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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이로스엘 Feb 13. 2022

#15. 코로나 씨에게 보내는 편지

코로나 일기를 마치며

* 코로나 씨에게 -


  코로나 씨, 안녕하세요.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동안 우리 집 어딘가에서 함께 지내다가 결국 인사도 없이 가 버렸네요.


  ‘든(들어온) 자리는 표가 나지 않아도 난(나간) 자리는 표가 난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당신의 경우는 반대인 것 같아요. 엄청 요란하게 들어와 놓고선 나갈 때는 소리 소문 없이 빠져나갔으니 말이에요.     


  당신과 최대한 좋은 관계로 지내보기 위해 어제 무려 세 번째 백신을 맞았어요! 처음에 맞을 땐 팔만 좀 뻐근했는데 두 번째 맞을 때는 엄청 아팠지요. 특히 뼛속 관절 하나하나까지 어찌나 아프던지.      


  어제 세 번째 백신을 맞고 난 후에는 괜찮은가 싶었는데 오늘 새벽 세 시쯤인가 접종을 한 왼쪽 팔과 겨드랑이가 너무 아파서 깼어요. 팔이 아파서 자다가 깬 건 또 처음이네요. 물속에 물감을 떨어뜨리면 한 곳에 있다가 점점 퍼지듯이 처음엔 팔과 겨드랑이만 아프다가 점차 온몸 구석구석으로 통증이 퍼지더라고요.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어쩔 수 없이 과일만 조금 먹고 이부프로펜 한 알을 먹었어요. 역시 약의 힘이란! 약 한 알을 먹고 났더니 지금 반짝 살아나서 당신한테 이 편지를 씁니다. 컨디션 안 좋아지기 전에 또 얼른 쓰려고요.    

 



  처음에는 당신에 대해 원망을 많이 했어요. 왜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성질 사나운 당신 같은 불한당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 난리를 피우는지 화가 났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당신의 심기를 건드린 게 없는데 말이죠.      


  그런데 곰곰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니(제가 요즘 당신 때문에 ‘역지사지’를 잘한답니다.) 당신도 좀 억울할 것 같긴 하더라고요.      


  우선 당신도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마음먹고 나쁜 짓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당신은 태어나길, 사납고 파괴적이며 고통을 주는 존재로 태어나 버린 거예요. 당신 옆에만 가까이 가도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크고 작은 통증과 질병을 얻게 돼요. 당신은 또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옆에 가야만 하고요.

     

  얘기를 듣자 하니, 아무리 당신이 인간들을 괴롭혀도 당신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쫓아낼’ 방법은 없다고 하더군요. 결국엔 계속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말인데... 그럼 우리가 좀 더 사이좋게 지낼 방법을 찾아봤으면 좋겠어요. 사나운 성질을 좀 누그러뜨려 보세요.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순해진 것 같아 다행이긴 해요.




  요즘 많이 외로운가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아직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 두려움과 불안감이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외롭다고 해서 아무나 막 찾아다니면서 귀찮게 하고 괴롭히지 말고 좀 느긋하게 지내봐요. 온유한 성격을 좀 길러서 차분하게 사람들에게 접근하면 사람들도 차차 당신을 많이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될 거예요.     

 

 이 편지를 쓰다 보니 앞에서 당신에 대해 ‘성질 사나운 불한당’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너무 과격했다는 느낌도 드네요. 제가 욕을 하는 데는 좀 서투른데 나도 모르게 욱 했어요.      




  사실 코로나 씨 당신이 무조건 우리 가족에게 해만 끼친 것은 아니에요. 당신과 함께 지내면서 경험한 것도 많았고, 오히려 ‘감사’를 느끼는 순간들도 많았거든요. 당신한테 감사를 한다기보다는 당신과 함께 지내면서 제 마음이 성장한 거라고 봐야겠지요. 감사의 내용을 하나하나 헤아리다 보니 생각보다 많아서 꽤 놀랐어요.      



