탁 치는 깨우침과 깨달음은 엄청난 위안으로 다가 옵니다. "홍루몽"의 깊숙한 경지에까지 들어가며 새벽을 맞이한 적이 어디 한두번이랴 할 정도로 자주 거론이 됩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 입니다. 수다의 중요한 소스와 밑밥입니다. 중국 고전명작들의 마력은 무궁무진합니다. 그야말로 마약입니다.

  "사기"(사마천 저), "손자병법", "귀곡자", "삼국지", "증국번가서", "왕양명", "소동파전", "도덕경" 등과  공자 맹자의  고전 작품집들은 일적으로 애로나 막힘이나 부딪침을 마주할 때는 방법론을 제시해 주는데 큰 역할들을 하는 존재들입니다. 중국이란 거대한 나라의 동서남북 천차만별 다양한 지역 사람들을 상대하며 살아남아 일을 성취해내려면 고전의 사례에서 힘과 힌트를 얻어내고 지혜롭게 알선하고 주선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고전의 무한메세지와 에너지를 미신하는 경향이 다분히 있습니다. 수천년의 역사와 문화의 저력은 무시 할수가 없습니다.


  어느날부턴가 대하소설 "토지"(박경리 저)에 퐁당 빠졌습니다. 우리에게 신나고 즐거운 수다꺼리가 늘어났습니다. "홍루몽""토지"의 작품성 비교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인과 한국인의  인문 문화비교도 하게 되면 화제는 훨씬 흥미롭고 감칠맛나고 가끔은 자극적이기도 하고 쫄깃해 집니다. 대하소설 "토지"를 처음은 지인의 것을 빌려서 읽은 것이라 소장을 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가영이에게 나는 21권의 소설책을 선물했습니다. 큰 무더기로  묵직한 책들을 받아들고 아이들이 좋아하던 장난감을 끝내 손에 쥐면 방방 뛰듯이 한껏 들뜨고 신나하였습니다. 몇번을 고맙다며 반복해서 잘 읽을거라고 행복해하는 넘치는 책사랑에 나도 덩달아 감동 먹었습니다. 행복과 감동은 전염이 되는가 봅니다. 좋은 에너지도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나란히 베낭을 메고 통영 박경리기념공원까지  찾았습니다. 한적한 가을의 양지바른 미륵산 산자락에 자리잡은 선생님의 묘소 앞에서 깍듯이 절하고 바로 앞 고즈넉한 정자에 앉았습니다. 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우리를 반겨 줍니다. 바람 한점 없이 맑게 개인 가을하늘의 태양은 포근하게 우리를 감싸주고 흰 구름은 방싯방싯 웃으며 손짓 합니다. 오전에만 해도 바닷바람이 세차더니 오후에 우리가 여기 기념공원에 도착하니 바람님이 숨죽은듯 고요하게 어루만져 주는 겁니다. 역시 우리들의 팬심에 하늘도 감동 먹은거라며 푼수끼 발동에 넉두리를 해 봅니다.

  평소에는 단정하게 진중한 포스의 가영이지만 흥분하면 보석같은 눈망울을 반짝반짝하며 말투도 빨라지고 열을 올립니다. 나는 늘 구절초를 닮아 신선하고 맑고 깨끗하고 차갑다고 가영이를 놀리곤 합니다. 단풍나무 밑에 하늘하늘 피어있는 구절초를 가리키며 나는

   "얘, 너 사촌동생이 널보고 반갑단다야."

  농담으로 던졌더니 어느새 쪼르르 내려가 카메라에 담아 옵니다. 선모초라고도 불리우는 구절초, 음력 5월 5일 단오날에는 5절이다가 9월 9일에는 9절이 되어 약초로도 쓰인다니 가영이 역시 나한테는 보약같은 친구입니다. 소박하면서도 내실있게 속은 단단하고 잔잔하지만 호방하고 담대할 때도 있는 반전의 이미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리있는 사람, 참 멋진 친구입니다.


  25년간, 우리사이에는 신임과 배려뿐이었습니다. 시기 질투같은건 아예 없고 서로를 보고 있으면 안쓰럽고 애처롭습니.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는 삶이 버겁고 힘겨울 때도 많았으니까요. 여우과는 절대 못되고 그렇다고 곰과도 아닌 같고. 솔직한 편이라 돌려서 말할  잘 모르며 기분 내키지 않으면 입을 다물고 묵해버리는 습관들이 있습니다. 서로 바싹 들이대지 않고 뒤로 조금씩 물러서 있으며 정서적으로 중가운데 꽤나 큰 공간이 확보되니 충돌과 갈등들이 생길 일이 없는 겁니다. 서로 헤아리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군자지교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군자간의 사귐은 담백하게 물과 같아 우정은 영원하다는 뜻)라는 말을 직접 실천하며 우리는 차근차근 우정을 쌓아 왔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하거나 난감한 일이 생겨도 피하지 않고 머리 맞대고 해결책을 마련하려 고심합니다. 할수 있는게 없을 때는 그냥 묵묵히 옆에 있어만 줘도 큰 위로와 위안이 됩니다. 처져 있을 때면 다독이고 격려해주고 좋은 일이 생겨 득의양양할 때면 함께 방방 뛰고 기뻐해주곤 합니다. 허물은 무조건 덮어줍니다. 무언의 따뜻함을 느낍니다. 우리는 서로 심플담백한 언사(言辞)나 처사법을 좋아합니다. 내가 부딪친 좌절과 위기를 알고 살며시 조용히 다가와 돈봉투 슬쩍 건네주며 급한 불부터 끄라던 그 속깊음과 진국인 기질에 안 반할수가 없습니다.


  5년전부터 내가 살던 고장을 떠나오며 우리는 이별하여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친구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멀어진다며 우정이 식는다는 지론을 펼치지만 우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일년에 얼굴은 한번정도 볼 수 있으며 주로는 음성통화를 많이 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정치, 철학, 인생, 문학,역사 등의 화제들을 거론하며  몇시간씩 기염을 토하며 달리기도 합니다. 언젠가 내가 "지란지교를 꿈 꾸며"(유안진 저)라는 명문장을 가영이에게 공유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영이는 그 글을 눈물까지 훔치며 읽었다고 합니다. 가끔씩 폭발하는 감성 주체 못하는 모습이 엄청 귀엽습니다. 겉으로 냉정하고 강인해 보이지만 속살은 한없이 여리고 착한 심성이 엿보입니다.


  남들의 이야기를 써 놓은 책 들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고 감개무량하며 18세 소녀들처럼 해맑게 웃고 신나합니다. 몸만 나이 들어 늙어가는 것이지  마음 한구석 깊은 곳에는 여전히 변함없는 소녀심이 살아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느낌대로 푼수끼 발산하며 우리끼리만 몰래 낄낄낄 표현하며 살아갑니다.

  오늘같이 가을이 꽉찬 청량 하늘의 뭉게구름을 보고 있으니 절친의  깨끗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가을가을한 이 계절에 만나 찐하게 한잔 하면 좋으련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 요즘의 불편한 일상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지음지기는 아무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있다면 행운이고 축복인 것입니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우리네 우정 25주년 기념으로 나는 가영이가 유난히 좋아하는 백합 꽃다발을 선물하려고  인터넷 꽃집에 택배주문을 넣었습니다.  꽃을 받아들고 격하게 감동 먹고 함박웃음 지을 가영이의 얼굴을 상상하며 내 입가에도 미소가 흘러 넘칩니다. 명랑한 웃음소리 귓가에 울립니다.

  지음지기, 소리없이 우리네 우정의 강은 쉼없이 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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