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앤) 시리즈 ep2. 지독하게 현실적인 몽상가, 실체 있는 똘끼
안녕하세요, 카카오벤처스 안혜원 선임심사역입니다.
지난번 ‘상상력 넘치는 투자를 향해서’를 읽은 몇몇 분들이 알아봐 주시더군요. 미팅 자리에서 저를 항상 다잡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상상력 넘치는 투자’는 VC로서의 창업가를 대하는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글에서는 제가 찾고 있는 상상력 넘치는 창업가의 모습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심사역님,
우리는 블루투스 샤워기를 만들려고 해요.
올해 2월, 열품타(열정 품은 타이머)를 만드시는 팔로의 백운천 대표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7명 남짓의 인원으로 투자・광고 없이 MAU 110만의 서비스를 만들어낸 팀의 목표는 뭐였을까요?
생각지도 못했던, 블루투스 샤워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약간의 각색이 들어갔습니다.)
“심사역님, 블루투스 샤워기 있으면 진짜 편할 것 같지 않으세요?.”
“네, 그렇죠..? 물 부족 국가에 물도 뿌리고.. 줄도 안 꼬이고.”
“근데 기술적으로 말이 안 되죠.”
“그죠? 호스가 있어야 물이 나오는데…”
“바로 그거예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데, 만들어지기만 하면 대박 나는 거요. 그게 저희 목표예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데, 만들어지기만 하면 대박 나는 것'
저 말을 듣는 순간, ‘홈런 타자’가 쳐야 할 공의 상이 구체적으로 정해졌어요.
앞으로 상식적으로 누구나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보단, 시간이 오래 걸려도 터지기만 하면 임팩트가 무서운 곳을 찾아야 하겠다. 그래서 이 이후로는 ‘꿈의 크기가 큰 분’, 조금 속된 말이긴 하지만 ‘똘끼가 어마무시한 분을 찾고 있다’ 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몇 달 전, 한 데모데이 심사 자리에서 '어떤 창업가를 좋아하냐'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저는 망설임 없이 “저는 똘끼 있는 분 좋아해요.”라고 했어요. 그분은 워딩의 강렬함에 살짝 당황하시더니 “똘끼라 하시면… 불법적인 사업을 해도 괜찮은가요?” 하시더군요. 저는 부연을 위해 카벤의 미션 중 한 구절을 인용했어요.
“창업자는 필요한 미래를 앞당기는 혁신가다.”라는 구절이죠.
예전에는 정말 돈을 잘 벌 것 같은 회사에 투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한 분이 말씀하시길,
"잘하시는 건 알겠다. 그런데, 뭘 혁신하는 거냐?"
그때는 그 말이 이해가 안 갔죠.
'돈을 잘 벌 것 같은데 왜 투자하면 안 되지?'
지금은 그 말에 이런 뜻이 숨겨져 있단 걸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돈이 벌린다고 무조건 투자하는 게 아니라, 창업가가 앞당길 미래가 우리에게 필요한 미래인지 (=세상을 나은 방향으로 바꿔버릴), 생각하고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나아가서는 “미래를 바꿔버릴 무모한 아이디어야말로 2x가 아닌 20x의 수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요.
*물론 저는 모든 창업가가 큰 꿈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언덕형 창업가’라고 부르고자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당장 앞의 문제를 차근차근 풀다가, 성장하시면서 - 이른바 언덕 위에 섰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있을 때 - 큰 꿈을 그려 나가시는 분들도 계시고, 이 분들 역시 제가 매우 존경하는 창업가의 상입니다.
꿈의 크기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느꼈던 것은, “큰 꿈을 이루기 위한 지독한 현실주의”였습니다.
꿈이 크단 것은 곧 일반적인 문제보다 성공 확률이 열 배 낮다는 이야기도 되죠. 누가 들어도 실현이 어려워 보이는 문제를 풀겠다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꿈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 꿈이 실현되지 않을 이유에 대해서 열 배 더 생각해야지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더군요. 저는 이 분들을 감히 지독하게 현실적인 몽상가라 부르고 싶습니다.
