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계약을 하면서 언제쯤 허가를 받을 수 있느냐는 얘길 자주 듣는다. 집을 짓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건축주가 직접 쓰거나 임대나 분양을 해서 수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또 건축물의 일부는 직접 사용하고 나머지는 임대나 분양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짓는 경우가 있겠다.
건축주가 쓰기 위해 짓는 집으로는 단독주택이 대표적이다. 임대 수익을 위해 짓는다면 상가-근린생활시설이나 원룸이나 투룸 등 중소형 공동주택이 있겠다. 분양 건축물로는 오피스텔과 도시형 주택이나 상가 건축물을 들 수 있다. 건축주가 거주하면서 다가구주택과 근린생활시설로 임대수익을 얻을 목적을 같이 가지는 건축물은 상가주택이 있다.
건축주의 추상적이고 정성적인 지침-계획 설계
건축주의 지침은 다소 추상적일 수 있다. 단독주택이라면 이런 지침이 나올 수 있는데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이라면 어떨까? 임대 수익용으로 상가라면 ‘장사가 잘 되어서 월세가 잘 나오게 해 달라’, 다가구주택이나 오피스텔은 ‘한번 입주하면 옮겨가지 않고 계약 연장이 되게 해 달라’는 지침을 줄 수 있겠다.
정량적인 지침이라면 근거를 가지고 쉽게 안을 결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성적인 지침은 추상적인 바람이라 건축주가 명확한 결과로 마침표를 찍기가 쉽지 않다. 건축주의 정성적인 지침을 건축사가 정량적으로 표현해 제시할 수 있는 계획안으로 동의를 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계획설계 단계에서는 계획안을 검토하면서 3-D 모델링을 통해 건축주의 판단에 현실감 있도록 한다-필자 설계 에코델타 상가주택 이안정-설계 기간 4개월
행복하게 살 수 있다거나, 수익이 보장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건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건축사가 하는 일은 건축주가 집을 지으려고 하는 목적이나 목표를 대행하는 것이다. 건축사의 계획안에 건축주의 건축 목표가 확연하게 보이지 않으면 설계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다.
건축 설계 과정에서 계획 설계 단계는 가장 중요하니 많은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결론을 지어지지 않으면 계속 피드백을 거쳐야 한다. 건축주의 추상적인 지침을 건축사는 도면으로 구체화시켜야 한다. 차가운 하드웨어인 건축물에 따뜻한 삶을 담아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사의 구체적이고 정량적인 설계 작업-기본 설계
건축주의 건축 목적과 목표가 충분히 달성되겠다는 확신이 담긴 계획도면 작업이 마무리되면 기본 설계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이 단계부터는 예산과 법, 공사라는 세 가지 요건이 맞물려서 정량적 관점에서 판단하고 결정되어야 한다. 예산은 투자 개념이 들어가면 비용이 증대되는데 저예산으로 지으려고 하면 수익 가치가 떨어지고 좋은 시공자를 찾는 게 어려워진다.
또 부동산 가치를 염두에 두고 지으려면 투자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 그렇다고 집의 쓰임새를 뒤로 하고 외관 위주로 지으면 안 되지만 건축 재료를 잘 선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창호에 건축비를 더 들이면 집을 유지 관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한정된 건축비를 어떻게 배분을 하는가에 따라 집의 가치가 달라지므로 건축사의 제안에 따라 건축주의 판단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기본 설계를 마무리하면서 외관은 물론 내부 공간까지 3D-모델링으로 지어져서 생활하는 가상 현실을 체험할 수 있게 했다-필자 설계 양산 단독주택 지산심한-설계기간 5개월
건축 관련법에서 규정하는 구조, 단열, 소방, 장애자 관련 시설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법 규정에 따라 갖추는데 들어가는 공사비만 해도 점점 늘고 있다. 그렇지만 건축물은 미래를 내다보고 짓지 않으면 주변 건물과 비교해서 경쟁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계획 설계는 집의 쓰임새에 초점을 맞춘 정성적인 부분에서 협의가 되지만 기본 설계는 공사비라는 정량적인 사항으로 결정하게 된다. 집이 지어졌을 때 만족할 수 있지만 사용하면서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 판단해 보는 마지막 단계가 기본 설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공자를 만날 수 있게 하는 실시 설계
공사비는 냉정한 결과와 맞닥뜨리게 한다. 설계비와 달리 공사비는 건축주와 시공자가 첨예하게 대립하게 하는 불씨가 될 수 있다. 설계자는 건축주의 편에 서서 일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시공자는 공사를 해서 이윤을 얻는데 양보할 수 없는 처지에 서게 된다. 만약 설계자가 이윤을 우선해서 속전속결로 일하게 되면 시일을 다투는 공사 과정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많다.
실시 설계는 건축물을 짓는데 필요한 내용을 도면에 담는 작업이다. 실시 설계 도면은 공사비를 결정하는 자료이며 시공하는데 필요한 제반 사항이 충실하게 표기되어야 한다. 설계도면이 충실하지 못하면 시공 과정이나 준공 후에 건축주와 시공자가 집이 지어진 결과를 놓고 다툼이 생길 수도 있다.
충실한 설계도로 집을 지으면 건축주와 설계자, 시공자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필자 설계 부산 명지동 상가주택, 2021 BJFEZ 건축상 주거부문 최우수상 수상
설계도면이 충실하면 시공 능력이 부족한 시공자는 견적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부실한 설계 도면으로 시공자를 정하게 되면 저가로 견적을 낼 수도 있어 건축주의 적정한 공사비에 대한 판단을 잘못하게 한다. 부실한 공사비로 정해진 시공자는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꼴이 된다. 도면에 공사에 필요한 내용을 충실하게 표기하지 않으면 시공자에게 알아서 공사를 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공사를 수주하는 데만 급급한 시공자는 좋은 건축물을 짓는 건 관심 밖이고 저가로 견적을 내려고 한다. 저가공사비로 정한 시공자는 부실한 도면을 가지고 제멋대로 공사를 해도 지적할 근거가 없으니 다툼이 생길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건축주가 집을 지으려고 하는 목표에 맞는 시공이 적정하게 이루어지려면 공사에 필요한 내용이 충실하게 작업된 실시 설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집의 용도나 규모에 상관없이 설계 작업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설계 계약을 하면서 건축 허가를 언제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 건 사상누각을 지으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계획 설계, 기본 설계, 실시 설계의 과정이 무한정 시간을 쓸 수는 없겠지만 설계 기간을 독촉해서 될 일도 아니다.
설계비는 건축사가 설계 기간을 제대로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비용이라 보아야 한다. 건축주가 집을 짓는 목적에 맞는 계획안을 만드는 계획 설계, 적정 공사비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건축 관련법에 의거한 도면의 틀을 만드는 기본 설계, 건축주가 바라는 최종 결과물로 집을 지을 수 있는 시공자를 만나게 할 실시 설계는 어느 과정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좋은 건축사를 만날 수 있는 건 건축주의 복이 아니라 설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건축주만 누리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