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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관 Mar 22. 2023

Home, Sweet Home

주거생활을 통한 삶의 치유

부산대학교 평생교육원-치유인문학 강좌 10강 원고



우리는 누구나 집에 산다. 바깥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가는 게 아니다. 집에서 지내다가 잠깐 밖으로 나간다. 바깥에서 잠시 볼 일을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 그곳이 집이다.     -이갑수 산문집 '오십의 발견’     


이 시대에 집이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까? 나는 숙소일 뿐이라고 잘라 말하고 싶다. 불 꺼진 집에 먼저 들어가기 싫어서 밖을 나도는 사람들이 많다. 밤이 깊었는데도 불이 켜지지 않은 아파트 세대가 자꾸 늘고 있다. 그 집 식구들은 아마도 불 켜진 집에 들어가려고 귀가 시간을 늦추는 건지도 모른다.     


식구라는 말은 한 집에서 같이 밥 먹는 사람을 이른다. 그런데 요즘은 밥을 먹는 집이 많지 않다고 하니 ‘식구’는 점점 死語사어가 되고 있다. 오죽하면 식당 메뉴에 ‘집밥’이 들어 있을까? 집밥이라고 자판을 두드리니 맞춤법에 맞지 않는 단어라고 붉은 줄이 그어진다. 집에서 먹는 밥, 집밥은 단어로 성립될 수 없다는 얘기인데 실제로는 누구나 먹고 싶은 메뉴이다.     

 아침저녁밥은 꼭 집에서 먹었던 그 시절의 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이었다


그렇게 오래된 얘기도 아닌데 저녁밥 먹는 시간에 맞추어 귀가하는 게 식구들이 지켜야 할 불문율이었던 때가 있었다. 식구들이 다 모여서 저녁밥을 먹는 건 당연한 일이라 식구 중 한 명이 늦으면 식사 시간도 늦어졌다. 바깥일이 있어서 귀가 시간이 많이 늦어지면 그 사람 밥은 아랫목 이불속에 묻어 두었다. 반찬이 따로 없어도 아침저녁밥은 꼭 집에서 먹었던 그 시절의 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이었다.     


아침저녁은 꼭 집에서 먹었던 그때는 엄마나 할머니는 집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분들이 있어서 어둑해지면 불이 켜지고 밥 짓는 신호처럼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찬은 부실했지만 따뜻한 저녁상을 차려 식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엄마가 그립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퇴근 시간이 일이 마쳐지는 대로 서둘러 돌아가야 했던 집이 있었다. 그 시절은 어쩌면 밥을 먹을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이 집이었던 것 같다.


왜 집에서 밥을 먹지 않을까?     


요즘 정년을 맞아 퇴직하는 사람들은 ‘삼식이’로 구박받을까 염려된다고 한다. 출근하던 때는 원래 아침을 거르고 저녁도 이런저런 일로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가는 날이 많았다. 굳이 아침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도 말은 근사하게 ‘브런치’라고 부르지만 마른 빵과 우유 정도로 가볍게 속을 채워야 한다. 그러다가 출근할 곳이 사라져 버리면 집에서 세끼를 먹어야 하는데 밥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걱정일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따로 말할 필요 없이 당연한 일이었던 집에서 밥 먹는 일이 무슨 큰일처럼 되어 버렸다. 맞벌이 부부라면 가사 일을 나누어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밥상을 차리는 일도 부부가 나누어서 하더라도 꼭 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집에서 밥을 먹지 않으면 마주 앉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는 우리집의 밥상, 손주와 함께 자주 이렇게 집에서 밥을 먹는데 사위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이다
집에서 먹는 밥은
가족이라는 의례적인 관계를 넘어
식구라는 정겨운 사이를 만들어낸다


집에서 밥을 먹는 건 꼭 배만 채우는 게 아니다. 밥을 먹는 자리라야 마주 보고 앉을 수 있고 그 시간에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또 밥상을 준비하는 사람이 정성을 담아서 음식을 만들게 도니 맛있다는 말과 표정으로 정이 깊어진다. 집에서 먹는 밥은 가족이라는 의례적인 관계를 넘어 식구라는 정겨운 사이를 만들어낸다.    

  

요즘 집에서 밥을 먹지 않게 되면서 식구로 나누어야 할 정이 옅어져 버렸다. 정도 정이지만 식도락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밥 먹는 즐거움을 모르고 사니 얼마나 서글픈가. 식구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며 먹는 라면과 혼자 먹는 일류 레스토랑의 요리 중에 어떤 음식이 더 맛있을까?            

                                      

손님이 오지 않는 집     


우리 집에 손님이 언제 왔었는지 꼽아보자.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우리집을 찾아온 손님이 없을지도 모른다. 출가한 자식도 손님인 세상인데 그 손님마저도 명절이나 되어야 본다는 집도 많다.     


