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코로나19라는 역병이 돌면서 누구나 ‘자가 격리’ 상태에 들어 꼼짝없이 집에 갇혀서 지내고 있다. 일상의 대부분을 집에서 지내게 되면서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거의 대부분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발코니 확장으로 외부공간이라고는 아예 없는 아파트는 완전히 닫힌 집이라 갇혀 사는 신세가 되었다. 거실 앞에 발코니가 있으면 문을 활짝 열어 바깥과 집 안이 소통되어 갑갑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발코니에 꾸민 작은 정원을 돌보거나 빈자리에 의자를 놓고 햇볕을 쬐며 바깥바람을 맞으며 지내고 있을 테니까.
아파트에서는 소파에 앉아 있지 않고 거실과 주방을 일없이 이리저리 다니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TV를 켜지 않으면 정적만 감도니 아파트살이는 따분한 일상을 보낼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때문에 출퇴근 이외에는 집에서 나가지 못하다 보니 숨이 막힌다는 푸념이 어느 집이라고 할 것 없는 답답한 사정일 것이다.
코로나가 끝난다고 해도 이런 일은 또 생길 수 있다고 하니 집이 단순히 잠만 자는 숙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마저 든다. 집에서 잠자는 일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파트 주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생기生氣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집에 부부만 지내다 보면 활기 없이 처지게 되는데 손님이 찾아오면 생기가 돌게 된다. 가장 귀한 손님은 출가한 자식일 테고 사위나 며느리가 자주 오는 집은 손주들이 웃음꽃을 피운다. 손주들이 와서 분주하게 집을 헤집고 다니니 가라앉아 있던 집이 생기가 넘친다.
그렇지만 아이들 때문에 층간 소음이 걱정이 되기도 하고 사위 며느리와 편하게 있을 수 없어 하룻밤을 지내고 가기가 쉽지 않다. 하룻밤 묵고 가야 조손祖孫 간에 정이 들 텐데 오자마자 갈 채비를 서두르니 이를 어쩌랴. 부모 자식 지간이라 하더라도 자주 보고 살아야 정이 들기 마련인데 띄엄띄엄 보는 사이라 의례적인 관계가 되고 마는 게 우리네 주거의 현실이다.
한 가구에 수십 억을 호가하는 해운대 초고층아파트도 손님이 편히 머물 수 있는 집이 아니다. 손주를 품을 수 없다면 노후에 즐거울 일이 있을까?
손님이 사라진 세상
언제부터였던지 집에 손님이 들지 않게 되었다. 손님이 찾아오지도 않지만 내가 남의 집에 방문하려는 생각도 아예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단독주택을 지을 때도 손님을 배려하는 걸 잊어버리기 쉽고 그렇게 지어버리면 아파트나 다름없이 되어버린다.
조선시대 한옥에서 두드러지는 개념은 안채와 사랑채가 구분되어 손님과 식구들이 어느 쪽도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되어 있다. 부부의 영역이 부인은 안채, 남편은 사랑채로 나뉘어 있어서 주로 남편을 찾아오는 손님을 사랑채에서 맞게 되므로 식구들의 생활영역인 안채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은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귀하게 여겼기에 공간체계도 안팎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집을 지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집에 손님이 끊어지면 가세가 기운다고 여겼을 정도이다. 손님에 대한 예우 정도에서 그 집의 격格을 평가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 세대에는 아예 집에 손님을 들이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파트에서 살게 되면서 그렇게 되었으니 이 시대의 집이라 할 수 있는 아파트는 조상이 물려준 미풍양속을 끊게 한 셈이다.
집에 드나드는 손님이 없어져 버린 지금 이렇게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주도권을 아버지가 쥐었던 옛날과 달리 온 식구가 평등하게 된 지금은 누구라도 집에 손님을 청할 수 있다. 하지만 아파트의 공간 구성상 거실에 손님이 있으면 다른 식구들의 생활에 지장을 받게 되니 식구들은 자신의 손님을 부르기를 망설일 수밖에 없다.
초가 안채와 너와집 객실로 나누어진 이 집은 열 평 남짓되는 작은 집이다. 다섯 평 정도 되는 객실에는 차실과 침실이 있다.
집에서 손님이란?
기氣는 눈에 보이지는 않는 흐름이다. 인체에 기의 흐름이 정체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기의 흐름을 원활하지 않아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침을 맞아 막힌 경맥을 뚫는다. 물도 잘 흐르지 않으면 이끼가 끼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집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으면 생기가 없다고 한다. 집이 생기를 잃어 처진 분위기가 되는 건 식구가 줄어든 요즘 어느 집 할 것 없는 공통된 현상이다. 부부만 사는 집도 그러하지만 혼자 사는 집에 생기가 돌 수 있을까 싶다.
부부만 사는 집에 자식들이 찾아와서 손주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그때 사람 사는 집 같다는 표현을 쓴다. 집에 생기를 더하는 건 사람의 표정이든, 말소리든, 움직임이든 동적動的인 움직임이 있을 때 일어나게 된다. 그 활기를 더해주는 인자因子가 바로 손님이라 하겠다.
기의 흐름이 막히거나 원활하지 않을 때 경맥을 뚫어주는 안마나 침이 하는 역할이 집에서는 바로 손님이라 하겠다. 자식도 손님이 된 요즘에는 VIP 손님은 사위와 며느리라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까? 집에 활기를 더해주는 해결사가 자식이며 할아버지 할머니의 외로움 치료사는 손주이지 싶다.
우리집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손주
손님이 편히 묵어갈 수 있는 집
우스갯소리에 이런 얘기가 있다. 식객이 며칠이 지났는데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아 주인이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날 마침 비가 내리는 데 주인은 가라고 가랑비가 내린다 하니 손님 왈, 더 있으라며 이슬비가 내린다고 응수를 했다고 한다. 객이 배짱이 좋은 철면피라 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손님도 얼마나 편히 머무를 수 있는 집인지 궁금하다.
백년손님이 사위뿐 아니라 며느리까지 해당되는 요즘 자식들이 자주 오는 집만큼 남의 부러움을 사는 집이 있을까? 손주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집은 노후에 더 바랄 게 없는 행복이 가득한 집이다. 그런데도 멀리 사는 자식이 찾아와도 하룻밤 편히 묵어가기 어려운 게 아파트이니 이를 어쩌랴.
아파트를 벗어나려고 단독주택을 지으면서도 손님에 대한 배려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이보다 더 큰 낭패가 있을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외로움이 가장 큰 걱정이라면 손님이 내 집보다 더 편하다며 자주 찾는 집을 지으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단독주택을 짓고 살 계획을 가지고 손주들이 자주 찾아오길 바란다면 손님을 배려하는 설계를 어떻게 할지 깊이 고심할 일이다.
필자가 설계 중인 양산시 삼수리 단독주택, 가운데 거실을 두고 오른편에 안채에는 주인 부부, 왼쪽이 바깥채는 손님이 머문다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고 싶은 이유로 하나만 짚으라고 한다면 자주 손주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바람이라 하겠다. 지인 중 한 분이 대학생이 된 손주를 자주 보고 싶어 거제도에 펜션을 한 채 구입했다고 한다. 별장 삼아 지내면서 손주가 친구들과 놀러 오면 같이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 때문이었다고 한다.
노후에 손주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바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단독주택을 지으면서 며느리와 사위가 기꺼이 찾아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얼개를 짜야만 그 바람이 현실이 될 수 있다. 결국 손님도 편히 머무를 수 있는 집이라야 행복한 삶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