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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관 Aug 17. 2021

일곱 번째 이야기, 전통 구들 들인 한실 서재

단독주택을 지으며 간과해서 후회하는 열 가지-벽난로보다 전통 구들 온돌방

법정 스님께서 쓰신 ‘텅 빈 충만’이라는 글이 있다. 스님은 글에서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분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도 더 충만하다.’라고 하시면서 빈방의 느낌을 독자의 마음에 채워준다. 가끔 사진으로 접할 수 있지만 법정 스님의 방에는 글을 쓰시던 앉은뱅이 탁자만 보일 뿐 텅 비어있다.     


입식 생활을 하는 아파트에는 공간마다 가구가 채워져 있다. 침실은 침대가 차지하고 거실은 소파가, 밥은 식탁에서 먹는다. 가구에 의해 집을 쓰는 사람이 제한되어 침실이 세 개인 아파트는 부부와 아이 둘만이 살 수 있다.     


입식 생활을 하지 않고 좌식 생활을 했던 시절에는 네 명이 아니라 방 세 개인 집에서 삼대三代의 일곱여덟 식구가 살았다. 안방은 거실과 식당의 역할까지 겸해서 썼었고 손님은 어느 방에서도 자고 갈 수도 있었다. 좌식생활은 어느 방이든 비어있어서 생활에 필요한 어떤 기능도 수행할 수 있었다.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분하다


가구 없이 비어 있던 옛집의 방은 생활에 필요한 어떤 행위도 담을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텅 빈 충만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입식 주거 생활을 하는 아파트에서 가구는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가구에 주어진 기능으로만 쓸 수 있다는 한계도 필요악으로 주는 셈이다. 아파트는 집을 쓸 수 있는 인원을 제한할 뿐 아니라 삼대三代가 살기 어렵게 되었으니 천륜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일본의 단독주택에는 다다미가 깔린 화실和室을 두는 게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와 함께 좌식생활을 해 온 일본 사람들은 화실이 있어서 전통적인 주거 생활을 이어가니 참 부럽다. 우리나라도 ‘우리집’을 한옥韓屋의 맥락을 이어서 짓고 다른 나라에는 없는 구들을 들인 한실韓室 한 칸은 꼭 두었으면 한다.    

 

 벽난로와 구들     


단독주택을 지으면서 거실에 벽난로를 보조난방기구로 두기도 한다. 하지만 벽난로를 설치하는 건 난방이 목적이기보다 인테리어 소품 정도로 생각하면서 설치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의 집은 바닥 난방으로 생활에 필요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데다 단열성능이 충분히 확보되기 때문이다.     


값비싼 벽난로를 설치했지만 장작을 넣어 불을 지피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집이 얼마나 될까?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기 위해서 불을 지피기도 하겠지만 일상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벽난로는 난방보다 생활의 품위를 더하기 위해 설치하지 않을까 싶다.     


벽난로처럼 장작을 때서 난방을 하는 구들방은 옛집에서나 볼 수 있는 지난 시절의 난방방식일까? 구들을 현대식으로 발전시킨 바닥 난방 방식이 온수온돌이다.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바닥 난방 방식은 외국에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채용하고 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유전자가 이끌어 내는
몸으로 느끼는 충만감을 구들방에서 누려보자


전통 구들은 아궁이에 장작을 때서 고래를 따라 불길이 지나며 구들장을 달구어서 바닥을 데워 실온을 확보하는 난방 방식이다. 전통 구들을 들인 방은 실온이 따뜻하게 유지될 뿐만 아니라 앉거나 누웠을 때 피부로 따끈하게 전해오는 열감에 시원하다고 하는 탄성을 지르게 한다. 우리나라 어디에나 있는 찜질방은 아파트에서 가지지 못하는 뜨거운 구들장이 주는 열감의 카타르시스를 즐기고자 하는 우리 한민족 체질적인 공동성의 증거를 보게 된다.     


