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모라 괴짜 할아버지
인도 우타란찰주의 알모라(Almora)는 여행자를 머물게 할 매력적인 뭔가가 있는 곳이 아니다. 여정상 지나게 된 알모라는 물이 극심히 부족했다. 동네 개들은 길가에 고인 썩은 물로 목을 축였고, 숙소 물통에는 늘 물이 없었다. 쫄쫄 떨어지는 몇 방울 물로 고양이 세수만 간신히 할 뿐 빨래는 꿈도 못 꿨다. 이 곳에서 나는 잊지 못할 사람을 하나 만났다.
내가 묵은 게스트하우스 주인 할아버지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평가가 좋지 않았다. 'OO게스트하우스' 이야기가 나오면 살짝 인상 찌푸리면서 ‘아, 그 짠돌이 할아버지?’ 하고 말하게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좋은 사람도 없고 나쁜 사람도 없다는 가르침을 준 사람으로 기억된다.
2009년 인도 전역을 여행하며 망고 사 먹는 게 낙이었던 나는 그 날도 시장에서 망고를 잔뜩 사왔다. 망고가 담긴 비닐을 내 방 앞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잤다.
다음 날 아침, 숙소 주인 할아버지가 하얀 수염에 노란 망고를 질질 묻힌 채 굿모닝!하고 인사를 건넸다. 순간, 할아버지가 먹은 망고가 내 망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손님 망고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잠깐이나마 할아버지를 의심한 나를 부끄러워하며 테이블 위를 살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망고 몇 개가 없어졌다… 다른 게스트가 먹었을 리 만무하고 할아버지가 먹은 게 분명했다. 당황해하는 내게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망고가 맛이 별로 없어. 너는 안 좋은 망고를 샀어"
남의 것에 손을 대고도 당당한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어 화도 안 났다. 하얀 수염에 망고 흘리며 먹는 할아버지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어이 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다음번에 망고 샀을 때는 내가 먼저 몇 개를 가져다 드렸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나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책장에서 『Who's Who In India』 책을 꺼내 할아버지가 실려있는 페이지를 펼쳐 보여줬다. 할아버지는 과거에 성공한 은행원이었다.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와 부인과 함께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했는데 몇 해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인도의 옛날 이야기,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와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피식 웃게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 또한 계속되긴 했다. 방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불러서는 눈이 불편하다고 뜸을 놓아달라질 않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질 않나.
알모라에서 며칠 지내고 떠나려는데 갑자기 배탈이 났다. 열이 오르고, 물만 마셔도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다. 할아버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방에 와서는 소화에 좋다며 민트를 챙겨주었다. 몸이 나아지고 떠날 때가 되자 내가 떠나는 게 아쉬웠는지 햇빛 잘 드는 비싸고 좋은 방에 묵게 해 줄테니 더 있다 가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듬해인가?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알모라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는 한국인 여행자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주인 할아버지가 나에게 꼭 메일을 보내 달라고 했다고. 나는 알모라를 거쳐 간 수많은 여행객 중 하나였을 텐데 잊지 않고 기억해준 게 무척 고마웠다.
당시도 연세가 있었는데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깐깐하고 괴팍스런 사람으로 남아있겠지만 나에게는 어이 없지만 귀여운 할아버지로 남은 알모라에서의 기억이 참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