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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in Jun 29. 2020

거의 완전한 슈퍼히어로 통사 3. 1/4

냉전과 실버에이지 (1/4)

수퍼히어로 망했어요


  1950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다. 따라서 한국인에게는 어두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미국 코믹스 중에서 수퍼히어로 장르에게도 1950년은 암흑기의 이미지다. 캡틴 마블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포셋 코믹스는 자사의 잡지들을 폐간해가고 있었다.


  시장의 주류 또한 어두운 장르가 되었다. 범죄와 공포 장르가 유머와 로맨스 장르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팔렸다. 수퍼히어로는 저 뒤로 물러났다. 2차대전 특수가 끝난 후 시작된 시장 질서 재편의 결과였다. 캡틴 마블 코믹스가 시장에서 사라진 것을 기점으로 점차 많은 회사들이 장르를 갈아탔다.


  타임리 코믹스도 마찬가지였다. 마틴 굿맨은 캡틴 아메리카를 비롯한 모든 수퍼히어로 만화를 캔슬하고 시장에서 잘 팔리는 범죄, 공포, 유머, 로맨스 등에 집중했다. 1950년대 초반에 잡지가 나오고 있던 수퍼히어로는 DC의 트리니티뿐이었다. 만화 시장에서 골든 에이지의 거품이 걷히는 과정이었다.


  주류가 된 범죄/공포 장르에서 강세를 보인 신흥 강자는 EC였다. 맥스 게인즈가 죽은 후 회사를 계승한 아들 윌리엄 게인즈의 경영 성과였다.


윌리엄 게인즈의 주도 하에 탄생한 EC 코믹스의 범죄/호러 라인업.

범죄물 표지는 잘린 머리, 신체 해체, 자살 현장 등을 묘사한 섬뜩한 것이 많다.



암흑기, 프레드릭 워댐


  그러던 1953년에 EC 코믹스를 환장케 하는 공격이 시장 외부에서 들어왔다. 정신과 의사인 프레드릭 워댐(Fredric Wertham) 박사가 출판한 저서, ‘순수의 유혹’(Seduction of the Innocent)이 그 공격이었다.     


  만화계에서 워댐 박사는 이 저서로 인해 악마가 되었지만, 사회 전체적인 시점에서 보면 상당한 위인이기도 하다. 그는 흑인 빈민들의 정신 건강에 큰 관심이 있었고, 이를 돌보면 하층민들이 저지르는 엽기적인 강력 범죄의 숫자와 수위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최고 업적은, 인외마경 수준이었던 할렘에 흑인 청소년을 주로 치료하는 라파르그 클리닉(Lafargue Clinic)을 개설한 것이다. 그리고 라파르그에서 워댐 박사는 황폐화된 도시 흑인 빈민 청소년들의 정신세계와 그들이 벌이는 각종 반사회적 범죄 행태를 목격했다.


뉴욕 할렘의 성필립 교회 터에 개원한 라파르그 정신의학 클리닉.

1946년에 개원해 흑백 학생의 분리가 불법이라는 판결이 나온 후인 1958년에 폐원했다.


  역사적으로, 사회는 신매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왔다. 소설, TV가 그랬고, 만화와 영화 또한 그런 탄압을 받았으며, 가장 막내인 게임은 이제야 매체 억압에 대한 대화가 시작될까말까 하는 중이다. 소설의 선배 장르들은 처음 등장한 이후로 꽤 오랫동안 하층민의 허무맹랑한 읽을거리 취급을 받았다. ‘소설 같은 소리’라는 관용어에 아직도 그런 정서가 묻어 있다. TV 또한 ‘어느 어린이가 TV에 나온 걸 따라하다가 죽었다’는 식의 괴담이 있었다. ‘바보 상자’라는 단어는 아직 생명력이 다 없어지지 않았다.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도 ‘이런 생생한 경험을 일반 민중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과 혼동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영화를 영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라는 문구를 떠올려 보라.


  이런 신매체 억압의 맥락은 역사적이다. 워댐 박사도 역사의 흐름을 거부하지 못했나 보다. 그는 청소년 강력 범죄의 원인으로 만화를 꼽았다. 라파르그에서 인터뷰한 청소년 범죄자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니, 모두들 만화에서 범죄의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 논리였다. ‘순수의 유혹’은 이 주장을 통합해 제시하는 책이다. 당연히 이 책은 만화 반대 진영에게 성서가 되었고, 만화 반대 정서에 전국적인 불을 붙였다. 그리하여 1990년대 한국에서도 볼 수 있었던 장면이 나왔다. 도시 한복판에서 만화책 무더기에 불을 붙이는 학부모들의 만화 화형식.


  워댐 박사는 기막힌 용어를 만들어냈다. “Crime Comics”라는 용어였다. 범죄 만화로 번역할 수 있으니 범죄 장르의 만화가 아닌가 싶지만, 이 용어에 담긴 의미는 ‘만화 자체가 범죄나 다름없는 만화’라는 의미였다. 크라임 코믹스는 그걸 읽는 청소년들에게 범죄를 부추기고 있으니 범죄나 다름없다는 것이 워댐 박사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 크라임 코믹스에는 범죄, 호러, 탐정, 판타지 장르만이 아니라 ‘허무맹랑한’ 수퍼히어로도 포함되었다. 한편 워댐이 만든 용어가 아니고 세간에 떠돌던 용어를 워댐이 정착시킨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순수의 유혹     


  그 주장의 논리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 ‘순수의 유혹’을 직접 읽어보면, 굉장히 독창적이라서 감탄이 절로 나오는 해석들이 있다. 비꼬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정신과 전문의의 통찰이 들어간 해석도 있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자.


프레드릭 워댐의 필생의 역작.


