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아파트와 단독주택은 무엇이 다를까?
언제부터 우리는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집이라고 하면 그냥 아파트로 인식해도 무방할 정도로 대부분 공동주택에 살고 있다. 단독주택이 밀집되어 있던 오래된 동네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허물고 고층 아파트 단지로 바뀌고 있다. 짓고 또 짓고 끊임없이 지어지는 게 아파트이다.
공동주택의 시작은 저층 연립주택이었다. 저층 공동주택 단지에서는 앞 동에서 부르면 건너편 동에서 대답할 수 있어서 그만큼 정을 나누면서 살았다. 하지만 15층으로 고층 아파트 시대로 접어들면서 각 세대는 아파트 동 간 거리만큼 이웃 간의 정도 멀어져 간다.
이제 해운대의 엘시티는 백 층에 가까운 ‘울트라 슈퍼’ 초고층 공동주택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부산의 도심과 바닷가를 점령해 가고 있는 수십 층의 초고층 공동주택, 그 높이만큼 부동산 가치는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하지만 그 ‘하늘집’에 사는 사람들은 무인도에 홀로 사는 것 같아 보인다.
'울트라 슈퍼 하늘집’이랄 수 있는 초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무인도에 나홀로 사는 것 같아 보인다
과거의 판상형 아파트는 도시경관을 해친다고 해서 부산시에서는 경관심의에서 탑상형 빌딩 스타일을 권장했다. 하지만 판상형과 다르게 탑상형 아파트는 집안에 바람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냄새가 빠지지 않아 요리도 하기 어려웠다. 탑상형 아파트에 대한 크고 작은 불평이 잦아지자 다시 판상형 평면으로 초고층 아파트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초고층으로 다시 등장한 초고층 아파트는 판상형을 위주로 하면서 일부는 탑상형의 평면이다.
초고층으로 지어지는 아파트는 대부분 발코니가 없어진 평면을 가지고 있다. 지금 지어지는 아파트는 발코니라는 매개공간이 없이 각 실들이 외기外氣와 직접 닿게 되어 있다. 공동주택에서 발코니는 최소한의 외부공간인데 다용도실과 피난공간을 제외하고 모두 다 합법적으로 미리 ‘확장’이 되어 지어진다. 초고층임에도 불구하고 외기와 실내가 창문으로 바로 맞닥뜨리게 되니 늘 닫혀 있는 상태로 살게 된다. 이러다 보니 사람이 ‘집 안’에서 사는 게 아니라 ‘집’에 갇혀 있는 상태라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더 심각한 공동주택은 원, 투, 스리룸이라 부르는 ‘도시형주택’내지 오피스텔이다. 그곳은 사는 사람들의 주거 생활의 편의는 안중에도 없이 공급되어 잠을 자기 위한 숙소로 쓰인다고 볼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일인 주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집’이 아닌 ‘방’으로 소형 공동주택이 공급되고 있는 것이다. 원룸은 ‘집다운 집’이 아니니 집은 자꾸 지어지고 있는데도 ‘집’이 없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다.
발코니가 없어진 아파트는 사람이 ‘집 안’에서 사는 게 아니라 ‘집’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집이 없이 떠도는 사람들, ‘집 아닌 집’에 사는 사람들은 잠만 자고 나올 뿐 도시를 떠돌며 살고 있다. ‘집’이 없으니 ‘집밥’을 먹지 못해 배는 채울지 몰라도 마음의 허기까지 달랠 수는 없으리라. 볼 일을 마치는 대로 곧장 돌아가는 곳이 ‘집’이어야 하는데 밤은 깊어 가지만 불이 밝혀지지 않는 집은 ‘집’이 되지 못한다.
도심과 강변, 산자락에서 바닷가까지 점령한 수많은 초고층 아파트와 원룸빌딩은 바벨탑을 연상하게 한다. 높은 곳에 살려하는 건 사람들의 어떤 욕구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꾼다. 행복한 삶을 위한 집에 살고 싶은 바람은 수십 층 아파트로는 채워질 수 없는데도 누가 백층까지 짓도록 부채질하는 것까?
