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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Dec 17. 2016

브로큰 플라워

바람둥이의 시들어버린 꽃다발

영화는 수많은 이야기(편지)들이 분류되는 장면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관객은 편지가 분류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누군가가 '분홍색 봉투'에 담긴 편지를 받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편지의 주인공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편지의 주인공은 돈 존스턴이라는 남자로 돈 주앙을 연상시키는 '바람둥이'다. 그가 바람둥이라는 사실은, 그가 백발이 성성한 외모에 정년 퇴임까지 한 노인이지만, 젊은 애인과 이별하는 장면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여자가 그를 떠나는 이유는 그가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릴 생각을 하지 않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독신남이다.   


영화 브로큰 플라워

무미건조하고 따분한 일상 속에서 그에게 배달된 한 통의 편지는 그로 하여금 예정에 없던 여행을 떠나게 만들고, 영화는 그의 여정을 따라간다. 분홍색 편지에는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 그 아들이 곧 당신을 찾아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는 그 편지를 무시하려 하지만, 이웃에 사는 친구가 그에게 그 편지의 주인과, 아들을 찾아 떠나라고 부추긴다. 단서는 타자기와 분홍색 뿐이었다.
 
그는 탐정놀이에 푹 빠진 듯한 친구가 여러 차례 권하자 더는 싫다고 하지 않고, 집을 떠나 과거에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을 찾아 다닌다. 내심 아들이 정말 존재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던 것 같고, 은퇴 후 무료한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던 것 같다. 사별하고 혼자 딸을 키우며 사는 여자도 있었고, (그 여자와는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온다) 애완견이 죽은 후 인생이 달라진 여자도 있었다. 또, 아직까지 자신을 증오하며 용서하지 못한 여자도 있었다.


영화 브로큰 플라워

그는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못하고 제대로 용서를 받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 편지의 주인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영화 브로큰 플라워

하지만 그는 집 앞에 어떤 젊은이가 서성거리자 그가 자신의 아들일 거라 짐작한다. 채식주의자인 그에게 샌드위치까지 사주고, 인생에 관한 나름의 진지한 대화까지 나누지만 그 젊은이는 멀리 달아나 버린다.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그에게 그를 아들로 생각하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하자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도망가버린 것이다.


이 영화 초반에 남자는 아들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러나 아들이 정말 존재하는지 확인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 그가 찾으려 한 것은 어이 없게도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아들'이었다.
 
이 영화 내내 남자와 함께 하는 것은 '컨트리 뮤직'이다. 남자는 원래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만, 친구가 CD에 구워준 컨트리 뮤직을 들으며 자신의 과거를 되짚는다. 지나간 날에 대한 향수. 좋았던 시절에 대한 추억이 얼마간 남자의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자신이 상처 준 여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든 많은 여자를 사랑했고, 사랑을 받았던 남자에게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약간은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브로큰 플라워

하지만 지나간 과거는 모두 부질없고, 과거의 로맨스는 시들어버린 꽃다발처럼 초라하기만 할 뿐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으로 떠나 보낸 사랑에 대한 미련 조금, 그리고 어딘가에 자신이 과거에 사랑했던 여자와 자신을 이어줄 끈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 헛된 희망 뿐이다.


영화 속에서 남자는 아들이 아닐지도 모르는 남자의 뒤를 무작정 쫓는다. 그건 그만큼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남자 주인공의 속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보며 바람둥이는 많은 여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매력이 흘러 넘치는 남자가 아니라 끊임 없이 여자들에게 버림 받은 불행한 남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지속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지 못하는 바람둥이의 쓸쓸한 노년을 그린 영화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면의 공허함을 채워줄 누군가는 사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극복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인간은 때로 외로움을 느낀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혼자 껴안고 가야 하는- 다만 견뎌야 하는 감정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누군가로 인해 그 외로움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수 있다면, 그런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비단 나 혼자 뿐은 아님을 알게 된다면 - 일평생 한 사람에게 사랑 받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 조금 덜 외로운 인간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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