1. 수퍼맨은 반미국적 파시스트다 : 4장에서 제기되는 해석이다. 강한 힘으로 무엇이든 해내는 스토리의 수퍼맨, 그 수퍼맨에 깔린 이데올로기가 억압적인 약육강식이라는 해석이다. 초월적 인간이 있고 그가 모든 것을 해준다는 세계관이 반미국적인 파시즘이라는 분석이다. 분석이 없이 요약만 해놓으면 헛소리지만, 분석의 논리 구조를 보면 수퍼히어로 장르에 대한 진지한 비판점이다. 9장에서 이 분석을 요약한 문장이 나온다. “만화의 진짜 메시지는 이거다: 물리적 힘은 선이다.”


2. 원더우먼은 동성애를 조장한다 : 7장과 9장의 해석이다. 당시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보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자. 원더우먼은 주체적인 여전사이며, 에타 캔디를 비롯한 그룹 추종자들이 있는데, 레즈비언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시도이니 반여성적이라는 해석이다. 이건 분석 과정을 봐도 결론부터 글러먹었기에 무가치하다.


3. 배트맨과 로빈은 게이 커플이다 : 역시 결론부터 글러먹은 종류의 해석이지만 분석 과정은 설득력이 있다. 다이나믹 듀오의 작중 인간관계에 ‘건전한 이성애’의 측면에서 연관된 여성 캐릭터가 없다는 것이 7장에 나온 분석이다. 이 분석은 그럴 듯한 해석이라서, DC의 편집부는 배트우먼이라는 급조한 캐릭터를 배트맨의 상대역으로 만들어 넣어야 했다.


4. 만화에는 잘못된 과학적 지식이 등장한다 : 2장의 주장이며, 5장에서도 빈민 아동의 비문해율이 높은 이유 중 하나가 만화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미국식 교육 구조에서는 당연히 나올 법한 주장인데, 빈민가의 경우엔 교육 시스템이 아예 작동하지 않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특수성을 아무리 감안해줘도, 사회 시스템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만화에 돌리는 주장이다.


5. 만화책 속의 광고가 부적절하다 : 부적절하다는 단어는 워댐의 요약이 아닌 내 요약이다. 이는 업계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인데, 만화책에 실린 광고가 여성 가슴 성형, 다이어트, 총기 광고라는 점이다. 특히 성적 매력에 관련한 광고는 청소년의 성별 고정관념(진보적이다!)과 성적 방종(보수적이다!)을 불러온다고 8장에서 경고한다. 총기 광고는 비록 BB탄 총(장난감이잖아!) 광고라 해도 폭력성을 부추긴다고 보고 있다. (이 부분은 2번 주장과 묶어서 보면 다소 헷갈리는 결론이 나온다. 워댐 박사는 성상품화와 외모 지상주의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창녀 유형의 여성 캐릭터를 부정적으로 본다. 그리고 원더우먼 류의 전사 유형 또한 동성애를 조장하니 부정적이다. 그럼 남는 여성 캐릭터 유형은 성녀 유형이다. 그리고 성녀 유형은 시대가 많이 흐른 현재에도 가부장적 질서의 맥락에서 주로 사용된다. 워댐 박사가 가부장적이고 차별적인 여성관을 도덕적이고 진보적인 테제로 가리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6. 그림이 너무 많고 작가의 페이가 적다 : 업계의 방어 논리를 소개하고 이를 논파하는 10장의 주장 중 하나다. ‘그림이 너무 많다’는, 그렇기 때문에 독자의 예술적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주장이다. 워댐 박사가 실제로는 만화를 혐오한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작가 페이 문제는 표현의 자유 방어 논리를 논파하는 용도다. 수입이 적으니 편집자와 회사의 눈치를 보게 되고, 예술적/직업적 작품 활동이 아닌 상업적 작품 활동만 하게 된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꽤 설득력 있다. 게다가 ‘만화 비평이 없으니 도덕을 무시한 성장을 한다’는 매우 가치 있는 지적도 10장에 있다.


  이외에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해석과 주장이 헛소리와 공존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할 근거로는 범죄 청소년들의 라파르그 인터뷰 기록들을 갖고 나왔는데, 그 양과 질이 굉장히 좋다. 심각한 수준의 병리적 정신 상태를 갖고 있는 청소년들이, 그들의 범죄 행위에 대한 힌트를 어디서 얻었을까? 인터뷰를 해보니, 만화였다! 이런 크라임 코믹스! 이런 식의 사례 활용이다.


  그래서 최소한 사례 연구의 측면에서만큼은 이 책은 양질 양쪽에서 훌륭하다. 정확히는, 훌륭해 보인다.


  2012년에 캐롤 틸리는 ‘순수의 유혹’의 근거 자료와 해석을 분석하는 메타 연구를 해 논문을 냈다. 틸리의 논문에 따르면, 사용된 사례들에 문제가 많이 있었다. 상당수가 과장되었을 뿐 아니라 조작된 경우도 발견됐다. 여러 건의 사례를 하나로 병합해서 사례의 심각성을 높이거나, 하나의 사례를 여럿으로 쪼개 양을 늘이거나 한 경우가 많았다. 어떤 인용문은 출처가 불분명했다. 블루 비틀과 캡틴 마블을 언급하는 사례의 경우에서는 이 두 캐릭터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블루 비틀이 벌레로 변신하는 줄 알고 카프카에 비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워댐 박사가 사례를 수집한 라파르그 클리닉은 범죄를 저질렀거나 그에 준하는 상태의 청소년을 치료하는 시설이다. 당연히 사례가 심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연구 집단과 함께 반드시 있어야 할 비교 집단이 없었고, 표본의 신뢰도 또한 낮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워댐 박사는 ‘순수의 유혹’을 쓰면서 스스로를 십자군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10장에 나오는 문장이다. “난 천국문 앞에 선 나를 상상한다. 베드로께서 내가 지상에서 무엇을 했냐고 묻는 순간을.” 그러면 자신은 베드로 사도에게 크라임 코믹스와 싸웠다고 말하겠단다.


