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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카오벤처스 Oct 17. 2024

의료가 한 명의 천재로
바뀔 수 없는 이유

의료기술 심사역이 본 테라노스와 <배드블러드> 이야기


안녕하세요. 카카오벤처스 투자팀 정주연 선임입니다.


투자팀은 늘 창업 초기 단계에 있는 스타트업들과 함께 하며 시장 동향을 살피고 있는데요. 그러다 보면 궁금증이 생기고, 고민이 생기면 팀 안팎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아마 시장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누구나 저희와 비슷한 상황에 있으실 듯합니다. 생각은 다양할수록, 대화는 깊을수록 좋기 때문에 저희가 가졌던 생각의 일부를 앞으로 하나씩 공유해 드리고자 합니다. 창업자, 투자자, 혹은 시장에 흥미를 가지신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세상을 흔들었던 테라노스 사건


최근 의료용 현장진단검사기기 (Point-of-care-test, POCT) 스타트업을 검토할 일이 있었습니다. 현장 진단 검사 기기 하면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코로나 검사 키트일 것입니다. 키트에 뜨는 두 줄로 일상이 흔들리던 시절이 있었죠. 현장진단 키트는 정확하지 않으니 근처 병원에 가서 PCR 검사를 받아야 한다, 키트만으로도 인정해 준다 등등 돌이켜보면 참 혼란스러운 시기였네요. 그만큼 현장 진단 검사는 성능에 대한 도전을 많이 받으면서도 가격 경쟁력까지 갖춰야 하는 어려운 분야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이런저런 POCT 장비들과 관련 기술들을 찾다 보니 흘러 흘러 유튜브의 어떤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테라노스(Theranos)의 전 CEO 엘리자베스 홈즈의 발표 영상이었습니다.


발표 장소는 무려 미국진단검사의학회(ADLM, 이전에는 미국임상화학회라는 뜻의 AACC로 불렸습니다)의 한 시간짜리 세션이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진단검사 학술대회에서 한 시간을 내주다니, 테라노스의 기술이 정말 대단해서 주류 의학으로 인정받았던 걸까요? 그건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발표를 했던 시점은 2022년 12월, 이미 월스트리트 저널에 탐사 기사가 연달아 게재된 후 테라노스가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상황을 반전하고자 나온 발표였습니다. 


하지만 발표가 끝나고 패널 디스커션을 위해 자리에 앉은 홈즈를 바라보는 패널들의 표정은 심상치 않습니다. 발표 내용에는 지금까지 개발된 시스템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 아닌, ‘앞으로 나올’ 신제품 미니랩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0분의 패널 토론 간, 병리학자들이 던진 질문에 과학적인 내용은 거의 없고 앞으로 논문과 증거로써 채워갈 것이라는 계획만 말합니다.


미국 임상진단학회에서의 패널 디스커션 장면. 다양한 표정을 관찰할 수 있네요.


그리고 이미 우리 모두가 알듯이, 홈즈와 동업자 발베니는 사기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회사는 실리콘밸리 희대의 사기극이라는 오명 아래 사라집니다.


왜 사람들은 테라노스의 제품과 기술이 부족하다는 걸 미리 알 수 없었을까요? ‘기술에 이해가 높은 투자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투자하지 않은 것이고, 의료를 모르는 사람들이 순진하게 낚인 사례’로만 치부한다면 우리가 배울 점을 놓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례가 다시금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겠죠. 더 나아가, 뛰어난 배경의 - 강한 소명의식으로 가득 찬 - 유려한 스토리텔링으로 너무나 설득되는 기술 창업팀을 만난다면, 저는 과연 좋은 회사를 투자할 기회를 놓쳤다는 공포 (Fear of Missing out, FOMO)에 휩쓸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요?


기술이 의료를 좀 더 의미 있고 세상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투자심사역의 시각에서, 오늘은 테라노스 사건을 통해 투자자에게는 어떤 레슨런이 있을지 고민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기술을 숨기기보다 이해시키려는 사람


창업자의 아이템과 근간이 되는 기술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고되고 지난한 학위 과정, 현업에서 흘린 피와 눈물로 짜인 결실이니까요. 기술 기반 창업자들은 대부분 그 분야에 뼈를 묻은 사람들이고 이 기술이 세상을 좀 더 이롭게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첫걸음을 시작합니다.


다만 소중한 ‘내 새끼’를 외부에 설명하는 방식은 창업자마다 조금씩 다름을 느낍니다. 비록 가끔 사용하시는 용어가 어려울지라도, 설명 과정이 오래 걸리더라도 성심성의껏 설명해 주시는 창업자가 있고 설명을 최대한 피하려는 듯한 인상을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알죠…그맘 알죠 ㅠㅠ


투자자에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피어그룹 간의 검증을 피해 갈 순 없겠죠. 다른 분야보다도 의료기술은 논문과 숫자로 검증합니다. 다른 기술분야와 다르게 동작원리, 방법 등이 명확하게 밝혀져야 하고 또 다른 팀이 같은 방법으로 시도했을 때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이를 재현성(reproducability)라고 하지요. 즉, 제대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구현한 제품이 어디서든, 누가 사용하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세상이 몰라줄 뿐 이미 나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세상이 왜 몰라주는지 돌이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계의, 산업계의 언어로 설명하고 인정을 받기 위해 오늘도 고민하고 실험하는 분들이 있고, 저는 그분들의 노력을 더 응원하고자 합니다.


