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버스 기다리며
그 때 우리는 어렸고, 지금보다 더 작은 일에도 마음이 무너지곤 했다. 나는 지독한 권태를 깨려 애쓰고 있었고, 그녀는 깊은 동굴 속에서 출구를 찾고 있었다.
독일에서 유학하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 친구와 만나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탔다. 바르셀로나의 후덥지근한 공기는 잠자고 있던 감각을 깨웠다. 조금씩 신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만나지 못했던 만큼, 외로웠던 만큼 어디든 주저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뜨거운 여름햇살보다, 가우디의 기상천외한 건축물보다 더 좋았던 것은 밤새도록 나눈 이야기들이었다.
“로세스 가 보셨어요? 안 가봤으면 꼭 가보세요.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아 한적하고 좋아요.”
게스트하우스의 추천을 따라 로세스에 가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오랜만의 바다라 광분해서 뛰어들었다. 해변에 드러누워 뜨거운 태양 아래 묵은 감정들을 꺼내어 말렸다.
로세스는 중세 느낌을 간직한 도시인 히로나, 살바도르 달리의 생가가 있는 카다케스에서 멀지 않다. 미술을 좋아하는 우리는 주저없이 카다케스를 택했다. 로세스에는 카다케스에 가서 일정 시간 머물다 돌아오는 배편이 많이 있었다. 그 날 밤 버스를 타고 히로나 공항으로 가야 하는 우리는 당일 코스로 다녀오기로 했다. 배는 하얀 포말을 내뿜으며 코스타 브라바 해안을 달렸다. 아기자기자하고 예쁜 카다케스 마을. 구경에 정신 팔려 하마터면 돌아가는 배를 놓칠 뻔했는데 친구가 말했다.
“그럼 우리 여기서 더 놀다 가자!”
우리의 다음 계획은 히로나 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친구는 학교로 나는 다른 도시로 가는 것이었고, 티켓도 예매해둔 상태였다. 그녀는 지금이 좋아서 앞으로의 일정을 잊은 듯 했다. 나는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이 여행하는 동안 점점 더 그녀가 좋아졌다.
체크 아웃하고, 버스 정류소를 찾아갔지만 버스 타는 곳이 어딘지 도무지 모르겠다. 확인 차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본 것이 화근이었다. 너 댓 명 모두 다 다르게 알려줬다. 가장 신뢰감 있어 보이는 사람의 말을 믿고 부리나케 터미널로 달려갔다. 터미널은 굳게 닫혀 있었다. 버스 운행의 기미조차 안 보인다.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눈 앞으로 버스가 지나갔다. 처음에 기다리고 있던 곳이 맞았는데 왔다 갔다 하는 새 버스를 놓친 것이다.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다음 버스가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서 타야 하는지 알기 위해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봤다. (모두 친절했지만 다들 부정확한 정보를 알려줬다. 덕분에 많이 헤맸어요…)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도시에서 버스 놓치고 밤중에 헤매는 기분이라니…
밤 공기가 쌀쌀하게 느껴진 나는 커다란 머플러를 꺼내 몸에 둘렀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밤의 쓸쓸함이 그 때의 우리와 꼭 같이 느껴졌다.
까만 밤에 쉬이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우리는 또 수없이 무너지고 아파하겠지.
처연한 이 밤처럼 휘청대고 슬퍼하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좋을 것 같은 그런 밤이었다.
이따금씩 이해받지 못한다 느낄 때마다 서로의 안부를 물었던 그 친구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여전히 쓸쓸하게, 그렇지만 자유롭게 그녀만의 색깔로 삶의 여백을 두텁게 칠해내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