1. 코로나 씨가 연휴 기간 및 방학 기간에 찾아와 준 것이 감사해요.

- 바쁘게 일하고 학교에 다닐 때 당신과 만났다면 더 힘들었을 거예요.


2. 처음 남편이 확진이 되었을 때 무증상이 아니었던 것이 감사해요.

- 처음 신속항원검사 때 음성이었지만, 나중에 증상이 나타나는 바람에 재검사를 했고 양성 확진을 받았지요. 만약 남편이 무증상이었다면... 생각하기도 싫네요.     


3. 우리 가족으로 인해 2차 피해가 발생이 안 된 것이 감사해요.

- 신속항원검사 음성 판정을 받았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설날 가족 모임을 다 취소하고 집콕을 해서 다른 가족들이나 이웃들에게 피해를 안 끼친 것이 참 다행이에요.     


4. 겸손과 배려를 배우게 되어 감사해요.

- 전에는 코로나에 걸린 분이나 그 가족 분들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런 분들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어요.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5. 코로나 기간 동안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들이 계셔서 감사했어요.

- 부모님들을 비롯하여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신경 써 주신 분들이 계셔서 정말 든든했어요.     


6. 남편과 아들이 크게 아프지 않고 무사히 회복이 된 것이 정말 감사해요.

- 두 사람 모두 중증으로 가지 않고 무탈하게 지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7. 가 끝까지 확진이 되지 않고 가족들을 돌볼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해요.

- 만약 저까지 확진이 되었다면 집에서 재택 치료하는 아들을 제대로 못 돌보았을 거예요. 남편도 생활치료센터에서 애만 태웠을 거고요. 부모님들의 근심 걱정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해요.     


8. 코로나 씨로 인해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느끼게 된 것이 감사해요.

- 단순히 계속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아, 마스크 없이 살았던 때가 좋았다...'라고 느꼈던 것과는 그 결과 깊이가 다른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어요. 이제 앞으로는 작은 일상에도 더 많이 감사하며 살 것 같아요.   

  

9. 코로나 씨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경험치가 쌓이게 된 것이 감사해요.

- 나쁜 경험도 경험은 경험이죠. 많이 배웠고, 앞으로 우리 가족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0. 격리 기간 동안 오히려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해요.

- 남편도 생활치료센터에 가서 없고, 아들도 자기 방에 갇혀서 없고 오롯이 혼자 있을 때가 많았는데, 그 시간이 오히려 저를 성숙하게 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온전히 생각해 볼 시간이 많이 주어졌고 그 시간들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11. 이런 감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해요.

- 힘든 상황에서도 감사 거리들이 넘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감사합니다. 불평보다는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감사해요.

         



  코로나 씨, 원래 이렇게 긴 편지를 쓰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길어졌군요. 감사의 내용들을 쓰다 보니까 당신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네요. 하지만 그래도 갑자기 우리 집에 들이닥쳐서 우리 가족들을 힘들게 한 것은 섭섭해요. 당신도 조금이나마 반성하고 있으리라고 믿어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당신이 인간들을 떠나 살 수가 없고 많이 외롭다면 성격을 좀 온순하게 바꿔보도록 하세요. 성격을 고치기 전까지는 우리 집에 다시 오고 싶어도 조금만 참으세요. 우리 집뿐만 아니라 다른 집들도요. 우리에게 당신과 어우러져서 살 수 있도록 시간과 여유를 좀 주길 바라요.     

 

 그럼, 잘 가세요, 코로나 씨! 그동안의 만남이 ‘즐거웠다’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여러 모로 의미가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또 불쑥 찾아오면 안 돼요! 그럼, 안녕!    


                                                                                                                                                                     2022.2.13.                                                                                                   카이로스엘


* 추신: 다시 한번 강조해요. 또 이번처럼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는 건 안 돼요...! 절대! (너무 본능에만 충실해서 살지 않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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