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끝났고,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지난밤의 빗물을 머금은 습한 공기.
텍사스 오스틴의 5월은 어쩐지 한국 여름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이곳 오스틴은 텍사스 주의 주도로 콜로라도강을 끼고 발달한 미국의 대도시 중 하나입니다. 도시를 둘러싸는 산세는 없지만, 도시를 가로지르는 콜로라도 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서울의 한강이 떠오릅니다. 다른 점이라면, 너도나도 바삐 움직이는 서울보다는 조금 더 조용하고 고즈넉하다는 걸까요. 홀로 노를 저으며 강을 따라 흘러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평온하게 느껴집니다.
지난 편지에서 말씀드린 졸업식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학기를 마무리하고 졸업식이 끝나고 나면 모든 게 홀가분하고 명료해지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졌습니다.
텍사스 주청사 앞에서 아직은 그리 뜨겁지 않은 햇볕을 맞으면서 가만히 앉아 있으니, 그동안 바쁘단 핑계로 미루어둔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삶을 꿰뚫는 목표보다는 그저 눈앞의 일에만 몰두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외골수적인 면이 제게 추진력을 줬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연료가 다해가는 기분입니다. 지금 회사에서도 매일 반복되는 업무, 특별히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하루하루를 그저 ‘버틴다’고 느끼는 날이 많습니다. 번아웃이 온 걸까요.
그래서 요즘은 고민이 많아집니다. 새로운 목표로 나를 또다시 채찍질해야 할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새로운 이유를 찾아야 할까. 지난 몇 년간 ‘미국에서의 삶과 정착’은 제 삶의 분명한 방향이 되어주었는데, 그 목표를 이루었다면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여행 내내 그 질문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비록 이번 여행 속에서 그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이렇게 버텨내는 하루하루들 속에서 또 나만의 길을 발견할 거라 믿습니다.
여전히 눈앞은 흐릿하고, 하루는 고단하지만—
오늘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날아가는 박쥐떼처럼
일단 저도 묵묵히 또 하루를 살아보려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나다운’ 모습일 테니까요.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