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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관 Jul 08. 2024

단독주택 지산심한-'얼마나'와 '어떻게'

단독주택 규모를 정하며 어떻게 살 수 있는 집인가 화두를 들어보니

단독주택 설계 작업 중 '집'을 떠올리며 다잡아보는 화두, ‘얼마나’와 ‘어떻게’ 



지산심한의 집터는 통도사가 있는 영축산을 배경으로 하는 지산마을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집터의 배후가 되는 靈山인 영축산의 기운을 받을 수 있길 바란다. '집'이란 무엇일까?라는 근본을 화두 삼아 생각을 다잡아 본다.


통도사가 있는 영축산 자락의 양산 지산리에 집터를 잡은 단독주택 설계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다. 건축주는 집의 규모를 서른 평 이하의 단층으로 지으려고 했다. 여태껏 서른 채 가까운 단독주택을 설계했지만 최소 마흔 평은 넘어야 방이 세 개가 들어가면서 손님이 묵어갈 수 있는 집이 된다. 


'우리집'으로 살 수 있는 규모? 크기? 넓은 집이면 좋을까?


서른 평 정도의 규모로 ‘집다운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아파트의 규모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전용면적 25.7 평이면 방이 세 개가 나오는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집이다. 물론 발코니를 법이 허용하는 대로 확장한 상태라서 거의 마흔 평에 가까운 면적이 된다. 


단독주택의 서른 평은 아파트로 치면 분양면적 스무 평 초반 대에 해당되는 규모가 될 것이니 평생 살아야 하는 집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부부만 지내면 되지만 가끔 손님이 와서 묵어갈 침실까지 해결해야 한다는 목표를 두고 작업에 들어갔다. 규모가 ‘얼마나 되어야 하나?’라는 조건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명제의 차이를 생각해야 했다. 


필자 설계 경남 양산 소재 석경수헌 평면 및 배치도-300평 대지에 서른 평으로 지었다. 이 규모보다 더 큰 집이 필요할까?


아파트의 발코니 확장이 합법화되면서 아예 확장시킨 면적으로 설계되어 공급되고 있다. 발코니는 아파트의 외부공간으로 꼭 필요한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실내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지워버렸다. 발코니가 없어진 아파트가 일상생활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주는지 알지 못하고 저지르는 처사이다.


더 넓게 쓸 수 있는 집과 꼭 필요한 공간이 없어진 집은 분명 주거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진다. 발코니가 있었던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불편하고 갑갑한 생활을 하는가 알게 된다. 그렇지만 살아보지 않고 알 수 없으니 이사를 하고 나서 후회하게 되지만 옮겨 사는 건 어려운 일이다.


진리를 구하러 왔는가? 앉을자리를 찾아왔는가?


유마경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경의 제목에 언급된 유마거사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붓다는 문수보살의 대표로 문병을 다녀오라고 한다. 유마거사의 집에 도착해서 붓다의 제자인 사리불은 작은 방에 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을 하는 대목이 있다. 


그때 사리불(舍利弗)은 이 방 안에 앉을자리[牀座]가 없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렇게 많은 보살과 수많은 대제자들은 어디에 앉아야 할 것인가?'

장자 유마거사는 그러한 마음을 알고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도대체 그대는 진리[法]를 구하기 위하여 온 것입니까, 아니면 앉을자리를 원하는 겁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저는 진리를 위해서 왔지, 앉을자리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유마거사는 말하였다.

"알았습니다, 사리불이여.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신명[軀命]도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앉을자리에 집착해서야 되겠습니까? “   -[출처] 유마경 부사의품|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집터는 도로에서 3미터 정도 높여서 조성했고 영축산 능선이 보인다. 이 터에는 허물어야 하는 서른 평 규모의 집이 있다.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데 사람이 산 흔적이 없어 보인다


병문안을 온 붓다의 제자가 방이 작아서 문병객이 다 들어갈 수 있을까 걱정을 할 때 이곳에 온 목적이 뭐냐고 물었던 유마거사의 질문을 생각해 보자. 방의 크기에 잠깐 관심을 두었던 제자는 유마거사의 한 마디에 곧 그가 이곳을 찾아왔던 목적을 돌이켜보며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대는 무엇을 하려고 여기에 왔는가? 


넓은 집, 큰 집에 살면 그만큼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닐 터이다. '얼마나 큰 집이라야 될까?'라는 생각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로 우리 주거 생활의 방향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적정한 규모를 산술적으로 따지기보다 우리 식구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서적인 삶을 담아낼 수 있는 스페이스 프로그램을 건축사와 풀어나가야 한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의 규모


집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은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 집’이라는 쓰임새보다 모양새에 치중하는 ‘어떤 집’을 지을지 더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집의 모양새는 집에서 누리는 삶의 질質은 분명 쓰임새를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와 무관하게 근사하고 특이한 외관의 모양새를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경우가 많다.

 

집을 지으려는 결심을 하고 나서 ‘어떤 집’이어야 하는지 인터넷을 검색하고 단독주택에 대한 책을 구입해서 눈에 드는 집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찾은 집의 외관을 보여주며 나머지는 설계자에게 알아서 해달라며 맡기는 경우도 많다.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집에서도 과연 그럴까? 


집터에서 보이는 풍경, 앞에 보이는 案山이 편안하니 이 터는 당호처럼 마음이 한가로운 삶을 누리게 할 수 있을 듯하다.

건축주 부부는 이 집에 들어오면서 버릴 수 있는 것은 다 버릴 것이라고 한다. 무엇이든 가지는 그만큼 얽히고설켜서 속박되므로 버리고 사는 삶을 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침실에서는 잠을 편히 잘 수 있도록 침대만 들일 것이며, 서재에서는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면 되니 서가도 없이 한 줄의 선반에 좋아하는 책 몇 권을 두면 그만이라고 한다. 주방에서도 한 끼의 식사에 감사할 수 있는 조리를 할 것이며 거실에 TV는 두되 암체어 두 개를 놓고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 것이라고 했다.


단독주택을 지으려고 하면 그들이 살고자 하는 삶에 대한 관념적인 생각에서 구체화된 구상으로 정리해야 한다. 건축사는 건축주의 구체화된 삶의 구상을 집으로 옮겨내는 역할을 한다. 건축주는 건축사가 그려낸 도면을 확인하면서 그들이 살고자 하는 삶이 그 집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지 판단해야 한다.




이제 영축산을 배경으로 한 지산리 단독주택의 설계가 마무리되려고 한다. 건축주는 심한재心閑齋라고 당호를 미리 지어서 화두처럼 나에게 던져 주었다. 나는 설계자로서 당호의 의미대로 이 집에 살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을지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심한재心閑齋, 건축주가 화두처럼 던진 당호를 해석하면서 그려낸 스케치가 건축주와 만남을 거듭하며 다듬어져 그들이 바라는 집으로 구체화되어가고 있다. 설계자가 구상한 집의 얼개가 그들에게는 군두더기로 보이는 것이 많았다. 살아보면 필요할 것이라고 만들어낸 수납공간을 지워내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비우면 비울수록 마음이 그만큼 풍요해진다고 했다. 


‘비우면 비운만큼 선명해지는/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임영조 시인의 시구를 읊조려본다. 작은 집이기에 선명해지는 건축주의 삶이 또렷하게 다가온다. ‘크고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작은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고마움을 잃어버렸다’는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이 집에서 사는 삶이 아름답고 고마움으로 채워질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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