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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선 Sep 16. 2020

배롱나무 꽃잎에 소환된 병산서원

"징비록"에 꽂히다

  절판된 고전서적을 당근 마켓에서 수집하느라 재미 쏠쏠한 요즘입니다.

  며칠 전 옆 동네 어떤 분이 9권이나 되는 책을 내놓았는데 만원을 초록어린이재단에 기부하고 책만 가져가면 된다고 합니다. 한참 동안 요지를 이해 못해 어벙벙했습니다. 인터넷 뱅킹 같은 거 통 모르고 사는 내가 인터넷으로 단돈 만원이라도 이체할 줄을 모르니 답답할 노릇이죠. 생각 끝에 내가  책 받을 현금을 드리면 받아서  대신 기부해주면 안 되냐고 하니 순순히 그러자고 하더라고요. 야호, 배낭을 메고 옆 동네로 향했습니다. 알려준 아파트 건물 앞에 도착해서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안 보입니다. 문자를 넣었더니 책이 무게가 좀 있는데 당연히 지하 주차장으로 오는 줄 알고 이미 주차장에서 대기 중이라고 합니다. 남의 동네 대형 아파트 단지 안에서 지하주차장 입구를 찾는다는 것이 또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건네줄 분이 자신은 약속  있어 급히 외출해야 한답니다. 딸한테 책을 보낼 테니 꼼짝 말고 자리에서 대기하라고 합니다.  현관 앞에서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데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이 불타는 배롱나무 꽃이었습니다.
 

                   사진  김경선

  화사하게 붉게 물든 배롱나무를 카메라 앵글에 담아내느라 분주합니다. 이 지역에 와 살면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던 수종(树种)이라 어찌나 반갑던지, 이게 얼마만이냐며 싱글벙글한데 현관문이 열립니다. 젊은 여대생 같은 분이 다가오며 말을 건넵니다. 마스크를 껴서 새물 새물 웃는 두 눈만 보이지만 정갈하고 청순한 기운이 물씬 느껴집니다.  손에 들었던 책을 건네주며 무거울 텐데 하며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옵니다. 날씬하게 키도 훤칠한 데다 까만 단발머리 찰랑찰랑하며 젊은 청춘의 파릇파릇한 기운입니다. 반듯하게 깍듯이 인사까지 잘하는  예의 바름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합니다. 청량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듯. 스치듯 잠깐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한 눈빛이 인상에 박혀 버렸습니다. 나는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고 책을 받아 배낭에 넣었습니다. 묵직합니다. 자외선 차단 우산까지 받쳐 쓰고 기분 좋게  성큼성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중고책이어도 책 상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깨끗이 소독하고 찰칵찰칵 카메라에 담아봤어요. 책들을  보면 밥 안 먹어도 배 부르다고 하는 책바보 책벌레 친구 연이한테 공유도 해야 하니까요. 시집 번역을 하는 연이는 허구한 날 책더미 속에서 파묻혀 삽니다. 책 포토를 눈요기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신나 하고 좋아하니 공유를 하게 됩니다.

                   사진  김경선

   강렬한 뙤약볕에 힘들게 무거운 책 들고 오느라 지친 감이 있어 녹차 한잔 하기로 했습니다. 물을 끓이는데 배롱나무 꽃과 젊은 여대생이 눈앞에 아른아른합니다. 하늘이 높아졌다 해도 낮은 아직 더운 날씨에 나는 또 무슨 청승을 떨었냐고. 못 말리는 나 홀로 놀이, 그냥 허허 웃지요.

  녹차를 마시휴대폰 사진을  뒤적뒤적거려 봅니다. 방금 전에 찍은 배롱나무 꽃이 나에게 상상의 날개를 달아줍니다. '아, 맞다. 작년 9초순이었으니 지금과 비슷한 시기안동 갔을 때 병산서원(屏山書院) 곳곳에 배롱나무 꽃이 만발했었지.'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지금까지 봐 왔던 배롱나무 꽃 중에서 가장 예쁜 꽃 무더기들이었습니다. 사진들을 다 찾아내 봅니다.

