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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풍요의 역설

AI가 가져올 세상의 변화

by Kyle

AI의 발전 속도가 무섭다.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조차 ‘둠스데이’를 예언한다. 인류가 만든 지성이 결국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나는 그 예언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AI는 인류를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인류의 삶을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 변화의 끝이 낙원이 될지, 황무지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그 전조를 보았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던 순간, 인간의 직관은 처음으로 기계의 연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후 ChatGPT의 등장은 지식의 소유가 아닌, 질문의 능력이 새로운 지성을 정의하는 시대를 열었다.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 AI가 열어줄 장밋빛 미래를 믿는 이들과, 인간의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 우려하는 이들. 현실은 아마 그 중간 어딘가일 것이다.


AI가 만들어낼 가장 큰 변화는 ‘생산’의 개념일 것이다. 과거의 산업혁명은 노동의 효율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더 적은 노동으로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AI의 시대에는 노동이 아예 필요 없게 될지도 모른다. 로봇과 알고리즘이 인간의 개입 없이 생산을 이어간다면, 우리는 ‘무노동의 풍요’라는 전례 없는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

문제는 과연 그 풍요가 모두에게 돌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생산성이 무한히 확장될수록 자본과 기술을 소유한 소수는 더 큰 부를, 나머지는 더 깊은 무력감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나 제도가 그 간극을 메우려 하겠지만, 인간 사회는 본능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만들어왔다. 결국 풍요는 불평등을 완화하기보다 오히려 그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지도 모른다. 모든 인류가 누리고도 남을 풍요의 가운데에서, 인류는 마지막 존엄성의 선을 어디에 긋느냐를 놓고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 선을 긋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인류가 만드는 새로운 불평등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극단적 생산성의 향상은 ‘쓸모의 상실’을 가져올 것이다.

인류는 오랜 시간 일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 왔다. 일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자 존재의 근거였다. 그러나 AI가 모든 일을 대신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필요로 된다’라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풍요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무용(無用)의 공허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때 인류는 다시 묻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AI의 위험이 ‘악의’가 아니라 ‘무의미’에서 올 것으로 생각한다. 인류는 늘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이해해 왔다. 그래서 AI가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상상조차 인간적이다. 그러나 AI에게는 ‘파괴’의 동기가 없다. 그저 주어진 목적을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뿐이다. 문제는 그 목적을 정하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정말로 인류의 멸망이 도래한다면 그것은 AI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대신해 일할 존재를 원해왔다 — 때로는 노예로, 지금은 기계로, 그리고 이제는 지능으로. AI는 인류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복제물이다. 그러면서 마치 AI가 인류 역사에 새롭게 등장한 종인 것처럼, 그리고 그 새로운 종이 인류의 적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어쩌면 그 구분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변화를 어떤 태도로 맞이하느냐다.

지금 우리의 사회는 AI를 지나치게 극단적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유토피아의 열쇠로, 또 누군가는 디스토피아의 전조로 규정한다. 하지만 기술의 미래는 언제나 그 중간 어딘가, 인간의 불완전한 의도와 무의식이 교차하는 그 경계에서 만들어져 왔다.


AI가 불러올 위기는 악의나 반란의 형태로 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위험은, 우리가 아무런 철학적 준비 없이 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다. 노동의 종말, 무용의 감각, 그리고 풍요 속의 불평등 같은 문제들은 단지 기술의 부산물이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은 질문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기술을 ‘경쟁력’으로만 바라보았다. 속도를 높이고, 효율을 극대화하며, 더 빠른 진보를 좇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앞으로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다른 종류의 역량 — 사유하는 능력일 것이다.

기술의 속도는 우리를 새로운 시대의 문턱까지 데려다줄 수는 있지만, 그 문턱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것은 통찰의 깊이뿐이다.


아마도 많은 것들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다음 세대의 인류는, 자연이 만들어낸 빙하기처럼 AI가 만들어낸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기술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이다.


우리가 지금 던지는 사유의 크기가, 그들이 살아낼 세상의 모양을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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