  하지만 이 메타 분석은 2012년의 것이다. 이런 분석을 당대에 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극히 적었고 그들의 스피커 또한 거의 없었다. 그래서 워댐의 주장은 쉽게 퍼져나갔다. 근거는 불충분하고 해석의 일부는 터무니없었지만, 그동안 없었던 만화 비평의 역할은 해낼 수 있을 정도의 형식은 갖추었다. 게다가 주장 중 일부는 가치 있다. 그래서, 이런 ‘가치 있는’ 주장에 정치권이 반응했다. 각지의 도시들에서 만화 화형식이 열리는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1948년에 웨스트 버지니아의 한 시민이 만화책 수백 권을 공개화형한 이후, 이런 장면은 여러 도시에서 재현되었다.

사진은 뉴욕 빙햄튼의 화형식을 타임에서 보도한 사진이다.



상원 청문회     


  1954년, 에스테스 키포버(Estes Kefauver)라는 민주당 소속의 상원의원이 있었다. 근거지는 테네시 주였고, 정치적 자산은 주로 조직범죄 대응에서 얻어냈다. 정치적 성장을 원하지 않는 정치인이 어디 있을까. 키포버는 자신의 지지율 상승의 기회를 워댐 박사에서 찾았다.


  키포버의 소속 위원회 중에는 ‘청소년 범죄 소위원회’도 있었다. 설립된 지 1년 밖에 안 된 임시 소위원회였고, 키포버 의원은 오픈 멤버였다. 그리고 이 소위에서 워댐 박사의 ‘순수의 유혹’을 근거로 삼아 만화 업계에 대한 청문회를 진행했다. 키포버 의원 개인은, 본인의 전문 분야인 조직범죄와 만화가 연결된 것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제기했다.


  청문회는 6월 21일과 22일에 열렸다. 이날은 만화 업계에서는 “심판의 날”(Judgment Day)로 부른다. 워댐 박사는 모두발언 삼아서 청문회 시작 연설을 하여 만화의 해악을 설파했다. 청문회에 끌려나온 사람 중 가장 거물은 EC의 사장 윌리엄 게인즈였다. 그리고 윌리엄 게인즈 린치 한마당이 펼쳐졌다. 온갖 질의가 윌리엄 게인즈에게 쏟아졌고, 그는 아버지 말을 듣지 않은 대가를 이자까지 쳐서 너무 과하게 돌려받았다. 증거물로 나온 만화가 EC의 크라임 서스펜스토리(Crime SuspenStory)의 #52 이슈였을 정도다.


  이 청문회에서 벌어진 허버트 비저(Herbert Beaser) 의장과 윌리엄 게인즈의 문답은 바로 다음날 뉴욕 타임즈 1면에 실렸다. 청문회 자체는 TV 방송으로도 나갔다. 당시 미국 사회가 이 청문회와 만화 반대 운동에 얼마만큼의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드러난다.


당시의 청문회 방송 화면.


  정작 이 모든 일을 추진한 키포버 의원은 청문회가 끝난 후, 민주당의 대선 경선 레이스에 참여하면서 만화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청문회 보고서 또한 워댐 박사의 논조를 따르지 않았다. ‘만화와 청소년 범죄의 연관성이 의심되지만, 확실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 정도였다. 하지만 업계는 이미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었다. 만화 분서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불매 운동이나 강력한 비난 또한 속출했다.


  회사들은 납작 엎드리기로 했다. 이미 사회적 지탄 때문에 수그리고 있었으니 쉬운 동작이었다. 회사들은 청문회가 끝난 직후부터 범죄/공포 만화들을 앞다투어 캔슬해갔다. EC의 경우엔 매드(Mad) 하나만 남았고, 이후 EC는 폐업하고 스토리 판권을 관리하는 소기업의 길로 들어선다. 윌리엄 게인즈가 만화계 표현의 자유 수호 투사처럼 변해간 기점도 이 즈음이다.


판권 관리 회사로 전락하여 버틴 EC 코믹스는 20-19년 홈페이지 대문에 이런 문구를 넣었다. "빌 게인즈가 옳았다."

배경의 그림은 여성 살인 피해자의 목이 도끼로 잘린, 청문회 증거로 채택되었던 크라임 서스펜스토리 #22의 일러스트 표지다.



우리는 검열을 존중합니다     


  만화 회사들이 납작 엎드리는 방법은 검열 시스템 추가였다. 행정부 규제는 없었다. 키포버 의원의 경우처럼, 정치권은 청문회 이후 관심의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이다. 대신 회사들은 미국만화잡지협회의 예산을 내어 독립 조직을 만들고, 이 조직에서 출판 만화를 검열하게 했다. 자체 검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3자 검열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에서 예외인 회사는 델 코믹스와 같은 극소수의 대형 고급 만화 회사뿐이었다.


  이 검열 단체는 Comics Code Authority라는 이름이었고, 약칭은 CCA였다. 요즘 CCA를 검색하면 캘리포니아 미술대학, 정준상관분석, 회로 카드 보드,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담관암, 중국국제항공의 식별부호 같은 것이 나온다.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단체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국 사회 전체가 만화라는 신매체에게 부리는 히스테리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만들었기 때문에, 업계 내의 독립 권한을 갖고 회사들 위에 군림하는 단체였다. 법적 효력 같은 것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워댐 박사는 법적 권한이 없어서인지 반쪽 대책이라고 비난했다.