  작년에 안동두 번째로 찾았습니다. 벽산 서원과 도산서원을 주 타깃으로 정했습니다. 오전 일찍 도착해 하회마을 한 바퀴 돌고 옥연정사까지 구경하고 나니 반나절 지나갔습니다. 점심을 안동 찜닭으로 포식하고 벽산서원으로 향합니다. 하회마을 주차장을 벗어나서 산 위로 향하는 갓길이 나오는데 꼬불꼬불 비포장도로를 따라 차는 한참을 산중으로 달렸습니다. 강변 옆으로 달리며 언뜻언뜻 눈에 띄는 낙동강 강변의 은빛 모래가 신기했습니다. 민가 한채 보이지 않는 깊고 외진 산행길이었습니다. 드디어 강변에 주차장이 나왔습니다.
  차에서 내려 한참 도보로 10분 정도 걸어가니 고풍스러운 한옥 건물들이 보입니다. 길가의 안내판을 보는 중에 어떤 젊은 부부인지 연인인지 모를 두 남녀의 대화에 웃음이 폭발해 입술 깨물며 겨우 참았습니다.
  "또 류성룡이야. 오도 가도 다 류성룡이네."
  남자의 지치고 지겹단 뉘앙스였습니다. 하회마을 인근에는 참으로 서애 류성룡 선생의 흔적들이 많이 있었답니다.
   서원 입구로 들어가는 양옆에 찐 분홍으로 불타는 배롱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방긋방긋 웃으며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아 줍니다. 경주나 부산 통영 같은 곳의 사찰, 공원, 향교, 서원, 도로변에 피어있는 걸  봤었지만 병산서원 배롱나무 꽃이 제일 화사합니다. 배롱나무꽃6월 하순부터 피기 시작하면 9월까지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고 하여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답니다. 한여름에 나무에서 피는 많지 않은 꽃종이라고 합니다. 다른 대부분의 나무들은 열매를 맺으며 가을 맞을 채비에 바쁜데, 배롱나무꽃은 여름 내내 지글지글 타는 태양에도 굴하지 않고 맞받아 붉은 기운을 토해 냅니다. 남도의 여름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는 상징꽃입니다.

  병산서원은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에 등재된 한국 9곳 서원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의 서애 류성룡 선생님과 그의 셋째 아들 수암 류진 공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서애 류성룡 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기도 합니다. 병산으로 옮길 당시에 6그루 배롱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400여 년 동안 이 서원과 함께 긴긴 세월 비바람을 이겨내고 마주 보며 의지한 배롱나무꽃들 빛깔은 유난히 화려하고 꽃물이 기분 좋게 곱디 곱습니다. 그 옛날 학문을 닦던 선비들의 올곧은 기상과 깊이를 닮아서 나무에도 진하고 깊은 학식의 꽃물이 들었나 보다 라는 생각이 스쳐 갑니다.
  

                    사진촬영  김경선

  서원 입구는 복례문(復禮門)입니다. 論語의  "극기복례, 인야(克己復禮,仁也)"에서 유래된 거라고 합니다. "자기의 욕심을 누르고 예의범절을 따르는 것이 곧 인이다"라는 뜻인데 유학사상의 자기 절제 정신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복례문을 지나 서원으로 들어서왼쪽을 보면 광영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에 쏟아진 찐 분홍 꽃물이 흥미를 돋웁니다. 꽃비가 내려 연못을 찐 분홍 카펫으로 만들었습니다. 동심이  살아나 한참이나 애들처럼 물에 작은 돌멩이를 던져도 보고 나무 꼬챙이로 휘저어보기도 하며 노닥거렸습니다. 정면에 만대루(晩對樓)가 보였습니다.


