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호수 물안개가 스미듯 다가오는 빙도노채의 밀향

2017년 산 대평보이 도림원 빙도노채 시음기

by 김정관

이제 고인이 된 선배는 몇 년 전에 마셨던 보이차의 향미를 기억하고 제가 말없이 우려 드렸던 차 이름을 알아맞히던 고수(高手)였습니다. 그는 주로 수십 년 묵힌 보이차인 노차(老茶)를 주로 마셨던 분입니다. 선배는 큰 병을 앓아 시한부로 살고 있었는데 홍인이라는 노차를 가진 분을 만나면서 예물(禮物)로 골동잔을 준비해 갔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70년 이상 된 홍인을 보는 것은 귀인(貴人)을 뵙는 것이나 다름 아니었으니 그런 예를 갖추었나 봅니다.


저는 노차의 진미(珍味)를 음미할 구감을 가지지 못했으나 빙도노채 첫물 단주차를 마시게 된다면 제 나름의 예를 갖추게 될 같습니다. 빙도노채 고수차는 찻값도 비싸지만 한정된 생산량 때문에 단주 차를 맛보는 게 쉽지 않습니다. 포장지에 빙도노채라고 적힌 차는 많아도 실제 첫물 고수차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고수차의 향미는 알아차릴 수 있으니 빙도노채 단주차를 첫물차로 마셔보고 싶습니다.


이 시대 보이차의 최정상이라 할 수 있는 ‘빙도노채’ 고수차


2010년 전후로 노반장차가 주목을 받으면서 보이차는 고수차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지요. 노반장에서 시작된 고수차의 열기는 빙도노채에서 절정기를 맞고 있습니다. 빙도노채 차가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알 수 있는 건 빙도노채 인근의 네 군데 산지인 파왜, 나오, 남박, 지계까지 ‘빙도 5채’로 ‘빙도’라는 이름으로 차가 나오고 있는 걸 보고 짐작할 수 있지요.


현재 ‘보이차의 황제’라 불리며 ‘지존’으로 꼽히는 노반장과 빙도노채 차는 남-노반장, 북-빙도로 지역을 양분하고 있습니다. 이 두 차는 차맛의 기준에서 단맛이 다른 산지에 비해 풍부하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쓴맛에 익숙한 ‘맹해파’는 노반장에 손을 들지만 단맛을 좋아하는 ‘임창파’는 빙도노채에 열광하지요. 노반장 차는 깔끔한 쓴맛을 단맛이 감싸주고, 빙도노채 차는 풍부한 단맛에 쓴맛이 중심을 잡아준다고 할까요. .


임창차구.jpg 빙도노채가 있는 임창 차구 차산지도, 지도의 가운데 서반산에 빙도5채가 있다. 사진 출처 : 오운산


맹해파는 노반장을 단맛이 좋은 차라며 빙도노채는 싱겁다고 하면서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임창파는 빙도노채 차의 화려한 단맛을 어떤 차에서 음미할 수 있겠느냐며 다른 차와는 비교할 수 없다며 비교 자체를 불허한답니다. 아무튼 남-노반장, 북-빙도는 단맛에서 다른 산지에서 따를 수 없는 깊고 진한 향미를 보여줍니다. 찻값에서 노반장은 빙도노채의 반값으로 거래되고 있으니 대중의 평가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 보이차의 정상이랄 수 있는 빙도노채를 마신다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호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내게도 빙도라고 표기된 차는 열 종류나 있어 자주 마시지만 큰 감흥이 없으니 오리지널 빙도노채는 주인이 따로 있지요. 2009년에 빙도노채라고 표기가 되어있지 않았지만 최고급 철관음에 버금가는 화려한 향미를 음미할 수 있었던 차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런 향미를 음미할 수 있는 빙도차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보이차 고수차만 가진 독특한 차향인 蜜香밀향


절대 구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차향을 환상적으로 표현합니다. 각종 과일과 꽃의 향기로 차향을 이르는데 왜 나는 그 황홀한 표현에 공감하지 못하는지 안타깝습니다. 차 생활은 녹차부터 시작하면 40년 이상 마셨고 보이차만 20년째 마시고 있지만 쓰고 달다는 차맛을 음미할 정도입니다.


내가 보이차에서 특별하게 느끼는 향미는 밀향(蜜香)입니다. 한자 풀이 대로라면 꿀향인데 고수차에서 달콤한 향미의 정도 중 최상위로 볼 수 있습니다. 마른 차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올라오는 향은 미미하지만 마시자마자 향이 그득해지고 쓴맛을 따라 침이 나오면서 단맛이 더해집니다. 이때 꿀물처럼 달콤하게 다가오는 향미가 밀향입니다.