  CCA는 검열을 통과한 이슈와 볼륨에 검열 인증 씰(Seal)을 발급했다. 업계는 이 씰을 이슈와 볼륨마다 붙여서 출판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건전만화’다. 검열을 통과한 건전만화가 되기 위해 준수해야 하는 강령은 1954년 10월에 첫 버전이 나왔다. 편집 강령은 A, B, C의 세 파트로 나뉘어 있었고 별도로 광고 강령도 정해져 있었다. 54년의 최초 버전을 보면 당시 미국 사회가 어떤 히스테리를 출판 만화에 쏟았는지 엿볼 수 있다.


CCA의 씰 마크.

2018년 애니메이션의 명작으로 남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인트로에는 제작사들의 로고 후에 이 마크가 나온다. 검열의 역사를 기억하는 한편 조롱하는 의도로 보인다. 실제로 해당 영화는 코믹스 코드를 완벽히 준수했기 때문이다.


  편집 강령 A 파트는 만화의 스토리를 창작하고 편집할 때의 전제를 총 12항목으로 규정했다. 그 내용 요약은 이렇다.


1. 범죄는 반드시 잔혹하고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논조로 묘사해야 한다. 즉, 범죄자의 인간적인 면모나 범죄의 불가피한 동기 같은 건 나와선 안 된다. 권선징악 플롯만이 허용된다. : 1항, 4항, 5항, 6항에서 반복적으로 나온다.

2. 사법 권력 기관이 무능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 1항, 3항, 9항, 10항에서 반복적으로 나온다.

3. 모방 범죄를 막기 위해 세세한 묘사는 금지된다. 너무 잔인한 내용의 범죄 또한 마찬가지다. : 1번 요약과 연관된 내용이다. 2항, 10항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4. 제목과 부제에 ‘crime’을 써선 안 된다. 표지 홍보문구에 쓰일 수는 있지만 다른 단어들보다 커서는 안 된다. : 11항, 12항의 내용이다.


  편집 강령 B 파트는 만화에서 소재를 다루는 방법에 대한 전제를 총 5항목으로 규정했다. 그 내용 요약을 보면 A 파트와 다른 게 무언가 싶은데, A 파트가 주로 범죄/탐정 장르를 목표로 했다면 B 파트는 공포/판타지 장르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1. 제목에 horror와 terror가 들어가선 안 된다. : 1항의 내용이다.

2. 공포 혹은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묘사와 그림은 안 된다. : 2항, 3항, 4항, 5항의 내용이다. 대상에는 성욕 묘사, SM 행위, 좀비, 뱀파이어, 늑대인간, 식인과 같은 소재가 해당된다. 4항의 경우엔 A 파트 3번 요약 내용과 연결된다.


  편집 강령 C 파트는 대사, 종교, 복장, 결혼과 성적 표현 등을 다루는 세부 강령이라서 가장 방대하다. 따라서 대충 요약하면 방향성은 이렇다.

1. 욕설, 성적 단어, 속어, 혹은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의 단어와 기호는 금지한다. : 대화 항목의 1항을 그대로 번역했다. 3항의 내용 또한 거의 유사하다.

2. 누드는 어떤 형태로도 금지한다. 여성 신체는 과장된 표현 없이 현실 그대로 그려야 한다. : 복장 항목의 1항과 4항을 그대로 번역했다. 2항에서는 암시적 표현도 금지하고 있다.

3. 성적 표현은 사회에서 정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과 합법적 성관계로만 한정한다. 이혼을 희화화해서는 안 된다. : 결혼과 성 항목의 경향이다. 금지 되는 성관계 소재는 강간 등의 불법행위 외에도, ‘비정상 취향’도 포함된다. 이 비정상 취향 중에는 성관계로의 유혹 같은 것도 있다. 즉 보수적 시각의 보편 도덕을 철저하게 지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광고 강령 파트는 워댐 박사의 영향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총 9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만화책에 실리는 광고 또한 검열의 대상이었다. 강령 내용 자체는 편집 강령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측면이 있다.


1. 술, 담배, 무기류(장난감이라도), 도박 도구 광고는 금지된다. : 1항, 4항, 5항, 6항의 내용이다.

2. 성에 관한 책 광고나 섹슈얼한 이미지를 이용한 광고, 혹은 섹시한 이미지 자체를 파는 광고는 금지된다. : 2항, 3항, 7항의 내용이다.

3. 허위, 과장 광고는 금지된다. : 8항의 내용이다.

4. 건강, 약품, 세면용품 등의 광고는 금지된다. 의료협회나 치과의료협회 등에서 내는 광고는 가능하다. : 9항의 내용으로, 3번 내용과도 연결된다.


  범죄, 탐정, 공포 장르에는 치명타인 조항들이다. 전쟁과 모험 장르에도 타격이다. 로맨스의 경우엔 성적 표현 부분에서 장애물이 생긴다. 유머 장르 정도를 빼면, 당시 만화 시장의 주류 장르들이 모조리 타격을 입는 것이다.


  물론 잘 살펴보면 출구 전략을 찾을 수 있다. 청문회에서 린치 당한 회사는 EC이고, EC는 수퍼히어로를 출판하지 않는다.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한 청문회는 초점을 워댐 박사와 달리 범죄/공포 장르에만 맞췄다. 따라서 수퍼히어로 장르를 다시 세운다면 현재의 정서를 피해갈 수 있다. 그리고 수퍼히어로는 저 강령들을 다 피해가면서도 높은 완성도를 만들 수 있었다. 수퍼히어로 장르 자체의 기본 문법이 권선징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퍼히어로가 돌아오게 되었다. 시대는 세계대전의 시대에서 냉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냉전의 한 면, 내부 단속     