작은 사족: ‘투자사에 회사 기술을 이야기했더니 다 퍼져나가고 다른 회사가 우리 기술을 알고 있더라’ ‘열심히 설명했더니 실컷 공부하고 연락도 없더라’라는 말도 창업자 커뮤니티를 보면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이는 당연히 투자사의 잘못이고 이러한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합니다. 이건 기술 투자를 하는 사람의 직업윤리입니다. 다만 팀이 하려는 일을 설명할 때 통상적인 지식과 기밀의 경계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 있고, 우리는 최고의 권위와 인정을 받고 있으니 그냥 따르면 된다라고 말하는 팀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다면 차라리 하려는 사업을 이해하고 함께 고민하는 편을 따르고 있습니다.




한 명의 천재성보다 팀워크를 믿을 것


테라노스의 이야기를 보면 대표 개인의 매력과 카리스마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대학 중퇴자가 무엇을 알았겠느냐’라고 하지만 사실 그건 후향적인 시각이지요. 기술 자체에 대한 전문성은 부족하더라도 개발인력을 잘 운영할 수 있다면 대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감히 어떤 스타트업의 조직문화를 한 두 번의 미팅과 대화로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검토 과정에서 ‘일하는 방식’에 대해 최대한 많이 관찰하고 듣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두 명의 뛰어남을 강조하는 팀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스타 과학자’ ‘특정 분야의 명의’ 같이 개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팀을 보면 조심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과학과 의료. 어떤 분야보다도 이 두 분야는 이제 개인의 역량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한 편의 논문에도 수십 명의 이름이 들어가고, (제가 사랑하는) 수술마저도 여러 분야의 사람이 합심해서 손발을 맞춰야 진행됩니다. 그것도 그 분야만 몇십 년을 판 전문가들이 모여서요.


논문 한 편에 저자가 무려 5천154명!

출처: 연합뉴스 (링크)


아프리카의 속담 중 ‘혼자 가면 빨리 가고, 같이 가면 멀리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팀워크의 잠재력을 이해하는 창업자는 천재적인 창업자보다 더 큰 꿈을 꾸고 이룰 수 있습니다.




룰브레이커는 안된다


여러 기사를 보면, 테라노스는 진단검사장비 ‘에디슨’을 FDA의 인허가 없이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실험실자체개발검사(Laboratory Developed Test, 이하 LDT)제도를 이용하면 FDA 사전 승인 없이 환자와 의료진에게 쓰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LDT에 대해 조금 더 알 필요가 있습니다. LDT는 개별 임상 실험실에서 개발하고 사용하는 진단 테스트로, 일반적으로 상용화 키트를 사용하지 않고 실험실 자체에서 개발한 방법을 기반으로 합니다. 미국 실험실표준인증(Clinical Laboratory Improvement Amendments, CLIA)을 받은 연구실의 경우 LDT를 시행하고 마케팅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FDA’s history with Lab Developed Test


하지만 테라노스 사건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LDT의 불확실성과 안전에 대한 이슈가 대두되었고, 결국 올해 4월 미국 FDA는 체외진단기기를 포함한 모든 LDT가 FDA의 규제를 받도록 하는 최종 규칙을 발표했습니다. LDT에 대한 집행 재량은 2025년부터 2028년까지 4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폐지될 전망입니다.


의료는 안전을 위해서 이중, 삼중의 장치가 있습니다. 이런 규제는 누군가의 희생과 피를 바탕으로 쓰인 경우가 많습니다. 즉, 규제와 절차가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 여기에 맞서서 규제 당국을 이해시키고 설득해야지, 사각지대를 노리거나 우회하는 방법은 정공이 아닙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퍼스트무버의 저주에 빠져 사라진 많은 헬스케어 회사들도 있지만, ‘얍삽이’로 피해 가려는 자는 아예 발도 들이지 못하는 분야가 바로 의료라고 생각합니다.




마무리하며


지난 카벤 블로그 글을 보면 안혜원 선임심사역이 말한 ‘지독한 현실주의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내용은 기술창업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안 되는 이유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그렇기에 한계를 넘어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들. 기술 창업에서 더더욱 필요한 마인드셋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의료는 느리게 바뀌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올바른 신념과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삶은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었습니다. 의료를 정면으로 도전하고, 기술에 대한 집념을 갖췄으면서도 주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본능이 남아있는 창업자가 있다면 연락 주세요. 그 길을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아, 그래서 결국 제가 검토하던 POCT 회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 검토하던 회사는 오랜 시간과 우여곡절을 거쳐 카벤의 새로운 패밀리사가 되었습니다. 10년 전 배운 회로이론을 붙잡고 절절대던 저에게, 세 명의 창업자는 줌콜로 저를 붙잡고 제대로 이해할 때까지 놔주지 않으시더군요 ㅠㅠ (저는 시험 보는 줄 알았어요…)


실제로 이러시지는 않았습니다 (웃음)


카벤의 새로운 패밀리, Kompass Diagnostics는 난임 진료에서 활용할 수 있는, 사용하기 쉽고 저렴하면서도 고성능을 유지하는 호르몬 모니터링 기술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패밀리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차차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주연 선임 심사역은 기술의 혁신과 효과적인 접근을 통해 사람들이 더 건강해지고, 일상이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양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의무석사,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수련 후 산부인과 전문의를 취득하였으며 의료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카카오벤처스의 디지털헬스케어 투자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 의료를 바꾼다는 마음으로 창업가와 함께 고민하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동반자가 되고자 합니다.


카카오벤처스 정주연(Jade) 선임 심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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