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억할게요
2009년에 갔던 라오스 여행에서 만난 언니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언니와는 여행 경로가 비슷해서 여러 번 마주쳤고, 나중에는 여행 경비 절약을 위해 방도 셰어해서 썼다. 여행이 끝난 후 한 번인가 빼고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는데 아주 오랜만에 메일이 온 것이다.
"시현 씨, 마무를 기억 하세요?"
기억하다마다!
얼굴 한가득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지었던 동갑내기 친구 마무는, 미얀마에서 나를 진짜 '친구'로 대해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녀가 환하게 웃는 사진은 지금도 내 방 책꽂이에 올려져 있다.
그때의 미얀마는 불교 신자들이나 명상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여행자들에게 친숙한 나라는 아니었다. 라오스 여행을 하던 중 갑자기 옆 나라인 미얀마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밤 기차를 타고 육로로 넘어갔다.
미얀마는 낯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시골 같기도 했다. 나는 미얀마에서만 20일을 머물렀다. 비수기였는지 그 시기에 여행하는 사람들 자체가 많지 않았고, 여행 시작한 첫날 아주 잠깐 한 사람을 만난 것 외에는 여행하는 내내 한국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익숙한 언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생소한 느낌이었다. 말이 사라진 공간에서 나는 더 깊게 깊게 내 안으로 침잠했다. 그렇게 고요하게 내면을 여행하다 바간(Bagan)에서 마무를 만났다.
바간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인도네시아의 보루부두르 사원과 함께 세계 3대 불교유적지로 불리는 곳이다. 도시 전체가 최초로 미얀마(버마)를 통일한 바간 왕조(1044-1287)의 유적지로 가득하고, 수천 개의 파고다가 모여있는 구 바간시내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일몰은 특히 유명하다.
마무는 바간의 한 파고다(탑) 앞에서 기념품을 파는 상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나를 보고 그녀가 손짓하여 불렀다. 처음에는 관광지에 가면 으레 있었던 일처럼 상인이 또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무에 자전거를 걸쳐두고 속는 셈 치고 가까이 갔다. 그녀는 크게 반색하며 앉을자리를 마련해 줬다.
마무는 짧은 영어로 자신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서툰 글씨로 쓴 한글을 보여주며 요즘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녀가 나에게 베풀어준 호의의 이유를 모르겠다. 친절하게 대해서 방심시킨 뒤 매상을 올리려고 했던 것 같지도 않고, 단순히 한국이 좋아서 한국 사람에게 잘 대해줬다고 하기에는 따뜻하고 진실했다.
마무의 따뜻함 덕분에 나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바간의 저녁노을보다 더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라오스 여행에서 만난 언니는 내가 미얀마를 다녀온 이듬해 미얀마 여행을 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언니도 마무를 만난 모양이었다.
마무는 언니에게 시현이를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나는 유명 인사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한국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시현이를 아느냐고 물어보았을 그녀의 순진함과,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준다는 사실에 코끝이 찡해졌다.
"살다가 힘들고 지칠 때
지구상 어딘가에서
시현 씨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해요. “
정말로 그렇다.
우울하고 힘들 때 저 멀리 어딘가에 날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 안쪽이 따뜻해져 왔다.
아마도 마무와 나는 평생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 또한 잊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녀의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드리우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