  냉전이라는 동전의 한쪽 면을 살펴보자. 한국 전쟁은 남북의 전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세계 양대 세력의 전쟁이기도 했다. 2차대전 후, 점차 미국과 소련이 패권국으로 떠오르면서 국제 질서가 둘을 중심으로 잡혀갔다. 그런 질서 재편의 정점에서 부딪힌 ‘선긋기’가 한국 전쟁이다. 그 다음 수순은 서로의 역량을 알았으니 노려보긴 하되 직접 충돌은 자제하면서 힘을 기르는 냉전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에게는 소련이라는 적, 그것도 매우 큰 적이 생겼다. 2차대전의 추축국과는 좀 달랐다. 추축국들은 워낙 인간 같지 않은 짓들을 했고, 그걸 가능케 했던 전체주의 사상 또한 쉽게 욕할 수 있었다. 내부 단속용 프로파간다가 쉬웠던 것이다. 그런 프로파간다가 보편적 진실과 정의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반면 소련은 아니었다. 노동자의 세상을 만든다잖나. 게다가 2차대전의 전우다. 큰 분류에서는 같은 유럽 계열 문명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경제 체제로 삼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를 절대악으로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혁명의 들불이 한반도에서까지 성공할 것 같으니 직접 부딪혀서 일단은 더 이상의 확장을 막아내긴 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팽창을 잠시 멈춘 것뿐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악마화 프로파간다는 40년대 말부터 관찰된다.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 프로파간다를 효과 있게 하려면, 공포가 필요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1950년, 공화당의 한 상원의원이 폭탄 발언을 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는 발언이었다.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다. 이 발언에서 시작한 광풍은 후일 매카시즘으로 불린다. 미국 사회 내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암약하고 있는 소련 스파이들을 대거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이 몇 년 동안 정치권을 휘돌았다.


조지프 맥카시 상원의원, 위스콘신 퍼블릭 라디오, 1950년.


  특히 할리우드는 매카시즘의 직접적인 폭격을 맞았다. 반공 프로파간다 측에서는 구체적으로 텔레비전, 라디오, 그리고 할리우드를 ‘빨갱이 소굴’로 꼽았다. 영화계의 감독, 작가, 배우 중에 공산주의자 내지는 소련 스파이가 많다는 식이었다. 대표적으로 꼽힌 사람이 배우 스털링 헤이든이다.


  헤이든은 2차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첩보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후일 공산 혁명의 주인공이 되는 티토 장군과도 친분을 쌓았다. 티토는 비소련계 공산주의자로서 미국에게 좋은 자산이 될 수 있었지만, 헤이든이 매카시 의원에게 공산주의자로 공격당하면서 그 연줄은 끊겼다. 매카시 의원의 논리는 이랬다. 공산주의자는 소련편 = 티토는 공산주의자 = 헤이든은 티토 친구 = 헤이든은 미국의 적!


스털링 헤이든, 토론토 시 기록보관소, 1942년.


  결국 매카시 의원 자신은 한국전쟁이 휴전이 된 다음 해인 1954년이 되면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애초에 미국 내 공산주의자 명단 어쩌구 하는 발언은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카시즘의 방향성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 사회는 그렇게 반성을 쉽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을 둔 상태에서 내부 단속은 거의 반드시 필요했다. 검열, 사상 검증, 색깔론이 즐겨 사용되었다. CCA를 낳은 ‘심판의 날’ 청문회 역시 이런 조류 안에 있었다.



냉전의 다른 면, 기술 경쟁     


  냉전이라는 동전에는 다른 면도 있다. 외부적으로는 대등한 경쟁 상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은 양측의 수준을 급격하게 끌어올린다.     


  2차대전 이전에는 이런 라이벌 구도를 영국과 러시아가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형성한 적 있다. 해군이 강한 해양제국 영국과 육군이 강한 육상제국 러시아의, 전쟁이나 다름없는 경쟁이었다. 이 국면에서 영국은 해군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했으며 거함거포주의의 시대를 열었다. 러시아는 영국의 해군력에 대응하기 위해 발틱 함대로 대표되는 해군력 증강을 시도하는 한편, 자기들의 강점을 살리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사를 시작했다. 거함거포와 대륙 횡단철도라는 군사기술, 토목공학의 대약진이 그레이트 게임으로 인해 가능했다.


피터 홉커크의 저서, “그레이트 게임”

영국과 러시아 두 패권국은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전세계 스케일에서 상호 견제했다.

이 스케일 속에 거문도 점령 사건과 러일전쟁도 들어있다.


  냉전 역시 마찬가지다. 큰 영토와 엄청난 인구, 문명권 단위로 모여든 인재와 물자가 두 나라에게 다 있었다. 이런 자원들이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군비 경쟁에 쓰였다. 그리고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는 신기술 연구가 아주 제격이다. 미국과 소련 둘 다, 2차대전을 승리하는 과정에서 신기술의 맛을 제대로 보았다.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전차 개발 경쟁에서 결국 승리한 경험이 있다.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이라는 신무기를 직접 사용해본 유일한 국가였다. 이들에게 과학은, 그리고 그 결과물인 기술은, 전투력이기도 했다.


  당연히 사회 분위기는 과학도와 공학도를 대접하는 쪽으로 가게 마련이다. 미국은 이미 그런 토양이 갖춰져 있었다. 영웅적 발명가들, 해안을 따라 늘어선 공장들. 여기에 기술입국의 분위기가 끼얹어지면서 미국 사회의 기술 친화적인 성격이 완성되었다. 과학에 대한 두터운 전통이 생겨난 것이다. 이 전통이 매년 미국의 물량 규모만큼 쌓여가자, 연구실에서는 신기술이 계속 등장했다. 이런 기술 중에는 군사력에 쓰이는 종류도 분명히 있다. 미국은 기술입국의 테크트리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초장거리 타격과 운송을 위해서인지 항공우주공학이 크게 발전했다.

정보 처리를 위해 컴퓨터가 발명된 것도 냉전 시기다.

그리고 이런 발전을 가능하게 한 분야들에 대한 대우 역시 계속 좋아져 갔다.     