옛날에는 손님 발길이 끊어지면 가세가 기울어진 집이라고 했다. 그래서 양반가에는 사랑채를 따로 두어 식객이 많은 걸 자랑삼아 내세웠다. 家勢가세가 높은 집은 그만큼 머무는 식객도 많았다고 한다.

      음양이 조화롭지 못하면 기운이 정체되니
손님이 자주 들어야 가세가 번창한다고 믿었다

 

아파트에 사는 게 보편화되지 않았던 지난 시절에는 타지에 가서 하루를 묵어야 했어도 숙소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친척이나 친구의 집에 찾아가면 하룻밤 묵어가는 건 당연시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지인이 오면 엄마는 손님에게 안방을 내주고 자식들의 친구도 놀다가 늦어지면 자고 가는 게 예사였다. 방학이 되면 아이들은 친척집을 찾아 지내면서 사촌 형제들끼리 우애를 돈독해졌다.     


이런 우리의 아름다운 손님 문화가 지금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그 집에 사는 사람만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갈 뿐 말 그대로 적막강산에 살고 있다. 기운으로 보면 집에 사는 사람은 陰음, 손님은 陽양이라 손님이 드나들어야 집안의 氣運기운이 돈다고 볼 수 있다. 음양이 조화롭지 못하면 기운이 정체되니 손님이 자주 들어야 가세가 번창한다고 했나 보다.                     

                                       

다시 우리집을 돌아보며     


베이비붐 시대를 지나온 세대에게 집이란 House가 아니라 Home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대에게 집이란 몸을 가릴 수 있으면 그만이었기에 그 시절에는 열 평이 아니라 다섯 평짜리 집에서 다섯 식구가 살아도 부끄럽다고 여기지 않았다. 세끼 밥만 배불리 먹을 수 있어도 괜찮았으니 우리집, 옆집 따지지 않고 이웃사촌이라는 큰 울타리의 식구로 살았다. 그렇게 살아도 불행하다고 여기기 않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30층, 40층의 고대광실 대궐 부럽지 않은 집에 살지만 House는 있어도 Home이 사라진 시대가 아닌가 싶다. 서울에는 서른 평 아파트가 수십억을 호가하는데 행복지수는 갈수록 하향 곡선이 급경사로 떨어지고 있다. 자식은 호적에만 있는 듯 부모 자식이 한 집에 지내거나 노부모를 모시는 일은 거의 없으니 경제적 자립 없이 노인이 되면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만다.     

 ‘우리집’은 삼대가 한집에서 지내면서 만들어지는
일상의 희로애락이 담기는 식구들의 응집된 공통 기억이 아닐까?


자식도 부모가 되는데 조부모를 모시는 부모를 보지 못하고 자란 자식은 제 부모를 모시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다. 간혹 부모를 모시고 살거나 가까이 살면서 3대가 자주 모이는 집은 주변에서 부러움을 받게 된다. 그 부러운 시선의 대상은 손주를 자주 보고 지내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결국 집이 주는 행복은 House의 크기가 아니라 Home의 깊이에 있다고 본다.     


우리집이라고 쉽게 쓰는 정겨운 어감에는 ‘우리’라는 의미가 주는 우리 사회의 공통된 공감대가 있다. 내 주변의 관계를 나와 동일시하는 감정인데 그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바로 ‘우리집’이다. 그 ‘우리집’은 3대가 한집에서 지내면서 만들어지는 일상의 희로애락이 담기는 식구들의 응집된 공통 기억이 아닐까 싶다.       

                             

자식들이 떠나고 비어있는 방     


자식들이 독립해서 집을 나가고 부부만 살게 되면 빈방이 생겨서 그런지 모르지만 각방을 쓰는 집이 의외로 많아지고 있다. 부부가 방을 따로 쓰는 걸 서로의 생활을 존중한다고 생각하면 좋게 보일지 모르지만 대화가 없는 일상을 살게 되는 집이 많다. 결혼한 자식들이 부모를 찾아와도 하룻밤 묵고 가는 경우가 흔치 않으니 손주를 봐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정이 들 시간을 갖지 못한다.     


일찍부터 혼자 사는데 익숙해진 젊은 부부들도 각방으로 사는 집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일찍 집을 나와 따로 살다 보니 부모 자식 사이라도 정을 나눌 시간을 갖지 못해 혈연의 정도 예전처럼 끈끈하지 못한 게 이 시대 가족의 모습이다. 호적에는 자식도 있고 손주도 있지만 부부마저 각 방을 쓰며 혼자 사는 것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은 늘 외롭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라 자위한다고 해서 혼자라는 외로움이 다스려질까? 집이라면 식구가 많아야 多福다복하고 자식이 결혼할 때까지 함께 살아야 부모 자식이라도 진하게 정을 나눌 수 있다. 나이 든 부모가 바라는 유일한 행복이라면 손주와 자주 시간을 가지는 일 말고 무엇이 따로 있을까?         

