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치 Oct 09. 2022

내 인생에 사이다는 없다

얼마 전부터 집 근처에 개똥이 굴러다니는 걸 목격했다. 주택이라 반려견을 키우는 집이 많지만 길에 개똥은 없었는데 이상했다. 우리 동네에 풀어서 키우는 개가 있던가? 동네에서 개 키우는 분들은 열과 성을 다해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개똥 역시 봉투를 들고 다니며 치우셨다. 한 번은 실수겠지 넘겼다. 그런데 그 뒤로도 우리 집 담벼락, 뒷집과 우리 집 사이의 전봇대에 똥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며칠 뒤 차를 타고 가는데 어떤 분이 개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뭔가 허전하다 싶었는데 손이 가벼웠다. 보통은 봉지나 봉투를 들고 다니던데 이 분은 너무 홀가분히 다니고 계셨다(호주머니에 봉지를 넣고 다니는 분도 계셔서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왠지 느낌이 싸했다). 낯선 사람인 걸 보면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거나 새로운 산책 코스로 우리 집 앞을 추가하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분이 나타난 뒤로 개똥이 길에 보이기 시작했다. 우연일까, 괜히 애먼 사람을 의심하는 걸 수도 있으니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며칠 뒤 집에 손님이 방문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을 배웅하기 위해 나갔다가 5분도 안 되어서 다시 대문을 열고 나갔는데 그 사이 개똥이 있었다. 그 5분 사이 개와 함께 지나간 사람은 단 한 명, 내가 의심하는 그분이었다.


어떻게 할까, 몇 날을 고민했다. 담벼락에 써놓아서 망신을 줄까, 기다리고 있다가 직접 만나서 따질까. 바른 생각을 가진 애견인이면 자기 개의 똥도 치워야 하는 것 아닌가. 심지어 어디 공터도 아니고 마을 곳곳, 그중에서도 우리 집 주변에 상습적으로 말이다. 개는 한 번 싸는 곳에 계속 싼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더 불안했다. 늦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 한다는 조급함이 들기 시작했다.      


담벼락에 ‘0월 0일 0시에 산책시킨 견주는 보시오~!’라는 대자보를 붙일까도 생각해봤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의심하는 분이 개와 함께 우리 집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개가 우리 집 앞에서 배변을 했다. 내가 뻔히 쳐다보는 데도 개 주인은 똥을 치우지 않고 갔다. 기가 차서 ‘저기요’ 하고 불렀는데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지 대꾸도 없이 사라졌다.


위쪽으로 올라간 뒤 내려오는 길은 하나이므로 나는 그 사람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그분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목소리가 떨릴까 봐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상대방은 멋쩍게 인사를 받았다.      


“개똥… 치우실 거죠?”     


자기가 마침 봉지를 안 가져왔다며 집에 갔다가 치운다기에 알았다고 하고 돌아왔다. 되려 적반하장으로 나올까 걱정했는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두근대던 가슴이 진정됐다. 얼마 뒤 그분이 나타났다. 작은 쓰레받기와 집게를 들고. 좀 전에 싼 똥만 치우기에 지난번에 여기 담벼락에도 싸고 그냥 갔다고 알려드렸다. 이건 모르겠는데, 하며 구시렁대었으나 어쨌든 지난번 똥까지 수거해 갔다.      


남편은 혹시나 무슨 일이 날까 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내가 화내지 않고 공손하게 말하는 걸 보더니 “너 이런 거 잘한다”라고 칭찬(?)도 해줬다. 한 번 주의를 줬으니 이젠 치우고 다니겠지. 상대방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으니 속이 다 시원했다. 본인도 잘못을 아니까 부끄러웠을 테다. 운도 좋아라, 어쩜 내가 딱 보는 데 거기서 싼담. 좀 전의 무용담을 되새기며 이런 게 사이다인가 싶을 만큼 통쾌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다음날부터는 기분이 오히려 안 좋은 쪽으로 기울었다. 배변 봉투 없이 산책하던 그 사람은,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나이 든 분에게 부끄러움을 안긴 일이 생각할수록 유쾌하지 않았다(나는 나이에 몹시 약하다). 강아지를 마당에 묶어 키우며 일평생 산책도 안 시켜주는 사람도 있다는데 어쨌든 저분은 고령의 나이에도 매일 강아지 산책을 시켜주는 ‘깨인 분’ 아닌가.     


똥만 좀 잘 치우셨으면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었을 텐데 야속하다가도 그냥 내가 치울 걸 후회도 든다. 그 순간에는 시원했지만 뒤돌아서면 드는 자괴감이다. 내가 내뱉은 싫은 소리 한마디가 나를 파고든다. 쫄보 인생에 사이다는 없나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놀이터 찾아 삼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