  문학은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SF 장르가 소설, 영화, 만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많아졌다. 독자가 경이를 느끼게 하는 소품으로 마법 대신 신기술이 사용되는 빈도가 많아졌다. 어쩌면 공포/판타지 만화는 이렇게 때문에라도 미국 만화의 주류 장르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퍼히어로는 장르는, SF와의 관계가 가깝다. 최초의 수퍼히어로인 수퍼맨의 초능력을 설명하는 설정을 떠올려 보면 된다.


  기술입국의 분위기를 타고 출판 만화 시장의 주류로 되돌아온 수퍼히어로 역시, 이제는 초자연적 요소 대신 과학 요소와 기술 요소를 더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암흑기 이후, SF에 치중한 경향을 가진, 수퍼히어로 장르의 중흥기를 우리는 ‘실버 에이지’라 부른다.




실버 에이지     


  실버 에이지는 보통 1956년에 시작한 것으로 간주하며, 1955년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소수파도 있다. 공통된 의견은, 실버 에이지의 시작은 이번에도 또 DC 코믹스였다는 점이다. 골든 에이지와 실버 에이지, 두 번의 부흥기를 시작한 회사라는 점에서 DC 코믹스와 그 주축 캐릭터들은 어쩔 수 없이 문화사적 무게감을 지닌다.


  당시 DC 코믹스의 최고 상품인 트리니티 – 수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은 수퍼히어로 시장에서 독자 타이틀을 갖고 있는 마지막 보루였다. 수퍼히어로 붐이 돌아올 조짐이 보이자 DC는 공격적인 장르 확장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리고 확장은 현재의 보루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캐릭터가 필요했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우면 시장에게는 낯설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수퍼맨의 편집자 겸 스토리 작가로 유명한 줄리어스 슈워츠가 1956년 상반기의 어느날, 로버트 캐니거를 불렀다. 캐니거는 전쟁 만화와 마스턴 사후의 원더우먼을 맡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종의 회의를 했고, 여기에 캐니거와 함께 블랙 카나리를 만들었던 카마인 인판티노가 끼어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슈워츠 편집, 캐니거 스토리, 인판티노 그림의 팀은 1956년 10월호인 쇼케이스(Showcase) #4 이슈에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수퍼히어로 캐릭터를 새로 등장시켰다. 이 수퍼히어로의 이름은 플래시. 하지만 본명은 제이 개릭이 아니었다.


  이 플래시의 본명은 배리 앨런(Barry Allen)이었다. 그리고 실버 에이지가 시작되었다.


이 표지에서 실버 에이지가 시작되었다.


  빛처럼 빠른 속도, 그에 맞는 순발력과 감각이라는 초능력은 그대로였다. 대신 다른 모든 게 달라졌다. 배리 앨런은 경찰 소속의 과학자, 후에는 감식반 요원으로 설정되었다. 화학 약품들을 잔뜩 늘어놓고 실험하면서 야근하던 어느 날, 번개가 방 안에 들이쳤다. 번개에 맞는 동시에 약품들을 잔뜩 뒤집어 쓴 배리 앨런은 기절했다가 깨어난 후 플래시의 초능력을 얻게 되었다. 코스튬도 제이 개릭과는 달랐다. 붉은 전신 스판덱스에 노란 허리띠와 부츠였다. 제이 개릭이 철모에 달아놨던 날개 모양 장식은 배리 앨런의 가면 양 옆에 달린 번개 모양 장식으로 바뀌었다. 새 플래시가 흉부 가운데에 부착한 로고 역시 번개인데, 캡틴 마블의 번개 로고를 연상시킨다. 활동 도시는 센트럴 시티라는 가상 도시로 정해졌다.


  능력을 제외한 모든 것을 리뉴얼한 이 시도는 시장에서 정착에 성공했다. 새 플래시에 독자들이 익숙해지자 슈워츠와 편집부는 쾌재를 부르며 같은 패턴을 다른 캐릭터에도 적용시켰다. 물론 새로운 캐릭터도 등장하긴 했다. 1959년에 슈워츠 자신이 만들었고, 제이 개릭 플래시, 호크맨, JSA의 창조자인 가드너 폭스가 스토리를 거든 아담 스트레인지(Adam Strange)가 그 중 하나다. 그와 함께 골든 에이지 시절의 수퍼히어로들이 상당수 설정이 바뀌어서 돌아왔다.


  아쿠아맨과 그린 애로우는 원작자 모트 와이징어의 입김 덕분에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어드벤처 코믹스(Adventure Comics)라는 잡지에서 조연으로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둘은 리뉴얼까지 가지는 않고, 적당히 설정을 재정립하는 수준의 리빌딩을 받고 전면에 다시 나섰다. 그린 애로우는 크게 바뀐 점이 없었지만, 아쿠아맨의 설정은 새롭게 짜여졌다.


네이머가 캔슬되는 와중에도 아류작인 아쿠아맨은 가늘게 살아남았다. 첫 독립 타이틀은 1962년이다.


슈워츠 리뉴얼


  골든 에이지의 아쿠아맨은 수중 도시 아틀란티스를 발견한 탐험가의 아들이었다. 실버 에이지의 아쿠아맨은 수중 문명 아틀란티스와 지상 문명 간의 혼혈이다. 이제 아서 커리의 아버지는 탐험가가 아닌 등대지기가 되었다. 지상에서 자라난 아서 커리에겐 해저에 있는 이부동생의 존재도 생겼다. 영화화된 아쿠아맨의 설정 대부분이 실버 에이지의 버전이다. 이런 아쿠아맨의 리빌딩 버전은 1959년 5월호인 어드벤처 코믹스 #260에서 처음 선보였다.


