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그 대신 '줄자'를 챙기는 영업사원

20편

by 김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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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 미팅을 하러 나설 때면, 제 양복 주머니에는 늘 묵직한 물건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명함 지갑도, 최신형 태블릿 PC도 아닙니다.

낡은 손때가 묻은 '줄자'입니다.


"제품 설명은 안 해주시고 웬 줄자입니까?"


처음 뵙는 고객분들은 카탈로그 대신 줄자를 꺼내는 저를 보며 의아해하시곤 합니다.

하지만 이 작은 도구 안에는 제가 현장에서 배운 '새로운 영업의 정의'가 담겨 있습니다.




하역장에서 시작되는 30분의 루틴


저는 고객사 미팅이 잡히면 항상 약속 시간 30분 전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회의실이 아닌 주차장과 하역장으로 먼저 향합니다.


가장 먼저 우리 트럭이 진입할 수 있는 하역장의 높이를 잽니다.

그 다음엔 건물 입구의 문폭을 재고, 장비가 이동해야 할 복도의 코너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엘리베이터'의 내부 사이즈를 1cm 단위까지 꼼꼼하게 실측합니다.


대부분의 바이오 연구 시설은 1층이 아닌 2층 이상에 위치합니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장비라도, 엘리베이터 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 순간 고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연구원님들은 실험 설계에는 누구보다 전문가이시지만, 장비가 들어오는 '길'의 변수까지는 미처 챙기지 못하실 때가 많습니다.




"재봐야 압니다"가 아닌 "이미 쟀습니다"


사전 실측을 마치고 미팅에 들어가면 대화의 공기가 달라집니다.

"과장님, 저희 3층 실험실에 이 장비가 들어갈까요?" 고객의 걱정 섞인 질문에 저는 "글쎄요, 한번 재봐야 알겠는데요"라고 답하지 않습니다.


"교수님, 올라오면서 확인해 보니 엘리베이터 높이가 5cm 부족합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높이를 조절한 맞춤형(Custom) 모델이나, 현장에서 조립 가능한 분리형 모델로 진행하면 문제없습니다."


줄자는 확신을 줍니다.

고객이 우려하는 문제를 선제적으로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게 합니다.




영업은 '변수'를 통제하는 일


과거에 공간 문제로 납품 당일 장비를 다시 싣고 되돌아와야 했던, 등골이 서늘한 경험들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날의 실수는 저에게 뼈저린 교훈이자 새로운 직업관을 심어주었습니다.


"영업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제품을 사용하는 환경과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사전에 통제하는 일이다."


제가 30분 먼저 도착해서 흘린 땀방울만큼, 납품 당일 현장의 혼란은 줄어듭니다.

배송 기사님들은 안전하게 일할 수 있고, 연구원님들은 약속된 날짜에 바로 실험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제조업 영업의 본질입니다.




오늘도 저는 줄자를 챙깁니다.

화려한 언변으로 고객을 설득하기보다, 투박하지만 정확한 숫자로 고객의 시간을 지켜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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