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준이는 못말려

by 원준

우리 집은 내가 어렸을 때 중화요리라는 짜장면 가게를 했다. 가게를 오픈했을 시기에는 내가 어린이 집 다닐 때라 기억은 잘 안 난다. 그러나 내가 유치원으로 들어갔고 그 후로는 많은 기억들이 난다. 우리 가게는 처음에 입지를 다지는 과정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배달원 형들은 몰래몰래 돈을 빼서 그릇 찾으러 간다고 말하고 그 돈으로 당구를 치러 갔고, 주방장 아저씨는 전날에 술을 잔뜩 먹고 취해 나타나서 칼을 들고 월급을 더 달라고 소동을 일으킨 적도 있다.

이들과 같이 일했던 우리 부모님은 매일같이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가게는 점차점차 자리를 잡았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도 역시 줄어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장시를 한 우리 부모님이 대단하다. 나였으면 벌써 힘들어 그만두웠을 것 같다.

그러나 나의 고생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게가 잘 돼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봐줄 사람이 없어 매일 나는 돌아다녀야 하는데 말이다. 여름이면 피부가 탈 걱정에 엄마가 날 선크림을 범벅으로 만들었고 한 계절 백인이 되었다. 겨울이면 내복 2겹, 윗도리 2겹, 얇은 잠바 1겹, 두꺼운 잠바 1겹까지 나의 건강을 지키는 육 겹 용사들이 이었다. 그래도 감기는 늘 걸려 병원을 매일 갔다. 주변 내 친구들은 "그럼 가게에서 짜장면 먹으면서 있으면 되잖아"라고 말하였다. 나도 어렸지만 내 친구들도 어렸다. 홀은 배달원 형들이 바빠도 3명이 있고, 안 바쁘면 6명 정도가 있었고, 주방에서는 홀까지 들릴 정도로 2명의 주방장 아저씨들이 크게 욕을 하며 음식을 만들었고, 아빠는 그런 주방장 아저씨들을 말리고 배달 가기 바쁘고, 엄마는 많은 주문받기에 바빴다. 전쟁터 같은 가게 안에 있을 때는 오로지 엄마에게 끌려 왔을 때이다.

난 우리 가게가 있는 상가 내에서 잘생긴 짱구라고 불렸다. "잘 생겼다"라고 하는 것은 어른들이 그냥 칭찬하려고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짱구라고 한 까닭은 내가 워낙 장난도 많이 치고, 사고도 많이 치기에 그랬던 것 같다.

수많은 일화가 있다. 그중 하나는 유치원을 마치고 가게로 가는 차를 타지 않고 혼자 유치원을 빠져나와 옆 공원에서 강아지들과 놀았었다. 유치원은 물론이고 우리 가게까지 발칵 뒤집 어져 배달원 형들은 날 찾기 위해 온 동네를 다 돌았다. 그러나 아무도 날 찾지 못하였다. 속담에는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있다. 이 상황이 딱 이러했다. 바로 옆 공원인데 아무도 찾지 못하고 공원에서 강아지들과 놀다 지친 나는 가게를 내 두 다리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나는 집에 가자마자 엄마에게 사랑의 매를 맞으며 혼났다. 이 일은 워낙 큰 사고여서 아직 기억한다. 그 후로 내가 없어지면 엄마는 아파트 경비 아저씨에게 부탁하였다. 단지 내에서 나를 찾는다는 안내 목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아 저녁밥 먹을 시간인가 보다'하고 저녁을 먹으러 가게로 들어갔었다. 물론 그때마다 사랑의 매는 피할 수 없었다.

가게에서 저녁을 먹는 시간이 되면 나는 좋아했다. 왜냐하면 집에 갈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저녁은 주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같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엄마가 따로 해주었다. 사람들이 "중화요리 가게를 하니까 짜장면 많이 먹겠네?"라고 물어보는데 전혀 아니다. 나는 너무 자주 먹다 보니 금방 질려 잘 안 먹었고 '이 음식을 왜 그렇게 좋아할까?'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늘 내 음식은 따로 해주었다. 나는 밥을 먹고 난 뒤 계속해서 "우리 집은 언제가? 우리 집은 언제가?"라고 엄마에게 앵무새처럼 물어보았다. 이런 나를 보며 미안하다는 말을 매일 엄마는 하였다. 시간 좀 흐르고 9시가 되면 아빠는 문을 닫고 엄마는 나를 데리고 먼저 차에서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것이다. 지금에 나는 과거에 나에게 참 많은 말을 해주고 싶다. 현재 너는 불행하지 않고 나름 행복한 삶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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