  같은 해인 1959년, 9~10월 합본호인 쇼케이스 #22에는 그린 랜턴이 리뉴얼되었다. 줄리어스 슈워츠가 편집을 맡아 플래시와 같은 방법을 적용했다. 스토리 작가는 플래시의 초기 스토리를 맡았던 존 브룸(John Broome)이었고, 그림은 길 케인(Gil Kane)이 맡았다. 플래시 성공에 크게 기여한 브룸을 기용한 것도 그렇고, 잉커로 참여한 시드 그린(Sid Greene)은 슈워츠 산하 작가 중에서 가장 다작을 하던 작가이니, 슈워츠가 나름 힘을 준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도 성공했다.


그린 랜턴 할 조던의 데뷔 이슈 표지.

‘쇼케이스’는 이런 식으로 새 캐릭터의 데뷔 무대로 자주 쓰인 타이틀이다.


  새 그린 랜턴의 본명은 할 조던(Hal Jordan)이고 코스트 시티라는 가상 도시에 산다. 그의 직업은 공군 파일럿이다. 이제 반지와 랜턴은 마법의 물건이 아니라 외계 기원의 스토리가 생겼다. 캐릭터의 성격 역시 마법사에서 우주 경찰로 바뀌었다. 지구가 속한 우주 구역의 치안을 담당하던 그린 랜턴, 즉 우주 경찰이 지구에서 사망하고 그 후임자를 할 조던으로 골랐다는 스토리였다. 반지의 주된 기능이 의지력을 잠시 물리적 형체로 만드는 기능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게 바뀌었다. 이제 그린 랜턴은 SF 장르, 그것도 후일에 크게 꽃피우게 될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하위 장르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그린 랜턴의 원작자인 가드너 폭스가 자신의 설정을 묻어버린 것에 반발했다는 증언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폭스는 슈워츠 리뉴얼을 자신의 호크맨/호크걸에도 적용시켰다.


  1951년에 캔슬되었던 호크맨은 10년이 지난 1961년, 2~3월호 합본으로 나온 더 브레이브 앤 더 볼드(The Brave and the Bold)의 #34 이슈에서 재등장했다. 이제 카터 홀과 쉬이라 샌더스 홀은 카타르 홀과 샤이에라 홀이 되었다. 기원 스토리 역시 미국인으로 환생한 이집트인이 아니라, 사나가르(Thanagar)라는 행성에서 왔다가 지구에 남은 경찰 부부가 되었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능력은 그대로지만, 그 기전은 이집트 마법이 아니라 사나가르의 ‘N번째 금속(Nth metal)’의 기능이라고 설명되었다. 이들은 미드웨이 시티라는 가상 도시를 활동 영역으로 하게 되었다.


  호크맨과 호크걸이 원작자의 손에서 리뉴얼되던 1961년 10월에, 아톰(Atom)이라는 군소 히어로도 쇼케이스 #34에서 히어로 이름만 빼고 모든 것이 다 바뀌었다. 알 프랫(Al Pratt)이라는 본명의 비초능력자 히어로였던 아톰은, 줄리어스 슈워츠와 가드너 폭스와 길 케인의 손에서 레이 팔머(Ray Palmer)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초능력도 생겼다. 아톰은 이제 원자의 크기만큼 작아지는 기술을 보유한 과학자 히어로가 되면서, 훗날 등장할 앤트맨(Antman)의 선배다.


  가드너 폭스는 계속 일했다. 호크맨과 아톰을 리뉴얼하기 직전인 1960년에는, 자신의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아이디어도 리뉴얼했다. DC 수퍼히어로들의 모임인 저스티스 리그의 출범이다. 수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플래시, 그린 랜턴, 아쿠아맨 등이 모두 등장했다. JSA에서 JLA가 된 이 팀은 1960년 2~3월호 합본인 더 브레이브 앤 더 볼드 #28 이슈에서 처음 등장해 스타로(Starro)라고 하는 우주 불가사리 괴물에 대항해 싸웠다. 이 팀업 프로젝트 역시 성공하여 10월에는 독자 타이틀, ‘저스티스 리그 오브 아메리카’가 시작되었다.


저스티스 리그의 데뷔 이슈의 표지.

플래시, 그린 랜턴, 아쿠아맨이 원더우먼과 함께 보인다.

이 셋이 원더우먼과 나란히 설 정도의 위상이 되었다는 의미 혹은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최하단의 캐릭터는 잠시 후에 설명할 마샨 맨헌터다.


  실버 에이지라는 용어의 첫 용례는 이 시리즈, 약칭 JLA의 #42 이슈에 있다. 1966년 2월호인 #42 이슈의 독자 편지란에는 코네티컷 주 웨스트포트에 사는 스콧 테일러라는 독자가 보낸 편지의 문구가 실려 있다. “여러분이 이렇게 계속해서 [30-40년대] 황금기 시절 히어로들을 되살려낸다면, 20년 후의 사람들은 지금 시대를 은의 60년대(Silver Sixties)라고 부를 거에요!” 스콧 테일러의 발상이 업계에서 보기엔 적당해 보였고, 이후 실제로 시간이 흐른 후에 정식 시대 구분명으로 사용된 것이다.


  한편 저스티스 리그에는 아예 새로운 얼굴도 있었다. 심지어는 지구인의 외모도 아니었다. 마샨 맨헌터(Martian Manhunter)라는 수퍼히어로였다. 조셉 사막슨(Joseph Samachson)이 스토리를 쓰고 조 세르타(Joe Certa)가 그림을 그려서 창조해냈다. 사막슨은 생화학자에서 SF 작가로 전업한 사람이었다. 마샨 맨헌터 외의, 과학자와 작가로서의 업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마샨 맨헌터는 초록 피부의 화성인이며, 수퍼맨 스토리의 화성 버전이다. 따라서 화성 문명의 마지막 생존자라는 설정이다. 능력 또한 정신 계열 능력에 치중한 수퍼맨 계열 능력에 외모 변신 능력이 있다. 화성에서는 존 존즈(J’onn J’onzz)라고 불리웠고 지구에서는 존 존스(John Jones)라는 가명을 쓴다. 지구에서 탐정 일을 하고 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데뷔는 1955년 12월호인 디텍티브 코믹스 #225였으니 배트맨 계열이기도 하다. 수퍼맨과 배트맨의 교배 결과처럼 보이는 마샨 맨헌터가 배리 앨런 플래시보다 길게는 1년, 짧게는 반년 이르게 나왔다는 점에서 마샨 맨헌터를 실버 에이지의 시작점으로 보는 소수 의견도 있다.