(저의 짧은 경험상) 훌륭한 창업가 분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있었어요. 역설적이게도 ‘안 되고 있었던 이유’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될 것이라 믿고, 안 될 이유를 하나씩 분해하고, 계속 솔루션 바꿔 가며 문제를 두드리면서 끝내 비관적으로 보일 수 있는 현실을 바꿔나가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몽상가적 특성’은 저희 패밀리 중 레몬마켓을 혁신하려는 분들에게서 도드라지더군요.
이제 창업가들은 모바일이 가져온 패러다임 변화의 끝자락에 서 있는 듯합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지 벌써 14년이 지났습니다. 모바일 패러다임 Shift를 주도했던 스타트업들이 유니콘의 반열에 올랐죠. 그 결과, 혁신의 room이 남아 있는 곳은 ‘그 많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극, 극 고난이도의 레몬마켓’인 듯합니다.
오늘 현실적인 몽상가로 소개하고 싶은 패밀리는 상조서비스 “고이”를 운영하는 송슬옹 대표님입니다.
장례 시장은 대표적인 레몬 마켓입니다.
상주들은 상실의 아픔에 빠져 비이성적인 상태에 놓이기 때문에, 장례 업체들이 장례 현장에서 물품과 서비스를 업셀링하는 관행이 만연합니다. 하지만 장례가 Once in a lifetime event라는 점, 후기를 남기려 하지 않는 점, 낮은 마진으로 장례지도사의 업셀링을 유도하는 재하청 구조, 신뢰 기반의 비즈니스, 마케팅 경쟁으로 인해 과도하게 높아진 CAC.. 지금도 이성적이라면 스타트업이 도전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장인데요.
송 대표님의 첫 IR엔 장례 시장의 문제에 대한 뜨거운 분노와, 지독히 차가운 문제의 원인 분석이 공존했던 기억이 나네요. 21년도 7월 그때의 분석 중 맞았던 것도, 틀렸던 것도 많았지만, 고이 팀은 3년 동안 장례 시장에서 ‘안 되고 있던 이유’들을 계속 세부적으로 정의하고 될 때까지 두드렸습니다. 장례 시장에 특화된 고객 모객과 전환 방정식, 장례지도사의 인센티브 구조 등. 그 결과, 고이는 24년 초에 국내 후불제 장례 건수의 10%을, 평점 4.9의 양질의 서비스로 커버하는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요새는 정말 ‘몽상가’ 다운 면모를 발휘해 ‘100원 상조’ 프로모션을 진행 중이신데요.
말만 들어도 ‘저게 말이 되나’ 싶으실 수 있는데… 궁금하다면 링크에서 확인해 보시죠. (홍보 맞습니다)
고이에 대한 더 자세한 소개가 궁금하다면, 카벤의 패밀리 인터뷰도 있답니다.
지식콘텐츠 시장의 성장성에 대한 의구심이 만연할 때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게 아닙니다. 좋은 글이 없어서 책을 안 읽는 겁니다’라고 했던 롱블랙 / ep.9 운영사 타임앤코의 임미진 대표님과 김종원 부대표님, 모두가 알뜰폰 시장이 작다고 이야기할 때 알뜰폰 시장이 답보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들어 통신 시장의 비효율을 혁신하려는 모두의요금제 안동건 대표님도 당장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독하게 현실적인 몽상가’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이 분들의 이야기는 시간 날 때 풀어보겠습니다).
꼭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면서 생각나시는 한 분이 있다면,
꼭 저나 카카오벤처스에게 소개 부탁 드립니다.
저희도 이 분의 상상력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온 힘 다해 도우겠습니다.
오늘도 꿈이 이뤄지지 않을 이유를 처절히 분석하시는 창업가들에게 존경과 애정을 보내면서,
글을 급하게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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