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쓰는 말이지만 ‘만든다’와 ‘짓는다’는 큰 차이가 있다. 옛날에는 옷과 음식, 집은 지어서 썼으며 약과 글, 농사도 짓는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옷도 만들어진 것을 사서 입으며 음식마저도 만들어서 파는 것을 사 먹을 뿐 아니라 집도 만들어서 파는 집을 분양받아서 산다.
‘짓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1. 재료를 들여 밥, 옷, 집 따위를 만들다. 2.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약을 만들다. 3. 시, 소설, 편지, 노래 가사 따위와 같은 글을 쓰다.’라고 나와 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와 약, 글은 '만든다'로 쓰지 않고 '짓다'로 따로 쓰고 있다. 이렇게 살펴보니 정성을 들여 만들어 쓰는 건 짓는다고 썼음을 알 수 있다.
지어서 써야 한다지만 만들어서 파는 것을 쓴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삶의 근간이 되는 의식주와 관련되는 것과 약, 글 등을 쉽게 사서 쓰다 보니 생기는 문제는 지금의 삶을 찬찬히 살펴보면 알 수도 있다. 일상에 필요한 그 어떤 것이라도 돈만 주면 살 수 있으니 남용이나 오용으로 삶 자체가 가벼이 여기게 되었다.
지어서 써야 한다지만 만들어서 파는 것을 쓴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을까?
집이 상품화된 아파트를 분양받거나 부동산 투자의 수단이 되어 옮겨 다니는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집다운 집에 대한 의식이 옅어지고 말았다. 옷은 직접 지어서 입기 어렵겠지만 밥까지도 지어서 먹지 않다 보니 한 집에 사는 가족은 있어도 식구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일상에서 얻어지는 행복이 무엇인지 놓쳐 버리게 되지 않았는지 싶다.
집에서 밥을 먹지 않으니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일상의 자리가 없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한 집에서 살아도 잠만 같이 자는 사이로 전락해 버린 이 시대의 가족상, 거의 매일 보도되는 크고 작은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의 시작이 밥을 같이 먹지 않는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어느 광고의 멘트가 마음에 무겁게 와닿는 건 왜일까?
아파트에 살기 전에는 좁은 집에서도 대가족 제도가 유지되었다. 그런데 아파트에 살면서 핵가족이 되었고 이제는 원룸 투룸이라는 도시형 주택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급속하게 늘고 있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아파트, 가족들마저 잠자는 시간이 되어야 집에 들어오니 손님이 방문한다는 건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되고 있다.
의식주와 관련되는 건 지어서 써야만 삶의 기본이 회복될 수 있다
의식주와 관련되는 건 지어서 써야만 삶의 기본이 회복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늘고 있다. 집이 우리네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사람들은 아파트에서 나와서 집을 지으려고 한다. 만들어서 파는 건 너무 흔해서 골라 사서 쓰면 되지만 지어서 쓰려면 정성을 다해야 필요한 만큼 얻을 수 있다.
집을 지어서 텃밭을 일구고 밥을 지어서 먹는 사람들은 지어서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서툰 농사로 텃밭에서 지은 채소는 볼품없지만 소중한 수확물이다. 그 채소로 반찬을 만들어 밥을 지어먹으며 얻는 행복을 어떤 가치와 비교할 수 있을까?
국수 한 그릇도 식구와 함께 먹으면 이보다 더 맛있는 밥을 부러워할 필요가 앖다
밥을 먹는 자리,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는 당연한 일이 누구나 하는 일상이 아닌 게 되었다면 삶의 원초적인 욕구가 스러지고 있는 게 아닌지.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소확행小確幸이라고 부른다. 행복이란 일상을 벗어나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행복한 삶이란 당연히 집에서만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