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라는 말은 말 자체로 오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연이 닿아 만나게 되는 사람이라기보다 만나게 되는 사람은 누구나 인연이라는 끈으로 이미 이어져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내 일인 건축사라는 직업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거의 집을 지으려 하는 분들이다.
집을 지을만한 경제적인 성취를 이뤄냈다는 건 삶에서 성공한 여유를 누리는 거라고 볼 수 있다. 단독주택을 짓고 사는 분들은 아파트라는 부동산적 자산 가치보다 인문학적 삶의 가치를 더 중시할 만한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 단순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데도 꼭 집을 지어서 살아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는 분을 만나기도 한다.
브런치스토리에 올라 있는 글을 읽다 보니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분이 그런 사정으로 집을 지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집을 짓다가 자금이 부족하면 직접 공사를 해서라도 지어내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글에서 느낄 수 있었다. 두 아이의 엄마로 지극한 모성애, 노모를 모시려고 하는 딸의 효심만으로 지난한 집 짓기를 해낼 수 있을까?
집을 짓기로 마음 먹었다
부리
https://brunch.co.kr/@aya282/104
집 지을 땅을 구입했으니
집터를 구하는 건 집 짓기의 절반이라고 할 만큼 어렵다. 그런데 우리 열혈맘은 아이의 교육 여건과 노모의 생활환경까지 고려하여 집 지을 땅을 찾았고 계약을 마쳤다고 했다. 엄마는 용감하다고 하지만 사십 대 직장인으로 어떻게 이런 결심을 할 수 있을까?
한정된 자금으로 집을 지어내기 위해 건축에 대한 공부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글에서 전문가에 가까운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분이 살고 싶은 집의 평면도도 직접 그려서 글에 첨부되어 있어 설계부터 시공까지 직접 해낼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글에 ‘약은 약사에게 설계는 건축사에게’라고 댓글을 붙였다.
건축주이신 부리 작가님이 그려본 평면도
‘우리 식구가 살 집인데 이깟 걸 못할까?’라고 밀어붙이면 안 될 게 뭐야! 가상하기 이를 데 없는 그분에게 브레이크를 거는 심정으로 쓴 댓글이었다. 짧은 댓글에 담은 내 마음이 그분에게 전해진 모양이었다.
집을 짓는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렇게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집을 지어야 한다는 목표는 분명한 데 밀어붙인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서 어떤 식으로든 그분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댓글을 계기로 선생님 쓰신 글들, 설계하신 집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동안 해오신 작업들의 규모와 수준은 건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제가 가진 예산의 범위 안에서 계획하고 있는 집이 선생님께서 그간 건축하신 작품들과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메일을 보냅니다.
글에 드러난 부끄러운 고백처럼 저는 올해 열 살 되는 여자 아이 한 명, 여섯 살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부모입니다. 개인 사정으로 내년 상반기까지 육아휴직을 내놓았는데 복직을 하게 되면 양육과 직장생활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복직 전에 집을 완공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산은 부족하나 시간은 많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소규모 주택(30평 미만)으로 시공 기간이 짧지만 단열효과가 좋은 ALC블록 주택을 고려하고 있으며, 부엌가구, 창호, 조명, 문은 건축지 근처에 있는 공장과 직영으로 진행할 생각이며 실내 바닥 마감, 타일, 욕실 및 화장실 도기 설치 등은 제가 직접 혹은 지인의 손을 빌어서 해 볼 생각입니다.
경제적으로 여력이 없어 설계비로 계획하고 있는 금액으로도 저희 집 설계를 맡아주실 수 있을지, 가능하다면 만나 뵙고 상담을 할 수 있을지 여쭤봅니다.
일단 만나기로 했고
열혈맘 작가분과 약속을 잡아 우리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려면 근무일보다 토요일이 좋을 것 같았다. 작가분은 친구와 함께 사무실을 방문했고 건축주가 아닌 문우 사이로 차 한 잔 나누는 자리로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꼭 단독주택을 지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을 먼저 읽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은 형편대로 서둘러 지어서 될 일이지 않는가? 마침 집 지을 동네가 울주군이라서 직간접적으로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을 짓는 결심을 하게 되기까지는 과거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미래를 염두에 두고 집을 짓는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 집 짓기에서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는 집터만 확정적이다. 집에 관한 다른 건 뜻대로 할 수 있으나 제한되는 게 소요 예산이 될 것이다.
제 사무실인 도반건축사사무소, 여기서 만남의 자리를 가졌습니다
작가분의 과거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었다는 걸 그의 글을 통해 알았다. 작가분의 성장기, 결혼과 이혼, 싱글맘으로 키워야 하는 아이들과 모셔야 할 노모가 있으니 지금도 얼마나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미래는 무조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대화를 이어나갔다.
집을 짓기로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큰 애의 성장통 때문이라고 했다. 딸은 정서적 성장이 빨라서 일어나는 신체적 발육이 나이보다 성숙해지고 있었다. 몸의 변화가 다른 아이와 달리 나타나게 되어 겪는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엄마는 우리집을 짓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단독주택을 30년 간 쉰 채 가까이 설계한 경험으로 보면 집은 행복한 삶을 이루어낼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가족 간의 갈등이 치유되고, 일 때문에 귀가 시간이 늦었던 가장을 일찍 돌아오게 되고, 가족 구성원의 부조화를 극복하게 되는 등의 수많은 사례를 경험해오고 있다. 단독주택을 설계하는 건축사로서 그동안의 작업에 미루어 가지는 확신으로 작가분의 집 짓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 힘주어 얘기했다.
작가분의 집짓기 예산으로 정해둔 설계비로는 내가 설계자로 나서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그 예산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제안했고 그도 수락했다. 집 짓기의 고민을 공유하면서 허가와 착공, 준공이라는 행정 업무 전 단계까지 참여하는 것이다.
젊음은 어떤 일이라도 다 해낼 용기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손수 해내면서 예산을 절감하겠다고 한다. 아이에게는 용감한 모정과 엄마를 향한 효심으로 시작하는 집 짓기에 나서는 작가분께 응원과 격려를 담아 힘을 더해보려고 한다. 집터의 조건과 넉넉지 않은 예산이라는 한계를 안고 행복을 담아낼 집 짓기가 바라는 결과에 이를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