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를 다시 배우는 중입니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저희는 지금 라스베이거스에 머물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천사들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된 미국 생활이 이 도박과 유흥의 도시, 라스베이거스까지 오게 되었네요.
라스베이거스로의 이사를 결정하게 된 건 어찌 보면 꽤나 우연에 가까웠습니다.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랜드서클 어딘가를 여행하고 돌아오던 길이었고, 기름을 넣기 위해 가까운 코스트코를 찾다 보니 자연스레 라스베이거스 쪽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풍경은 그간 보아온 스트립의 화려한 조명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단지 스트립에서 몇 블록만 벗어났을 뿐인데, 그곳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고요하고 낯선,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늑한 또 다른 라스베이거스가 있었습니다.
집이라는 게 참 이상한 것 같습니다.
처음엔 내 몸 하나 뉘일 자리만 있어도 족하다 싶다가도, 막상 집을 찾다 보면 조금 더 큰 집, 조금 더 예쁜 집을 꿈꾸게 되고, 집을 사기라도 하면 조금이라도 더 오르기를 바라기도, 집에 얽매여서 답답답함을 느끼기도 하니 말이지요.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을 좋아하고, 역마살이라도 있는지 여기저기 옮겨 살아온 저희 부부에게 집은 여행을 준비하는 안정된 베이스캠프이자 저희의 이동을 옭아매는 족쇄와 같은 양가적인 존재인 듯 합니다.
그래서 한 곳에 정착한 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탈출 아닌 탈출’을 꿈꾸곤 했는데, 그즈음 저희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이곳, 라스베이거스였습니다.
물론 이사라는 것이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첫 만남으로 결정지을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네바다 주는 소득세가 없는 몇 안 되는 주 중 하나였고, 당시 거주하던 오렌지 카운티에 비해 저렴한 주거비까지 고려되니 경제적으로도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라스베이거스로 왔습니다.
이곳에 와서 느낀 라스베이거스는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사막 속 카지노로 가득찬 씬시티(Sin City)보다는 조용하고 한적한, 때로는 목가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지기도 합니다. 특히, 어느 곳에 있어도 보이는 도시를 감싸고 있는 붉은 레드락(Red Rock)의 풍경과 그와 대조적이게 구름 한 점 보기 힘든 파란 하늘은 하루하루 일상의 고됨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어주는 묘한 몰입감이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생각만큼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둘 다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은 집 안에서 보내게 되고, 한동안은 ‘우리가 정말 타주로 이사를 온 게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말 오후 문득 답답함을 털어내고 싶어 무작정 차를 몰고 레드락 캐년 주립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소위 엣지(Edge)라 불리는 도시의 경계에 다다르자 주변의 풍경이 한 순간에 변화했습니다. 단지 한 걸음 차이일 뿐인데 도시와 자연의 경계가 시각적으로 보여지고, 붉은 바위 능선들이 눈앞을 채우는 광경은 마치 이세계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킵니다.
레드락 캐년은 국립공원은 아니지만, 연방정부에서 보호하는 지역으로 수억 년의 지질이 켜켜이 드러나는 독특한 자연 지형을 품고 있습니다. 스트립의 네온사인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화려함이 도시의 얼굴이라면, 이곳은 그 정 반대 선 고요함과 장엄함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오히려 레드락의 풍경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곳에는 하이킹을 하지 않아도 차로 순환할 수 있는 일방통행 도로가 있어, 자연을 조금 더 가볍게 마주할 수 있습니다. 중간중간 멈춰 설 수 있는 트레일과 전망대도 많고, 짧고 쉬운 코스도 많아 주민들에게도 운동코스로 아주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이 날 저희도 가벼운 트래킹 후, 작은 바위 언덕 위에 섰습니다. 그 곳에는 하얀 구름 떼와 빛나는 오후의 햇빛 그리고 우리가 그간 미쳐 보지 못했던 라스베이거스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에 서있는 높은 호텔들과 그 주변으로 펼쳐진 도시의 모습은 그 옛날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형성된 마을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하는 상상과 정말 우리가 이 곳에 새로운 삶을 살러 왔구나는 실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게다가 뒤를 돌면 보이는 장엄함 붉은 산맥과 대조적인 푸른 하늘의 모습은 다른 의미로 압도적이고 생경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잠깐의 산책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는 길목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여기를 새로운 집으로 정한 것은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이 정한 것이 아닌가. 화려함과 고요함, 인위적인 풍경과 대자연의 모습처럼 이 양가적인 모순이 우리가 집을 바라보는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놓치고 있던 마음의 소리처럼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곳들에서 얼마나 많은 모습들을 놓치고 있었나하는 아쉬움도 함께 찾아왔습니다. 미국에서만 이미 세번째 도시에 거주하면서 우리는 어쩌면 그 도시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겉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사를 한지도 이제 어느덧 반년 이상이 훌쩍 지났습니다.
또 어느날 불연듯 떠나가될지 모르는 지금의 집이지만. 이번에는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곳의 숨겨진 얼굴들도 함께 안고 떠나기 위해서, 이 곳에서의 삶을 여전히 배우는 중입니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