집에서 사는 행복은 하늘로 치솟는 높이의 욕구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땅과 접해서 사는 자연과의 교감에서 얻을 수 있다. 도시의 집은 땅을 버리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시골의 집은 사람들이 자연을 외면하고 떠나서 버려지고 있다. 도시의 ‘집’은 정체성을 잃고 말았으니 ‘집’의 껍데기만 남아 행복은 무너진 바벨탑과 무엇이 다를까? 바벨탑의 숲 아래 ‘집’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여.
볼 일을 마치는 대로 곧장 돌아가야 하는 곳이 ‘집’이어야 하는데 밤은 깊어 가는데 불이 밝혀지지 않는 '집'이 자꾸 늘고 있다
아파트에서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을 것이라는 걸 눈치채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분양받아서 돈을 주고 산 집에는 행복이라는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지 않다. 건폐율과 용적률에 맞춘 수치로 설계된 공동주택에 정량화될 수 없는 행복을 어떻게 입력할 수 있었겠는가? 설계자가 햇볕과 그늘을 미리 들였어야 하고, 비와 바람을 앞서 맞아 보았어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설계 작업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아파트 공급사의 관심은 용적률에만 있을 뿐이어서 규모를 결정하는 심의위원의 눈에 들면 그만인 최대 수익성 확보에만 집중할 뿐이다.
우리 식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이라면 아마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우리집’ 일 것이다. ‘우리집’은 엄마 아빠에게만 좋은 아파트가 아니라 우리 식구 모두가 만족하는 집이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 식구뿐만 아니라 손님들도 좋아하는 집이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결혼을 해서 출가하면 사위나 며느리, 손주들도 좋아해야 하는 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계자의 작품으로 유명해지는 집, 건축주 한 사람만 만족하는 집, 외관이나 인테리어 디자인만 멋진 집이어서는 ‘우리 집’이라고 할 수 없다. 인터넷으로 검색되거나 주택 전문지나 여성잡지에 소개되는 집의 사진이나 도면을 자세하게 살펴보자. 그럴듯하게 기사거리로 잘 소개되었지만 우리 식구가 살아도 좋은 ‘우리집’으로 다가오는 집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설계자의 작품으로 유명한 집, 건축주 한 사람만 만족하는 집, 외관이나 인테리어 디자인만 멋진 집이 ‘우리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직도 이 집에 살고 계시는군요?
우리 식구가 살고 싶은 ‘우리집’의 얼개를 짜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집터를 어디에, 땅의 크기는 얼마나, 집의 규모는 어느 정도로 잡아야만 적당할까? 지금도 좋고 앞으로도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집이 될지 깊이 생각해서 정해야 하리라. 지난 호까지 설계의 의도에서 집 짓는 과정을 필자가 설계한 ‘심한재心閑齋’를 예로 들어 그 얼개를 구성 요소별로 나누어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우리 식구 모두 좋아하고 손님들도 부러워하는 ‘우리집’은 어떤 집일까? 필자는 서른 채 가까운 단독주택을 설계해 오면서 준공 이후에 집을 찾아다니며 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단독주택을 작업을 시작했던 초창기에 설계했던 집에 20년이 넘게 살고 있는 건축주를 찾아뵈었다.
“아직도 이 집에 살고 계시는군요?”
“그럼요. 우리가 이 집을 떠나서 어디에서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좋은 집을 설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설계해서 지은 단독주택에는 건축주들이 거의 대부분 입주한 이래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내가 설계한 집은 팔아서 득이 되는 부동산으로서의 가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집'으로 살기에 더 좋은 집을 찾기가 쉽지 않은 건 틀림없어 보인다. 대를 물려서 살아도 좋은 집인 ‘백년가百年家’를 우리집으로 지을 수 있는 단독주택의 얼개를 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