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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Dec 15. 2016

하녀

공든 탑과 집에 몰래 들어온 쥐 한마리

전도연과 이정재가 선택한 영화 <하녀>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60년에  만들어진 영화가 2010년에 리메이크됐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이 영화의 내용은 오래전에 나온 영화치고는 꽤 파격적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 영화는 영화학도라면 꼭 한번은 보고 넘어가야 하는 영화란다.
 
사실 엄앵란이 하녀 역할인줄 알았다. 그런데 김진규라는 배우와, 이은심이라는 여자가 주인공이었다.


이 영화는 신문을 보던 중년 남성이 아내(주증녀)와 대화를 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남편(동식/김진규)은 신문을 보다가 하녀와 바람을 핀 남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아내는 바느질을 하다가 하녀 따위에게 눈길을 주는 남자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남편은 우리 부부생활도 하녀를 손 날것에 두고 많은 것을 맡기지 않고 있느냐는 말을 하다가 아내에게 된통 혼이 난다. 창 밖에는 장대비가 내리고 아이들은 거실 바닥에 앉아 실뜨기를 하며 놀고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그녀의 남편 동식은 한 방직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힘든 노동을 한 대가로 여가생활을 즐기려는 여직공들을 대상으로 노래와 피아노를 가르친다. 동식은 남자구경이라곤 할 수 없는 방직공장이라 그런지  방직공장에 다니는 여공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한 여직공이 연애 편지를 은밀히 전달하고, 그는 이 사실을 방직공장 사감에게 말해 여직공이 정직 처분을 당하도록 만든다.  사실 그 연애 편지는 그 여직공이 그 피아노 선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동료 경희(엄앵란)가 쓰게 만든 것으로 그녀 역시 동식을 좋아한다.


영화 하녀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하는 동식의 집에 피아노 교습을 받으러 가는 그녀. 그의 부인과 아들에게 호감을 사는 경희는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하녀를 한명 구해 달라는 그의 부탁을 받고 가족도 없고 오갈데가 없이 기숙사에서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여직공에게 돈을 주며 그 집에 하녀로 들어가라고 꼬드긴다.
 
돈 때문에 그 집에 들어가는 하녀는, 아내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임신한 아내가 병약한 몸을 회복하고 요양을 하기 위해 친정집으로 간 몇달 동안 하녀와 함께 지내게 되고. 그 즈음에 그에게 연애편지를 보내 정직 처분을 당한 여직공이 고향에 돌아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사실을 알려주며 경희가 사실은 그 편지는 자신이 쓰게 만들었고 오래전부터 자신을 좋아했다고 고백하자, 동식은 그녀를 집에서 쫓아내게 된다. 여직공이 자신 때문에 정직 처분을 당하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그는 괴로워 하게 되고.. 그런 남자를 하녀가 꼬드기기 시작한다. 하녀는 아내가 집을 비운 몇달 동안 남자와 집에서 함께 지내며 그를 유혹하는데 성공해 임신을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남편이 하녀와 동침하여 아이를 가진 것이 소문나 일을 하는데 지장을 줄까봐 하녀에게 아이를 유산시키라고 꼬드기고, 오갈데 없는 하녀는 먹여주고 재워주며 부족함 없이 해주겠다는 아내의 말을 믿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아이를 유산한다.
 
그러나 막상 낙태가 되자, 아내의 행동은 변한다. 무능력한 남편 덕분에 가정을 윤기나게 가꾸느라 쉼없이 재봉틀을 돌리느라 쇠약해진 아내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고. 이후 출산을 하게 된다.
 
아이를 낳고 나서, 남자가 자신의 아내 곁에 머무르며 살뜰히 보살피는 모습을 본 하녀는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에 갓 낳은 그 집 아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물을 갖다 달라고 하는 작은 아들의 부탁을 받고 쥐약을 탄 물을 아이에게 건네줘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지만, 아이를 낳느라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아내는 남편이 피아노를 가르치러 가는 방직공장에 소문이 나서 남편이 일자리를 잃게 될까봐 경찰서로 하녀를 끌고 가려는 남편을 뜯어 말린다.
 
이후 하녀는 남자에게 "여보"라고 부르기를 서슴치 않으며, 안주인 행세를 하며 아내를 하녀처럼 부려먹기 시작한다. 하녀에게 식사를 올려다주는 굴욕도 참아내던 아내는 국에 쥐약을 타서 하녀를 독살하려 했지만, 이를 미리 눈치 챈 하녀에게 들켜 실패한다.


영화 하녀

모든 것을 다 가진듯 보이는 화목한 가정의 평화와 행복은 쥐새끼처럼 집에 숨어든 하녀로 인해 한순간에 깨지고 만다.
 
아내에 의해 아이를 유산하게 된 하녀는 그 가정의 평화와 행복이 유지되는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완벽해 보이는 가정의 행복을 깨부수는데 집착한다. 종국에 하녀는 남자에게 자신과 함께 죽는 것을 선택하거나, 아내와 자신이 함께 죽는 걸 보는 걸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살아서 그의 아내가 되지 못할 바에야 함께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해서였을까? 자신의 잘못으로 아내가 쌓아올린 공든 탑과도 같은 행복과 가정의 평화가 깨어진 데 대한 죄책감 때문에 남편은 하녀와 함께 죽는 걸 선택한다.
 