                                                             

손주의 방     


자식이 부모와 오래 같이 지내고 결혼한 자식과 손주가 자주 오는 집이라면 부부가 각방을 쓰지 않을 것이다. 부부만 사는 집에 비어있는 방은 빈방이 아니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자식이 오면 묵어갈 방이고 자식이 출가하면 손주가 쓸 방이다. 그러니 방이 남는다고 해서 부부가 각방을 쓸 수 없지 않은가? 손주가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 자고 간다면 祖孫조손 간의 정도 쌓일 테니 노후에 오랫동안 찾아올 손주를 기다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세대의 가정을 지난날에는 아내들이 지켜왔다면 이 시대의 가정은 손주가 지킬 수 있다. 삼대가 함께 살던 옛날에는 부모를 모시면서 부부는 어지간히 심각한 사안이 아니면 큰 소리를 내며 다투기가 어려웠었다. 이제는 손주가 자주 오는 집이 되면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야 하니 서로 양보하며 잘 지내게 되지 않겠는가?     


일인가구가 폭발적이라고 할 정도로 느는 이유는 가정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를 찾아오지 않고, 부부가 ‘各房각방’을 쓰면서 대화 없이 살다 보니 ‘卒婚졸혼’이라는 어이없는 부부 문화까지 생겨나고 있다. 삼대가 한집에 사는 건 아파트 주거의 한계 때문에 어렵다고 해도 祖孫조손 간의 정을 이어갈 수 있으면 가정을 지킬 수 있다.     

손주가 쓸 방, 손주의 방이 준비되어 있으면 노후의 행복이 보장된다    


부모와 자식은 다툴 수 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에게 주는 사랑은 무조건일 수밖에 없다. 아파트에 방이 비어 있다고 해도 부부가 각방을 쓰면 안 된다. 그 방이 손주가 쓸 방으로 준비되어 있으면 노후의 행복이 보장된다.     


우리는 누구나 집에 살지만 머무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고 연령대에 따라 달라진다.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고 주로 집 안에서 지내야 할 때가 되면 누군가를 기다리게 된다. 그 기다림의 대상이 손주가 되고 자주 찾아오는 집, 그 집이 내가 사는 집이 되었으면 좋겠다. 노후에 가질 수 있는 행복으로 이만한 일이 또 있을까?       

        

Sofa보다 Table     


손주가 있어야만 노후의 행복이 있다고 했지만 없는 손주를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손주가 있긴 하지만 멀리 떨어져 사는 데 있으면 뭐 하냐고 푸념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부부의 일상을 살펴볼 수도 있겠다.      


부부만 사는 집을 살펴보면 대화 없이 사는 경우가 많다. 각방을 쓰는 문화가 일반화되면서 그렇잖아도 할 말을 잃어버린 부부가 얼굴을 마주 볼 기회조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부부가 얼굴을 맞대는 경우는 싸울 때 말고는 없다고 하는 우스갯소리가 빈말이 아니라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 건 보고 싶어 잠깐이라도 떨어져 있기 싫어서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인생을 함께 한 방향을 보자는 맹서를 하면서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부부가 한 방향을 볼 때는 TV를 볼 때뿐이고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싸울 때 밖에 없다니 이게 웬 말이란 말인가?      


필자 설계 경남 양산 심한재 거실의 테이블, 건축주가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부부가 한 방향을 볼 때는 TV를 볼 때뿐이고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싸울 때 밖에 없다니 이게 웬 말이란 말인가?


집에서 얼굴을 맞댈 수 있는 물리적인 장치를 이용하는 게 바로 Table에 앉는 것이다. 어차피 Sofa는 TV를 보는 자리라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Table은 집에서 마주 앉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이다. Table은 가장 중요한 가구이니 신중하게 구입하고 놓이는 자리도 신경을 써서 정해야 할 것이다.   

  

Table에서 무얼 할까? 평상시에는 커피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주방에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식사를 거르지 않게 되는 것도 Table의 역할이 될 수 있다. Table이 있는 자리에 비중을 두면 TV를 방으로 들이고 그 자리를 멋들어진 Table을 놓는 집도 늘고 있다. Table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면서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는 생활을 즐기기 위함이다.        

                                   

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 

    

이갑수 산문집 ‘오십의 발견’에 집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집에 산다. 바깥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가는 게 아니다. 집에서 지내다가 잠깐 밖으로 나간다. 바깥에서 잠시 볼 일을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 그곳이 집이다.’ 이만큼 명약관화한 집에 대한 정의가 또 있을까 싶다.      