벽난로를 놓을 것인가 구들방을 들일 것인가를 여러 가지 의미를 살펴서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입식 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벽난로가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유전자가 이끌어 내는 몸으로 느끼는 충만감에 주목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필자 설계 양산 심한재의 한실에서 툇마루로 이어지는 달빛 정원

  

 집은 생각을 일깨우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내려놓고 쉬는 곳     


 생각은 이성을 일깨우며 의지를 다해야만 가닥을 잡을 수가 있어서 지식으로 표현된다. 마음은 감성이 이끄는 대로 나를 놓을 때 드러나기에 지혜라고 쓴다. 지식은 옷처럼 필요할 때만 쓰게 되지만 지혜는 벌거벗은 몸이라서 언제나 함께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성을 지켜가며 흔들리지 않는 생각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벼슬을 내려놓는 나이가 되면 감성이 이끄는 마음 그대로 살 수 있어야만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성보다 감성이 지배하는 나이가 되면 누구나 점점 몸이 원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뭐 특별한 답을 얻으려고 하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공동성에 들어가 있는 존재가 된다. 양식요리보다 한식이 더 소화가 잘 되고, 의자에 앉기보다 따끈한 방바닥에 몸을 붙이면 더 편한 게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샤워로 몸을 씻기보다 따뜻한 물에 몸을 데우는 걸 더 좋아하게 된다. 푹신한 침대보다 두툼한 요를 깔고 등이 따끈한 잠자리에 몸이 편안해지는 게 우리나라 사람이다. 겨울이면 소파에서 내려와서 전자매트에서 뒹굴고 있는 게 어쩔 수 없는 우리나라 주거문화의 정체성이 아닌가?     


 집에 있을 때는 몸에 딱 붙는 옷보다 헐렁한 개량 한복을 입어보시라. 누구에게 보이는 겉모습에 치중하는 나이가 지나면 그저 내 몸이 편하면 그만이라며 살게 된다. 이성보다 감성, 마음보다 몸이 이끄는 대로 살 수 있는 집이라야 인생 후반기가 편하게 된다.     


심한재 전경, 왼쪽이 사랑채 개념의 거실채이고 오른쪽이 안채 개념의 침실채이다. 침실채에서 툇마루가 있는 방이 전통 구들을 들인 온돌 한실이다.


 인생 후반기를 위해 지어서 사는 집     


 이갑수 시인은 그의 산문집에서 이렇게 집을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집에 산다. 바깥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가는 게 아니다. 집에서 지내다가 잠깐 밖으로 나간다. 바깥에서 잠시 볼 일을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 그곳이 집이다’

    

 인생 후반기의 생활은 그야말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져서 집에서 주로 지내게 된다. 그 집이 아파트인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집이라야 할까?     


 앞에서 ‘나는 누구일까?’라는 화두 같은 자문自問에 ‘한국 사람이다’라는 자답自答을 내렸다. 이성이 앞서는 생각이 지배하기보다 감성이 이끄는 마음이 더 편한 집, 마음먹고 살기보다 몸이 더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집이 바로 한국 사람인 내가 살 집이 될 것이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진 습성 때문에 가구를 들인 공간을 버릴 수는 없기에 내 몸을 편히 뉠 수 있는 구들방 한실 한 칸을 들이면 어떨까 싶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시간에 장작 몇 개 아궁이에 집어넣으면 구들장이 따끈하게 데워지게 된다. 밤이 이슥해져서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구들장이 달구어져 방바닥에 깔린 두툼한 요는 따스하게 데워져 있다. 솜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빠지니 다음날 아침을 맞은 새 몸이 개운하다.     


 최근에 필자가 설계해서 지은 심한재의 건축주는 구들을 들인 한실에서 겨울 한 철을 났더니 지병이었던 꽃가루 알레르기가 나았다고 한다. 누구든지 단독주택을 지을 때 인생 후반기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는 것을 생각해서 지어야 하리라. 몸이 우선이 되는 나이가 되면 한국 사람이라는 공동성에 들어 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심한재의 韓室, 전통 구들 들인 온돌방은 서재로 설계했지만 남편이 쓰는 주침실로 쓰고 있다. 지병이던 꽃가루 알레르기가 이 방에서 겨울 한 철을 나고 거짓말처럼 좋아졌기 때문이다.




 가구 없이 비워진 방, 텅 비어있어 충만한 방은 좌식 생활의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 가구가 주는 편리한 구속에서 벗어나 방에서 뒹구는 자유를 얻는 것도 ‘우리집’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큰 집, 작은 집이라는 규모를 어떻게 잡더라도 구들방 한실韓室 한 칸은 꼭 들였으면 한다.        



  겨울밤이면 군불 넣은 방 안에 완자 문살 창호지로 스며든 달빛 그득하고     

  봄비 나리는 밤에는 방문을 열고 연못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다     

  고요한 새벽을 깨우며 찻물 끓는 소리,     

  홀로 마시는 차 한 잔, 따스한 구들방에 가득한 차향에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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