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 하늘, 바람 그리고 사람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때 일이다. 계절학기 수업이 끝나고 교내 서점에 갔다. 딱히 살 책이나 빌릴 책이 있는 게 아닌데도 종종 서점과 도서관에 가는 것은 기분 전환을 위한 내 오랜 루틴이자 나를 위한 선물 같은 행위다. 기분이 좋을 때는 도서관 특유의 책 냄새 때문에 더 기분이 좋아졌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책이 있는데 우울해하고 있을 틈이 없게 느껴졌다.
이 날은 후자였다. 이유 없이 울적하고 무기력했다. 서점에 가서 책 사이를 돌아다니다 『황하에서 천산까지』란 책을 집어 들었다. 동양사학을 전공한 저자가 중국 영토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4대 소수민족(티베트족, 회족, 몽골족, 위구르족)이 사는 지역을 여행한 뒤, 각 소수민족의 역사를 대중적 눈높이에 맞춰 풀어쓴 역사 에세이였다.
책을 읽고 나니 갑자기 초원에 가고 싶어졌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앞뒤 재지 않고 당장 실행에 옮긴다. 계절학기 수업 끝나는 날에 맞춰 당장 베이징행 항공권을 예매했다. 내몽골 사막과 초원에 갔다 따통(大同)을 거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기차역으로 가서 내몽골 투어 상품을 알아보고, 밤기차에 몸을 싣고 내몽골 자치구의 행정중심지인 후허하오터 (呼和浩特)로 갔다.
실은 후허하오터는 그 전년도인 2004년에도 갔다. 어학 프로그램 참여 차 3주간 베이징에 있던 나는, 그때도 내몽골에 가고 싶어서 친구들과 주말을 이용해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쿠붙이( 庫布齊) 사막으로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가 났다. 앞차가 졸음운전이었는지, 우리가 탄 버스 운전사가 졸음운전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앞차와 꽤 심하게 충돌했다. 승객 중에는 다친 사람들도 여럿 있었고 우리는 모두 인근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나와 친구들은 다행히 다친 곳 없이 무사했지만 여행은 그만두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꼭 일 년 만에 다시 간 후허하오터.
꼭 일 년 전에 갔던 패스트푸드점에서 밥을 먹었다. 일 년 전에 본 풍경이라 익숙함이 남아있는 거리를 둘러보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돌고 있는데 돌고 있지 않는 것 같은 느낌. 나만이 시간을 뛰어넘어 날아온 것 같은 묘한 이질감과 그 안에 미세하게 남아있는 익숙함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아서 하늘이 새파랗지 않았고 밤하늘의 별 하나 보지 못했음에도, 이때 처음 본 초원의 감동은 너무나 특별하고 강렬해서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하늘, 바람, 초원.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은 딱 그 세 가지뿐이었다.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하게 펼쳐진 초원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두 뺨을 스치는 바람이 한없이 자유로워서 나도 그 안에 들어가 하나가 되고 싶었다. 나라는 존재가 더 이상 쪼개어질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쪼개어져 풍경 속에, 바람 속에 녹아들어 가, 애초에 내가 바람이었던 것처럼, 애초에 내가 하늘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영원히 있고 싶은 느낌.
무척이나 아름답고, 그립고, 서글픈 감정 때문에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지금 나는 그때 내몽골에서 만난 언니의 나이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래서인지 다시 내몽골 생각이 났고, 그 언니 생각이 났나 보다. 지금은 이름 석 자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는 평생 단 한 번 만난다 하더라도 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때의 우리는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을 지속시키는 게 얼마나 어렵고 부질없는 일인지 서로 알았던 것 같다. 여행이 끝날 때 연락처 하나 주고받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 손 한 번만 꼭 잡고 헤어졌다.
그때, 지금의 나만큼 나이를 먹었던 언니가,
한참 어렸던 나에게 해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말들이 살면서 어느 순간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다.
그녀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변명과 핑계는 일절 늘어놓지 않고 올곧게 자기만의 길을 가고 있겠지. 그녀에게 나는 진작 잊혔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만 혹시나 다시 만나게 된다면 고마웠다고, 그리고 당신의 강함과 자유로움이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