변신 및 텔레파시 능력이 있는 화성인, 마샨 맨헌터의 첫 등장 컷.

현재에도 조연 캐릭터 중에선 가장 위상이 높다.

CW 채널의 수퍼걸 드라마에서 캐릭터가 고정 출연 중이다.     


  이 중에서 가장 성공한 캐릭터는 플래시와 그린 랜턴이었고, 그 다음이 아쿠아맨이었다. 호크맨과 아톰은 인기가 크게 높지 못해 독립 타이틀이 사라지고 조연 캐릭터로 바뀌었다. 가드너 폭스의 속은 좀 안 좋았을 수 있다. 마샨 맨헌터 역시 조연으로 사용되었으나 사유는 좀 다르다. 능력의 성격상 수퍼맨의 캐릭터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어쨌든 이런 캐릭터들을 모아서 만든 저스티스 리그가 높은 인기와 판매고를 올렸으니 가드너 폭스의 속은 안 좋다가도 좋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저스티스 리그의 인기를 본 다른 어떤 사람의 속은 확실히 안 좋았다. 그 사람은 오랜만에 다시 언급되는 마틴 굿맨이었다.


날 잊었나? 퍼니즈를 집어삼켜 타임리 코믹스를 만든, 마블의 아버지다!



마블 비기닝


  1951년, 타임리 코믹스는 아틀라스 코믹스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러면서 순차적으로 수퍼히어로 타이틀을 없애 나갔다. 심판의 날이 왔을 때는 발간 중인 수퍼히어로 만화가 없던 상태였다. 상황은 어려워졌는데 대체품을 조달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그렇다고 다시 수퍼히어로를 시작하기엔 두려웠다. 1953년에 아틀라스는 ‘왕년의 빅3’인 캡틴 아메리카, 네이머, 휴먼 토치를 다시 발간해봤지만 결과는 처참했기 때문이다.


  줄리어스 슈워츠나 가드너 폭스와는 달리, 마틴 굿맨에게는 미래를 내다보는 경영 안목이 모자랐던 것 같다. 대신 굿맨에게는 버티는 능력이 있었는지, 회사 성장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도 망하지 않고 꿋꿋이 중견 만화 출판사의 위상을 지키고 있었다. 마틴 굿맨에 대한 평가에는 늘 ‘트렌드를 따라가는’이라는 문구가 들어간다. 한 골프 경기에서 그 면모가 잘 드러났다.


  1961년의 어느 날, 마틴 굿맨은 골프를 치러 갔고, 골프 상대는 DC의 오너 2명 중 하나인 잭 리보위츠였다. 공동 경영 체제이긴 했지만, 동업자인 해리 도넨펠드는 이제 나이도 들었겠다, 돈도 엄청 벌었겠다, 대부분의 경영 업무를 리보위츠에게 맡긴 상태였다. 따라서 굿맨과 리보위츠가 만난 골프 자리는 후일 양대 산맥이 되는 두 회사의 최고직이 만난 자리였다.


  리보위츠는 굿맨에게 저스티스 리그 자랑을 늘어놓았다. 앞서 언급했듯 굿맨의 경영 철학은 '대세를 따르자'였다. 골프에서 돌아온 굿맨은 속이 매우 안 좋은 한편, 회사를 회생시켜 급성장시킬 돌파구를 찾았다고 믿게 되었다. 자신이 구상한 프로젝트를 맡기기 위해 굿맨이 부른 사람은, 처조카이자 이제 40대가 된 스탠 리였다.


1954년의 스탠 리. 모험물을 비롯한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편집자와 스토리 작가 일을 하고 있었다.


  스탠 리는 2차대전이 끝나고 제대 후 회사로 돌아와 계속 만화 스토리를 쓰고 있었다. 막 마흔을 넘긴 스탠 리는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쓰고 싶고, 독자에게 현실감을 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팔리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니 장르도 한정되고 패턴도 한정된다. 의욕이 사라진 권태기의 스탠 리에게 마틴 굿맨은 강변했다.


미래는 수퍼히어로에 있어! 응? 알아? 저스티스 리그! 너 그거 봤지? 팀이야! 팀이라고! 수퍼히어로 팀이야! 히어로 팀을 만들어봐! 팀이어야 한다?


  또 일방적 지시였다. 지시의 본질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팔리는 것을 만들어 와라.’ 스탠 리는 어기적어기적 퇴근하여 아내 조안에게 툴툴댔다. 삼촌이 상사긴 한데 오히려 이빨도 안 들어간다, 오히려 종노릇과 다름없다, 맨날 팔리는 거 만들라는 지시다, 사장이라는 사람이 비전이 없다,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나, 다른 직업 알아볼까 등등. 조안은 남편의 궁시렁을 다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힘들면, 이번 프로젝트는 당신 마음대로 해봐. 다 신경 끄고 당신 하고 싶은 그대로만. 그래놓고 마틴이 난리치면 퇴사해버려. 최소한 여한은 없을 거 아냐?


  아내의 말에 남편이 눈을 빛냈다. 1961년, 작가 스탠 리의 원년이다.


엑스맨: 아포칼립스 영화에 카메오 출연한 리 부부. 이젠 둘 다 고인이다.

조안 부콕 리는 청년기에 모자 모델로 활동했고, 중년에는 성우로서 남편이 원작자인 애니메이션들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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