우리는 늘 집에 있어야 한다. 몸은 집 밖으로 나와 볼 일을 보지만 마음은 집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일이 마쳐지고 나면 마음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야만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면서 편안해지게 되는 것이다. 돌아간다는 말은 마음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필자 설계 경남 양산 석경수헌, 따스한 불빛에 발걸음이 절로 집으로 향하게 되지 않을까?
 몸은 집 밖으로 나와 볼 일을 보지만 마음은 집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마음을 두지 못하는 집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잠자는 시간 외에는 집이 비워져 있다. 밤이 이슥해졌는데도 불이 켜지지 않는 집이 자꾸만 늘고 있다. 밤 아홉 시, 아니 열 시가 넘었는데도 불이 꺼져 있는 집은 분명 Home이 아닌 House에 불과한 것이 틀림없다. Home이 아닌 House에 살고 있다면 몸도 마음도 쉴 곳을 찾지 못하니 그 삶은 얼마나 고단할까?     


아파트에 살면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야 한다. 부부만 사는 집이 많지만 마주 앉아 대화를 자주 나눌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TV를 멀리하고 Table에서 보내는 시간을 자주 가진다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TV는 둘이 있어도 혼자가 되도록 만들어버리지만 Table은 혼자 있어도 다양한 일상의 즐거움을 가질 수 있게 할 것이다.     


가장 좋은 방을 손주가 쓸 수 있도록 꾸며 놓으면 3대가 자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방은 손주의 방이지만 하룻밤을 묵어갈 손님이 쓸 객실이 되기도 한다. 부부 외에 우리집을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면 단조로운 일상에 활기가 더해질 것이다. 물론 가장 귀한 손님은 손주라서 ‘손주의 방’으로 부르지만 우리집을 찾아올 사람은 얼마나 소중한 분이겠는가?      


일상에서 부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혼자 보내는 시간에도 차나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우리집이라서 좋지 않겠는가? 손주가 자주 오면 올수록 좋은 건 누구나 공감할 일인데 잠시 왔다가 서둘러 돌아가지 않고 하룻밤이라도 자고 가면 정이 더 깊어진다.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이냐는 옛 말씀은 지금도 더없이 즐거운 우리집의 일상으로 얘기할 수 있다.  



   

‘즐거운 나의 집’이라 번안된 ‘Home Sweet Home’은 오랫동안 부르고 있는 노래이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내 집 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 뿐이리.‘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누구나 행복해지려고 살지만 행복은 오로지 ’우리집‘에서만 찾을 수 있다. ’우리집‘을 지키고 ’우리 식구‘들이 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면 근심 없는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세계인의 애창곡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   

- 출처  https://cafe.daum.net/_c21_/home?grpid=1XDmH

이곡은 1823년 영국의 유명한 작곡가 헨리 비숍이 작곡했다고 한다. 나중에 미국의 극작가이며 기자, 문인으로 활동했던 존 하워드 패인이 노랫말을 붙였는데 영국에서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더 유명해진 노래로 알려져 있다.     

북부연합군 1만 2천 명, 남부동맹군 5천 명의 사상자를 낸 1862년 버지니아의 레파하녹크 리버 전투는 남북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유명하였다. 이 전투에서 양쪽 진영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낮에는 전투를 하고 밤이 되면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 양쪽의 군악대는 매일 밤 음악회를 열었는데, 어느 날 밤 이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북군의 군악대는 아주 특별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멜로디는 바람결의 새털처럼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그리운 가족이나 연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던 군인들은 사무친 그리움에 텐트 밖으로 나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멜로디는 강 건너편에 있던 남부군 진영에도 울려 퍼졌다. 남부군 군악대도 덩달아서 이 음악을 연주하고 남부군도 다 함께 합창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상대방이 적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강으로 뛰어나와 서로를 얼싸안고 모자를 하늘로 높이 던져 올리며 환호하였다.

   

이 장면을 취재했던 프랭크 막심은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다들 미쳤다.'     


노래 한곡 때문에 전쟁은 사라지고 오직 조국과 동포애만 남았던 것이다. 이렇게 '즐거운 나의 집'의 멜로디는 서로의 적대감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1823년 미국의 극작가이자 배우인 페인(1771∼1852)의 가사에 맞추어 작곡된 것으로 그의 오페라《Clari, The Maid of Milan》에서 불린 뒤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김 정 관 건축사/수필가     

도반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신문 논설위원

부산건축제 이사

Daum tistory: 무설지실(kahn777.tistory.com)

Tel : 051-626-6261

Mail : kahn7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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