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부산까지, 카탈로그에 없는 물건을 팔러 가기

21편

by 김광섭


"과장님, 혹시... 클린벤치를 차에 싣고 다니면서 쓸 수는 없을까요?"


어느 날 고객님이 조심스럽게 꺼낸 질문입니다.

보통의 영업사원이라면, 아니 저조차도 아주 잠깐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에이, 교수님. 클린벤치는 정밀 장비라 실험실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기성품 쓰시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카탈로그에 있는 제품을 파는 게 서로 편하고, 안전하고, 매출도 빠릅니다.

하지만 고객의 상황은 절박했습니다.

현장에서 시료를 다뤄야만 하는 특수한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그 절박함 앞에서 저는 "안 됩니다"라는 말 대신, "제가 한번 가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왕복 800km, 부산으로 향하다


고객이 계신 곳은 부산이었습니다.

서울 본사에서 왕복 800km가 넘는 거리. 아직 계약이 성사된 것도 아니고, 기술적으로 구현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내려가는 건 비효율의 극치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직접 가서 고객의 눈을 보고, 차량의 크기를 재고,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지 듣고 싶었습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제조사 영업'의 예의이자 방식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공기방울, 그리고 타이머


부산에서 돌아온 후, 저는 설계팀과 머리를 맞대고 '공간과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좁은 차량 내부에 장비를 넣기 위해서는 무작정 사이즈를 줄여야 했습니다.


문득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엔지니어들이 아이팟(iPod) 시제품을 가져와 "더 이상 크기를 줄일 수 없습니다"라고 했을 때, 잡스는 그 자리에서 아이팟을 어항 속에 빠뜨렸습니다.

보글보글 공기방울이 올라오자 잡스는 말했죠.


"공기방울이 나온다는 건 빈 공간이 있다는 뜻이네. 더 줄여오게."


도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제 눈에 '타이머' 모듈이 들어왔습니다.

실험실에서는 유용한 기능이지만, 이동 중에 급하게 시료를 처리해야 하는 이 고객에게는 필수 기능이 아니었습니다.


"이게 우리의 공기방울이다."


저는 과감하게 타이머를 제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부품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만큼 전체 프레임을 축소할 수 있었고, 배선이 단순해지면서 무게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대신 이동성을 위해 작업자가 혼자서도 들 수 있는 튼튼한 '손잡이'를 달았습니다.

불필요한 기능(공기방울)은 빼고, 현장에 꼭 필요한 배려(손잡이)를 더한 것입니다.




결과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이 프로젝트는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제안서를 제출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죠.

어쩌면 채택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이 "그렇게까지 해서 남는 게 뭐냐"고 물을 때, 저는 웃으며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고민했으니까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려가고, 부품 하나를 빼기 위해 며칠 밤을 고민했던 그 시간들이야말로, 저희가 가진 진짜 기술력이자 자산이라고 믿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저는 후회가 없습니다.
고객이 필요로 한다면, 내일이라도 저는 다시 부산으로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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