차마 아내를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녀는 물에 쥐약을 타서 남자와 함께 마시며 행복해한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 영원히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남편은 너 하라는 대로 다 했으니, 마지막 순간은 아내 곁에서 맞이하고 싶다면서, 하녀를 매몰차게 밀쳐낸다. 하녀는 그의 바지 가랑이를 붙잡고, 광기어린 집착을 보임과 동시에 여보라고 부르며 절규한다.
 
계단에 머리를 쿵쿵 부딪히며 끝까지 절규하다 죽어간 하녀의 표정은 정말 소름 돋았다.
 
남편은 결국 아내가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 참회의 한마디를 남기고 죽는다. 당신을 배반해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그 장면이 끝이 아니란 이야기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는 영화. 아내는 하녀와 바람난 남편의 이야기가 실린 신문을 보며 젊은 하녀를 들인 것이 범의 입에 날고기라고 말하고, 남편은 그 말에 크게 웃으며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젊은 여자를 두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들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느냐는 식의 말을 던지면서 윙크를 날린다. 결국은 남편의 상상이었던 셈이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하녀는 '아내'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살뜰하게 살림을 보살피지만, 언제나 냉대와 무시, 구박을 당한다. 하녀에겐 자신을 돌보아줄 사람도, 가족도, 몸을 편하게 뉘일 수 있는 집도 없다. 돈 때문에, 동식의 집에 하녀로 들어간 여자는, 아내의 자리를 넘보지만 언제나 자신은 병약한 안주인을 대신해 그 집의 일을 하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떻게 주인집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되지만, 안주인의 자리는 차지할 수가 없고 아이마저 유산시켜야 할 처지에 놓여지고 만다. 하녀는 어떻게든 안주인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려고 하지만 (동식의 사랑) 하녀에겐 이마저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하녀는 잘못된 관계에 집착하고 마는 것이다. 하녀는 그 집에 몰래 숨어들어 그 집안의 평화와 행복을 갉아먹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치 부엌에 몰래 숨어들어 식량을 '축'내는 쥐와도 같다.
 
아내는 그러나 하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하녀가 자신의 아이를 죽게 만들었는데도, 수년간 갈고 닦은 - 그야말로 공든 탑인 가정이라는 탑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그건 생계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하녀 역시 생계 때문에 그 집에 들어갔다. 하지만 하녀는 아이를 유산시키게 만든 안주인을 보며, 그리고 안주인의 힘을 느끼며 안주인의 자리를 탐내게 된다.
 
완벽한 가정. 그러나 그 가정은 남편의 외도 앞에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이미 그렇게 깨어진 가정을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너진 공든 탑을 포기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아내의 눈물겨운 노력은 그녀가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재봉틀 앞에 앉는 것으로 입증된다. 남자는 그저 그런 아내를 바라볼 뿐이다. 남자의 우유부단함과 무능력함은 가정을 파괴하고 두 여자의 삶을 망가뜨린다.
  
하지만 남자는 끝까지 아내에게만 용서를 바랄 뿐, 하녀에게 미안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반성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가정을 파괴시키고 아내와 하녀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이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고 여전히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명예만을 지키려 든다. 그 와중에도 아내는 어떻게든 다시 살기 위해 재봉틀을 돌린다.
 
아내가 가정을 살뜰하게 꾸리고 지켜나가려 애쓴 것에 비하면 남편은 전혀 하는 게 없다. 아내가 아파서 요리를 하지 못하게 됐을 때- 그리고 하녀도 낙태를 하고 피가 멎지 않아 누워만 있어야 했을 때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고, 아내에게 먹이기 위해 카레라이스를 만드는 자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힘들다고 징징댄다. 그리고 완벽하게 해내지도 못했다.
 
아내의 빈자리가 이렇게 큰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가정이 파괴되는 건 남편의 '외도' 때문이었고, 설사 파괴되었다 하더라도 남자는 한번은 그럴 수 있지라고 하면서 여자 쪽에서 무조건 희생하고 받아들여주고 눈감아주기를 강요했던 것이 오래전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을까?
 
무조건적인 용서와 무책임한 외도. 그런 것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는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그 시대엔 굉장히 파격적으로 느껴진 영화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요즘엔 여성의 사회활동도 많아졌고 남녀평등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서 남자든 여자든 외도를 할 경우, 바로 이혼으로 이어지지만... 예전에는 여자 쪽에서 많이 참고 희생하고. 그런 것을 당연시 여기고. 여자의 정절만을 강조(또는 강요)하던 시대였을 것이다. 이혼은 꿈도 꿀 수 없고, 남편과 사별해도 여성은 재혼을 하기가 어려웠던 시대.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대. 왠지 이 영화를 보면서 김동인의 소설 <감자>가 생각나기도 했다.


영화 하녀

그런 시대에 나온 조금은 앞서가는 내용의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굉장히 인상 깊었고, 재미있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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