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게 다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다 나쁜 건 아니다.
삿포로 퀵턴~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후배와 비행이 같이 나왔다. 마음 같아선 맛있는 식사라도 사줄 수 있는 레이오버 비행이면 좋았겠지만, 아쉬운 마음에 게이트로 이동하며 커피라도 같이 먹자고 하며, 같이 이동하는 객실 승무원들과 함께 카페에 잠시 들렀다.
모두 커피 한잔씩 받아 들고, 나는 평소 들고 다니던 텀블러에 커피 주문을 했다.
이후, 커피를 받아 공항 엑스레이 검색대 통과를 위해 이동~
검색대 앞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비행 가방에 텀블러를 넣고 바구니에 눕혀 담아 엑스레이 기계에 밀어 넣었다.
몸 검색을 마친 나는 반대편에서 가방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바구니에 담긴 내 비행가방은 거무스레한 액체들에 둘러싸여 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절망의 감정과 함께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생각..
앗차!! 텀블러에 문제가 있구나…
사건의 배경은 이렇다~
평소에 내가 자주 쓰던 비행용 텀블러를 비행 전날 세척을 해 놓는다. 그런데 가끔 설거지의 귀차니즘이 있는 나는 텀블러 뚜껑에 부착되어 있는 고무 패킹류들을 일일이 분해까지 해서 닦지 않는데, 나의 짝꿍은 나와 다르게 항상 모든 부속품들을 분해해서 세척하고 건조한다. 그런데 하필 사건 발생 당일 아주 이른 새벽비행이었던 나는 세척되어 건조 중인 분해되어 있는 텀블러를 대충 조립하고 급하게 챙겨 온 것이다. (보통은 짝꿍이 조립까지 다 해 두는데, 이날은 깜빡했던 것이었음) 이 과정에서 문제의 고무패킹 하나를 안 끼워 넣었다.
이 작은 고무 패킹 하나가 엄청난(?) 대재앙을 불렀다. 재빨리 가방을 검색대에서 들어 올려보니, 가방 속은 이미 홍수 상태~
가방 속에 있는 가장 중요한 헤드셋과 비행용 패드 그리고 로그북을 재빨리 빼냈다.
검색대 직원분이 친절하시게도 급히 티슈 뭉치를 건네주셨고, 옆에 있던 부기장과 사무장도 티슈 뭉치 제공에 합류~
다행히 주변분들의 도움으로 급한 불은 진화~
텀블러를 흔들어보니 커피는 이미 다 빠지고 얼음만 뎅그러니 딸랑딸랑 소리를 내고 있다.
게이트에 도착해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비행 가방 속을 모두에게 오픈~ 가방 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커피가 찰랑인다~
부기장이 근처 화장실에서 가져온 티슈로 닦고 대충 정리하니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비행 내내 내 비행 가방에서 풍기는 커피 향기는 칵핏에서 본의 아니게 방향제 역할을 했다. 누구에게나 나쁘지 않은 향기라 그나마 다행~^^
비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짝꿍이 내 얼굴을 보며 웃는다…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ㅎㅎ
“텀블러 고무 패킹이 싱크대 위에 남아 있던데?”라는 물음에~
난 그저 “(절망의) 웃음~^^” 밖에는~
이번 일로 느낀 것 두 가지~
하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
이번 기회로 거의 몇 년 동안 그냥 가지고 다니던 비행 가방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그동안 무게만 차지하고 별 쓸모없이 가지고 다니던 불필요한 물건들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문득 사관생도 시절 모 선배님께서 나에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좋은 게 다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다 나쁜 건 아니다. 지금 당장 나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때로는 결과적으로 좋을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겉으론 멀쩡하게 보여도 보이지 않는 속이 잘 갖춰지지 않으면 결국 허당이고 문제가 생긴다. 살아가면서 나 또한 나 자신 속을 내실 있게 소양과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가야겠다. 정신없이 급하게 살아오며 그동안의 놓쳐왔던 정말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겉만 멀쩡한 물세는 고무 빠진 텀블러가 되지 않기 위해~
ref. 퀵턴(Quick Turn)
; 출발 공항에서 목적지 공항까지 비행 후 항공기나 비행 승무원의 변경 없이 다시 출발지 공항으로 되돌아오는 비행 근무 형태, 보통은 근거리(국내선이나 일본과 같은 가까운 국제선 등) 비행 근무 시 운영하는 비행 패턴임.
; 보통 승객 하기와 탑승 그리고 급유 및 항공기 점검 등으로 1~2시간의 여유를 도착지 공항에서 둔다.
ref. 레이오버(Layover)
; 퀵턴과 반대로 도착공항에서 최소 법적 휴식 시간 동안 승무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다음 비행에 나서는 비행 형태, 보통은 동남아나 그 이상의 장거리 비행이 계획되었을 경우에 운영하는 비행 패턴임.
; 모시고 간 승객분들과 같이 목적지 공항에서 체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