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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ily Feb 17. 2024

욕먹던 개발자가 10년 차 PO가 되기까지

내 꿈은 처음부터 PO가 아니었다. 개발자였다. 

작년 하반기에 책 한 파트를 쓰고, 인생에서 처음 '북토크'의 연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수십 명 앞에서 이야기한다는 게 떨리기도 하고 한편으론 설레기도 했다. 어떤 주제를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다 아무래도 '북토크'니까 책에 쓴 내용을 요약해서 정보를 주는 게 제일 적합할 것 같았다. 책의 내용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며 청중에게 도움 될만한 핵심 내용들을 추리고 여러 장의 PPT로 요약했다. 


대망의 D-DAY! 시간에 맞춰 북토크가 시작되었고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즐겁게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Q&A'시간! 그때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떤 꿈과 목표를 갖고 지금의 자리에 가셨나요?

희미해졌던 내 주니어 시절이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 컴공 재학당시 내 꿈은 '개발자'였다. 첫 회사는 50명 정도 규모의 스타트업이었는데 그곳에서 3개월간 인턴십을 하게 됐다. 작은 규모다 보니 개발자수는 적고, 일은 많아 인턴을 신경 써 줄 여유는 없는 것 같았다. 입사 후 별도의 OJT 없이 남이 짠 코드만 며칠간 보다가 첫 업무가 주어졌는데 학교에서와는 달리 혼자 개발하기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혼자 고군분투하다가 개발 이사님께 제 코드 좀 봐달라고 도움을 요청드리니 자리에 오셔서 한숨을 '푹-'쉬셨다. 한숨소리를 듣고 내 심장도 쿵-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한 달 정도 비슷한 날들이 이어졌다. 점점 자신감은 떨어지고 개발엔 흥미를 잃어갔다. 검은 화면에 하얀 글씨를 보며 '내 길이 개발자가 맞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게 됐다. 주어진 업무의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내게 주어진 업무를 마감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잘하지 못해 또 혼날 것 같은 두려움이 커져갔다. 눈 깜짝할 사이 마감일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일단 화면이라도 완성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자는 생각으로 하드코딩을 시전 했다. 이사님이 "다했냐?" 하시며 자리로 오셨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라고 짧게 답하고 코드를 보여드렸다. 몇 분 간 이사님은 코드를 보며 한숨을 수차례 쉬시곤 "ㅇㅇ아, 너 진짜 개발이 하고 싶냐?"라고 물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며칠 뒤 금요일 이사님은 JAVA의 정석만큼 두꺼운 책을 한 권 주시며 주말 동안 여기에 있는 함수를 모두 외워오라고 하셨다. 책을 받아 들고 주말 내내 함수를 외우며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다 일요일 밤쯤 '월요일에 가면 못하겠다고 말씀드려야겠다.'라고 결심했다.  


월요일 아침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사에 도착했다. 대표님을 찾아가서 개발자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대표님은 '왜? ㅇㅇ이사님이 또 뭐라고 했어?'라고 물으셔서 '아니요.. 그냥 진짜 제가 개발을 못하는 것 같고요.. 재미도 없어서 평생 못 할 것 같아요'라고 하니 대표님이 생각지 못한 제안을 하셨다. '내가 보기에 너 개발할 때 기획안 쓴 거 보니까 잘 썼더라. 기획 쪽으로 전향해 보면 어때?' 솔깃했다. 사실 개발할 때 기획안 쓰는 게 훨씬 재밌다고 느꼈는데 대표님이 제안 주시니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기획자로 직무를 전향하게 됐다. 전향 후 회사에서 지나갈 때마다 마주치는 이사님의 눈길이 너무 차가웠지만 마음만은 훨씬 편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기획 업무를 했는데, 따로 기획 쪽 사수는 없어서 '내가 지금 기획자의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 게 맞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하는 기획자란 어떤 기획자인지, 무엇을 잘해야 잘하는 기획자 인지 기준 자체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기획안이 평균인지 또는 평균 이하인지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때부터 퇴근하고 기획 스터디를 다니고, 주말에는 기획 관련된 강의, 세미나 등을 들으러 다녔다. 다른 회사에 재직 중인 여러 기획자들을 만나고 기획에 대해 하나씩 알게 되니 '기획을 배우기 더 좋은 환경'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른 다음 회사는 '기획팀'이 따로 있었고, 주니어부터 미들, 시니어 기획자가 모두 있는 회사였다. 이 회사에서 동료들과 선배들을 보며 많은 성장을 해나갔다. 이때부터 '기획이란 정말 재밌는 거구나'라는 생각으로 업무를 할 때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다. 기획에 재미를 느끼다 보니 늦게까지 일해도, 주말에 일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연차가 쌓여가면서 남들보다 기획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기획을 잘하는 기획자'는 고객들이 좋아하는 기능을 출시하고, 성과를 내는 기획자였기에 고객 반응이 제일 궁금했다. 내가 만든 기능을 고객들이 좋아해 주시고 잘 써주시면 너무 행복하고 보람찼고,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기능인데 생각보다 반응이 저조하거나 지표가 좋지 않으면 속상하기도 했다. 때때로 잘하는 동료를 보며 내가 보잘것 없이 느껴졌을 땐 열등감과 승부욕으로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일에 시간을 쏟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꽤나 큰 성장을 해있었다.


개발자가 되겠다는 꿈으로 시작해 재미있는 일을 좇다 보니 어느새 10년이 넘는 세월을 기획자로 살아왔다. 일에 흥미를 느껴 더 깊게 파고들고 몰입하다 보니 연차가 꽤나 쌓였고, 욕심도 많아졌다. 더 좋은 회사에 가고 싶었고, 더 좋은 동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흥미로운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성장을 하게 되고, 더 큰 성장을 위해 여러 번 이직하다 보니 어느새 프로덕트를 담당하고 그 프로덕트를 성장시키기 위해 전략을 짜고, 로드맵을 수립하고, 메이커들과 프로젝트를 리딩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진 PO가 되어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
내 꿈은 처음부터 PO가 아니었다. 

딱히 내 직무의 최종 목표를 PO라고 세워둔 적도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재미있는 일, 내가 잘하는 일을 발견해서 그 일을 집요하게 파고들다 보니 PO가 되어 있었다. 나도 주니어 시절에는 커리어 패스를 어떻게 가져가는 게 정답인지, 내 꿈은 무엇이고 직무에서의 목표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결국 정답은 없는 것 같다. 현재의 불안함을 해결하고자 꿈과 목표를 세우는 것까진 말리지 않겠지만, 그 꿈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달려다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면 언제든 멈추고 '이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 맞는지?'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은 꼭 가져봤으면 좋겠다. 내가 세워둔 꿈이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과정 중에 포기했다고 실패했다며 자책할 필요는 전혀 없다. 세워둔 꿈을 이룬다기보다는 이 모든 과정들이 내가 '꿈'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즐겼으면 좋겠다.


특히 요즘같이 채용 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땐 경력도 이직하기 힘든데, 신입은 얼마나 힘들지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지금 어디에 있든, 어떤 업무를 하든 '잘하고 있으니 조금 더 힘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꿈과 목표가 꼭 없어도 된다. 즐거운 일을 찾고 담당하는 업무에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 가고 싶은 회사, 하고 싶은 직무, 되고 싶은 선배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북토크에서는 짧게 답변했지만, 집에 돌아와 질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니 내 사례를 들려주며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직무에 고민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도움이 되고 싶었다.

부디 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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