KakaoTalk_20260129_113125400.jpg 보이차 고수차에서 음미할 수 있는 밀향(蜜香)은 오래 묵힌 차보다 새 차에서 풍부한 향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빈 잔에서 묻어나는 차향을 음미하는데 이를 聞香문향이라고 하지요. 밀향이 좋은 차는 비어 있는 찻잔에 그득 담겨 있는 차향을 보는 듯 느낄 수 있습니다. 문향을 통해 밀향을 음미하게 되면 고수차의 珍味진미가 이런 것이라 탄복하게 되지요. 그런데 꿀꺽꿀꺽 차를 마시면 이렇게 대단한 밀향을 음미하는 걸 놓치게 됩니다.


노반장이나 빙도 차가 아니라고 해도 고수차의 향미는 첫물차에서 특히 차향이 풍부합니다. 차의 성분 중 아미노산에서 이 독특한 향기가 생성되겠지만 차나무의 수종과 토양의 미네랄 등이 산지마다 다른 향미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밀향이 풍부할수록 단맛도 깊고 그윽한데 첫물차가 귀하다 보니 밀향을 음미할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이름만 빙도가 아닌 2017년 산 대평보이 도림원 빙도노채


보이차의 지존인 빙도노채 차를 마실 수 있다는 걸로도 행운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차는 아마도 제 돈으로는 쉽게 구입할 수 없었을 것이라 고백합니다. 평소에 보이차에 관해 쓰는 제 글에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대평보이차 대표님이 선물로 주셨지요. 늘 좋은 글을 읽고 있어서 글값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설자가 빙도노채를 마셔보아야 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지요.


이 차가 제게 온 지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시음기를 이제야 쓰게 됩니다. 한소끔 식힌 탕수로 짧게 세차(洗茶)를 하고 조심스레 뜨거운 물을 붓습니다. 차를 만든 그해에는 찻물을 붓자마자 풍부한 밀향이 향긋하게 피어올랐는데 9년이 지난 지금은 차향은 많이 삭아졌네요. 차향은 삭아 들었지만 차맛은 깊어졌을까요?


KakaoTalk_20260129_112232460_03.jpg 2017년 산 대평보이 도림원 빙도노채, 氷島老寨라는 금색 글에서 보이차의 지존이라는 이미지가 전해져 온다


KakaoTalk_20260129_112232460_02.jpg 2017년에 내 손에 들어왔던 이 차를 특별한 날에만 마셨는데 이제는 100g 정도 남아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우릴 때는 어떤 향미를 음미하게 될까?
KakaoTalk_20260129_112232460_04.jpg 사무실의 내 작업실에 차린 차판, 어수선한 공간이지만 늘 차를 우려 마실 수 있어 소확행을 누리게 된다.
KakaoTalk_20260129_112232460_06.jpg 9년이라는 시간이 더해진 빙도노채 한 잔, 밀향은 시간을 머금은 무상의 도리 앞에 변화된되어 담담하게 다가온다


먹음직하게 보이는 진노랑색 차색을 보면서 차를 마십니다. 찻물이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깊은 단맛이 은근한 밀향과 함께 다가옵니다. 쌉싸름한 단맛에 은근한 밀향, 당도가 낮은 흑사탕 맛이라고 하면 직관적인 표현일까 싶은 맛에 입안 여기저기로 단침이 솟아납니다. 쓴맛이 만들어내는 단침이 입안에 단맛을 그득하게 만들고 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시원한 느낌으로 '이 맛이야'하는 충만감에 젖게 합니다.


차를 넘기니 걸림 없이 내려가면서 시원한 느낌이 아래로 뻗치듯 내려갑니다. 언젠가부터 좋은 차를 마시면 목 넘김이 부드럽고 시원한 느낌이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운이 아래로 향하는 이 시원한 느낌이 상기된 몸 상태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몇 잔을 마시니 손발에 열감이 후끈하게 다가오니 이런 몸 반응을 차기라고 하는 걸까요?




불경인 금강경에 ‘수보리야 불설반야바라밀이 즉비반야바라밀일새 시명반야바라밀이니라(須菩提 佛說般若波羅密 卽非般若波羅密 是名般若波羅密)’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 알아듣고 마는 것은 제 것이 아니라고 질타하신 것이지요. 최고의 보이차라는 빙도노채를 마시면서 제가 쓸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지만 이름에 치우친 편견일지도 모릅니다.



20년째 보이차를 마시고 있으면서 제가 얼마나 제대로 차맛을 음미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보이차를 마시면서 같은 차라 할지라도 어떤 날은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느끼고 또 다른 날은 시큰둥하게 받아들입니다. 최고의 차는 이름으로 빙도노채가 아니라 이름을 잊고 마셔도 만족하는 그 차가 빙도노채입니다. 이름이 빙도노채인 차를 마셨는데 흡족했던 오늘은 빙도노채를 마신 것이겠지요?



무 설 자


여성경제신문 '더봄'-'무설자의 보이차 시음기' 연재 4

원문 읽기 : https://www.woman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9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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