                      사진촬영  김경선

   길게 늘어진 누각 형태의 만대루는 두보(杜甫) 시 "백제성루 (白帝城樓)"의 "취병이만대(翠屏宜晚對)"라는 시어에서 따온 겁니다. "푸른 절벽은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란 시어처럼 만대루 툇마루에 올라서서 멀리 강 넘어 병산을 보면 7폭 푸른 병풍으로 둘러쳐진 아름다운 산수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출입통제가 돼서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만대루를 지나 서원 핵심 건물이자 중앙에 위치한 입교당(立教堂) 툇마루에 걸터앉았습니다. 눈 앞의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납니다. 길게 펼쳐진 만대루 지붕 위쪽으로 푸르른 병산과 파란 하늘이 보이고 만대루를 지탱하고 있는 멋스러운 통나무 기둥 사이로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이 보입니다. 이게 바로 풍수지리학에서 흔히들 말하는 배산임수의 명당이이겠구나 하며 그 뛰어난 위치 선정 안목과 지혜에 절로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입교당에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이 고풍스러운 서원 건축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마치도 한 폭의 풍경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게 합니다. 한마디로 그림 같은 경치인 겁니다.
  해질 무렵 2층 만대루 누각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으뜸 경치는 보지 못했어도 입교당 툇마루에 앉아 다리 쉼 하며 새소리 바람소리 듣고 있자니 옛 선비로  변신해 있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이 드는 이 느낌 나쁘지 않았답니다. 신선이 따로 있으련가. 운치 있는 서원에서 풍월 한번 읊어보는 상상 하며 행복에 잠겨 봅니다. 옛 선비들의 깊은 학문의 기운을 듬뿍  들이마시고 싶은 얄팍한 심산으로 심호흡 한번 크게 해 봅니다.
  임진왜란 후에 선조에게 상처 받은 가슴 부여잡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온 힘을 기울이며 고심하던 류성룡 선생의 모습이 만대루 위에 어른어른하는 듯합니다. 말수 적고 단아한 얼굴에 "징비록"의 고뇌를 물씬 풍기며 서성이었을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실제로 "징비록"을 집필한 장소는 오전에 돌아본 하회마을에 있는 '옥연정사'(玉淵精舍)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7년간의 비극을 '징계하고, 삼가기 위한 기록'이라는 "징비록(懲毖录)", "시경(诗经)"에 말하기를 "내가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삼가케 한다(予其懲而毖後患)"고 하였는데 , 이것이 저작 동기였습니다. 피로 쓴 교훈이지만 과연 후세 사람들은 얼마나 똑똑히 익히고 징계를 일삼았을까요?

  400여 년이 지난 지금 현실에도 징계는 뒷전이고 무사안일은 여전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은 내부 분쟁만 일삼고 열 올리고 붕당 싸움과 똑같은 추태극들을 부리는 여야 당파간 극심한 대결의 불편한 진실은 여전합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끝없이 변함없이 돌고 돕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들을 새겨들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옛날의 과오와 음영에서 헤쳐 나오려면 역사를 읽고 알아내고 생각하고 깨우치고 고쳐나가야 하건만.

  역사를 뒤돌아보면 이 백성들은 편안한 날이 많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늘 무능하고 무책임한 기득권의 횡포와 폭정에 선량한 백성들만 피눈흘리고 죽어납니다. "징비록"사극 드라마 장면들을 떠올리면 서서히  혈압 올라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역사는 늘 비슷비슷했으니까요. 실제로 지금도 무사안일에 우환(忧患) 위기의식은 여전히  부재하고 치명적인 듯합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세상만사는 미리미리 준비를 치밀하게 해놓고 있으면 근심 걱정이 덜어질텐데 말입니다. 깨어있는 국민의식이 만들어지려면 책을 읽고 역사공부를 해야 합니다.

   득템 한 책 중에서도 "징비록"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납니다. 띄염띄염 접하며 들쑥날쑥 알고 있는 내용들이 꽤 있지만 제대로 원문 내용 읽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뜹니다.

  작년인가 설민석 선생님주로 강의하고 여러 패널들이 나와 토론하는 형식의 TVN "요즘 책방:  읽어 드립니다" 라는 프로그램의 "징비록"편에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하기 전의 조선은 군대가 없었다는 겁니다. 200년간 지속된 평화의 후유증이 조선을 나약한 존재로 전락시켜버렸으니 전무한 국방력에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구의 침략에는 속수무책 당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는 1633년 조선에서 "징비록"이 첫 출간된 후 수백 년 동안 정작 조선에서는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1712년 일본 오사카에서 발견된 "징비록"은  반출되어 시중에 간행되어 오히려 일본이 더 "징비록"을 읽고 연구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처구니없고 기막히고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대낮에 거실에 앉아 의식의 흐름대로 타임슬립을 잠깐 해봤습니다. 역사의 뒤안길에 자유롭게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며 개탄합니다. 나는 "책 속에는 황금으로 만든 집이 있고 (書中自有黄金屋) 책 속에는 옥같은 피부의 미녀가 있다 (书中自有颜如玉)"는 중국의 격언공감합니다. 권학(勸學) 명언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어야 삶의 여유와 풍성함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전서적은 힘과 교훈을 주고 배신을 때리지 않습니다.

  "징비록"에서 또 얼마만의 지혜와 깨달음을 건질수 있을 줄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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