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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관 Dec 01. 2023

집,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

왜 우리는 집에서 행복하지 않을까?

주말과 휴일을 집에서 보내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지낼까? 한 주 동안 쌓인 먼지를 없애느라 집안 구석구석 털고 닦는 청소를 하고 세탁물 바구니에 가득 쌓인 빨랫감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겠지. 그러고 나면 주방에서는 식구들이 기대하는 점심 식사가 조리되면서 음식 냄새가 온 집 안에 가득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친구를 초대해서 수다를 떨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회포를 풀고 있는 집도 있겠다.


건축사라는 내 일로 단독주택 설계를 하다 보면 요즘 사람들이 집에서 보내는 일상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아파트에서 지내는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이란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다 그렇고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 궁금해할 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평일에는 아침밥을 먹지 않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주말이나 휴일이라도 식탁에 마주 앉지 않을까 싶지만 어떨지 모르겠다.


우리집의 휴일은 손주가 오는 날이라 평일과 다르게 특별한 메뉴로 밥상을 차린다. 한주를 걸러 보기도 하지만 삼대가 밥상에 둘러앉아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없다시피 하니 그런 특별한 날은 제쳐두고 식구들의 휴일 일상마저 궁금해할 일이 없다면 우리네 삶이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아파트라서 그렇다는 체념 어린 얘기보다 어떻게 하면 집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지 궁리를 해보는 건 어떨까.     

아파트가 다 그렇지라다는 체념 어린 얘기보다
어떻게 하면 집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지 궁리를 해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던 시절, 우리가 아파트에 살기 전에는 혼례를 제외한 일상생활이 집에서 다 이루어졌다.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식구 수 대여섯 명이 한 집에서 지냈고 삼대가 함께 사는 집도 많았었다. 멀리서 손님이 오면 당연히 어머니는 안방을 내주시고 집에서 묵어가는 건 우리 집만의 일이 아니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집에서 당연하게 하는 일이 아파트에 살게 된 요즘은 아예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파트라는 집의 일상은 잠자고, 씻고, 옷 갈아입는 정도의 개인적 기능만으로 한정되어 버렸고 그 나머지 사회적 기능은 퇴화되어 가고 있다. 집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회적 기능은 카페나 술집, 음식점과 숙박시설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아파트 살이는 집이라는 최소 단위의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다.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려는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면서 잃어버린 집의 사회적 기능을 되찾아 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파트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가 없는 집이라 가족 구성원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기 어려워 식구의 이탈이 일어난다고 본다. 아이들은 대학생만 되면 독립을 서두르고 부부 간에도 각방을 쓰는 집이 많아지고 있다. 집이 삶을 담아내지 못하면 사람들이 밖으로 나돌게 된다.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려는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면서 잃어버린 걸 되찾아 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집다운 집에 살아보려고 단독주택을 지으려면 얼개를 짤 때 사회적 역할을 담을 공간인 거실과 주방, 식탁의 기능과 마당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집에서 사회적 역할이 살아나야만 물리적인 집(house)이 아니라 정서적인 집(home)이 될 수 있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집 안을 꾸미고 고급 주방기구와 식탁, 값비싼 소파가 있다고 해서 식구들을 집에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건 아파트에 살면서 충분히 알게 되지 않았는가?


가족들이 귀갓길을 서두르고 결혼한 자식들이 자주 찾아올 수 있는 '우리집'의 물리적인 공간 얼개를 살펴보자. 식탁이 있는 주방과 거실이라는 사회적 공간이 개인적 공간인 방은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방은 침실이 아니라 개인 생활공간이 되어야 하는데 아파트의 방은 너무 좁다. 개인적 공간과 사회적 공간이 잘 구분되면 '우리집'은 식구들뿐 아니라 손님들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된다.     


가족 중 누구의 손님이라 하더라도, 아무 때고 찾아올 수 있는 집, 손님과 식구들이 늦은 시간까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사회적 기능이 살아있는 ‘우리집’이 된다. '내 집'이 아니라 '우리집'은 부부만이 아니라 손주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웃음이 담장을 넘는 집이다. 우리집은 가장 작은 사회로서 공동성이 살아있어야 일상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생겨나고 그로 인해 우리 사회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필자 설계 경남 양산시 소재 심한재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잃게 된 우리집의 정체성을 다시 일깨워야 하겠다. 누구든지 집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것과 다름없다. 집은 행복이 솟아나는 샘과 같으니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집을 돌보아야 답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집에 산다. 바깥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가는 게 아니다. 집에서 지내다가 잠깐 밖으로 나간다. 바깥에서 잠시 볼 일을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 그곳이 집이다.’

- 이갑수 산문집 '오십의 발견’


아파트 단지를 돌아보니 밤이 이슥해졌는데도 불이 켜지지 않은 집이 자꾸 늘고 있다. 집이 있는데도 집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수십 억짜리 집을 자랑하는 사람, 그런 집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그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인 집’이 없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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