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
일상은 단단하다. 익숙한 일상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그래서 일종의 모험이요, 도박이다. 호두껍질처럼 단단한 일상을 한 순간에 으깨어 버리는 것은 불시에 찾아오는 '사랑'이다. 보통의 불륜 드라마를 보면 그들은 이 모험에 모든 것을 건다.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고 '가족'은 해체되거나 새로운 가족을 만나 단단하게 결합한다.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장미 비파 레몬'에 등장하는 그녀들은 그렇지 않다. 가정이 너무나 소중해서 그것을 지키려는 건가 싶지만, 사실 그녀들은 그냥 귀찮을 뿐이다. 그녀들은 '사랑'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 누구를 만나 살더라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 지금의 이 사람과 그 사람을 비교할 생각도, 그럴 기력도 없다. 그녀들은 잠시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고 이제는 무미건조해진 관계에 심드렁해져 있을 뿐. 특별히 남편에 대한 불만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사랑'은 '유희'로만 머무른다. '유희'로서의 사랑. 상대방과의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없는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서 현실에 뿌리를 내린다. 장미 비파 레몬에는 꽃집을 하는 여자와, 그 꽃집을 다녀가거나, 꽃집 앞을 지나다니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착실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아 꽃을 사는 여자(도우코)와, 구두쇠인 남편에 대한 반발심으로 그닥 좋아하지도 않는 꽃을 매번 사가는 여자(아야), 그리고 꽃집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꽃가게에 꽃들은 '축제일 밤에 내다파는 금붕어 같아, 길가에 핀 들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여자 (에리)가 등장한다. 재밌게도, 이들의 꽃에 대한 시각은 그녀들의 사랑관 또는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도와 연결되어 나타난다.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만 조금은 심심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도우코와 지금의 남편을 크게 좋아하지 않지만 그리 나쁠 것도 없어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아야. 꽃가게의 꽃이 금붕어 같다고 싫어하며 길가에 핀 들꽃을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에리는 '결혼'에 대한 환상도, 기대도 없이 그저 현재의 사랑에 충실하고픈 싱글이다. (그녀는 유부남을 좋아한다.)
사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속에서 가정이 있는 여자가 가정이 있는 남자를 좋아하거나, 미혼 여성이 유부남을 좋아하는 설정 등은 심심찮게 나오던 것들이라 그리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이는 '대상'에 대한 애착이나 '사랑'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만족도'와 더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라는 영화가 국내에 개봉되어 주목을 끌었던 적이 있다. 이 영화에는 지금은 한류스타로서 입지를 굳힌 톱스타들이 대거 등장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데는 '바람둥이 남자'가 한 가정의 모든 여성들과 연애를 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며 비밀을 공유한다는 설정에 있었다.
이 영화의 제목처럼 누구나 비밀을 갖고 살며, 또 비밀을 필요로 한다. 비밀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혼자만의 공간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잠겨 있는 서랍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밀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장미 비파 레몬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서랍'을 필요로 한다. 단단하게 잠긴 서랍 말이다. 미혼인 그녀들이나, 기혼인 그녀들이나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만큼 외롭다. 그래서 그녀들은 사랑을 한다.
그녀들이 사랑하는 '대상'은 그녀들이 처한 현실에서 한발짝 떨어진 공간 속에 그녀들을 이동시킨다. 따라서 사랑의 대상은 '낭만적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낭만적 공간'은 현실의 그녀들에게는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다.
결혼을 하게 되고, 두 사람만의 공간이 생기면 그 공간은 곧 익숙한 생활의 냄새로 가득차게 된다. 그리고 그 생활의 냄새는 쉽게 빠져나가지 않고 발목을 휘감는다. 생활의 냄새가 일상에 단단하게 뿌리 박히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은 쉽게 휘발된다. 대신 익숙함과 친근함이 사랑이 떠난 그 자리를 대체한다.
장미 비파 레몬에 등장하는 그녀들의 관계는 미로처럼 엉켜 있다.
오랫동안 사귄 애인이 있었지만, 결혼 직전 그와 헤어지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 결혼한 도우코. 그리고 언니의 옛 남자 야마기시를 오랫동안 좋아했던 그녀의 동생 소우코. 도우코에게 배신 당하고 동창모임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했지만,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아내가 바람을 피자, 여자를 믿을 수 없게 된 야마기시.
야마기시에게 '그 남자가 자기 인생의 전부'라고 말했으면서도 바람핀 것이 들통나자 다시 일상으로 완벽하게 복귀한 야마기시의 아내 미치코. 레이코가 연 홈파티에서 레이코의 남편인 츠치야에게 반해 데이트 신청을 하는 레이코가 일하는 회사의 아르바이트생 사쿠라코.
그런 사쿠라코가 부담스럽기만 한 츠치야와 그런 츠치야와 연애를 하고 아이까지 갖게 되는 미혼여성 에리. 츠치야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생활이 깨질까 두려워 모른척 하고 있는 레이코. 레이코가 연 홈파티에서 야마기시를 처음 본 후,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도우코의 직장 선배이며 미혼 여성인 마리에.
길에서 우연히 만나 잠자리까지 가지게 되는 도우코와 신이치. 신이치와의 관계에 넌덜머리를 느끼면서도 둘째를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아야. 오랫동안 소원하던 꽃집을 경영하기 위해 남편까지 일에 끌어들이지만 결국 남편 없이 홀로 서게 되는 에미코와 그녀의 남편 시노하라.
가정은 깨어지고, 붕괴될 위기에 놓여있지만 그녀들은 평화를 가장하고 꽃을 꽃병에 꽂고 물을 주면서 일상의 안락함에 몸을 뉘인다. 자신은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되뇌이면서 말이다.
꽃에게 물을 주듯 건조해진 일상에 찾아온 사랑의 두근거림과 설렘을 그녀들은 꽃처럼 흠뻑 빨아들인다. 애써 거부하지 않고, 어떠한 기대도 가지지 않으며 시작하는 사랑은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하며 행복으로 충만하다. 희망 없이 사랑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기대하게 되고 바라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혼인 그녀들에겐 기대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 이 사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희망과 기대는 배제된 채로 사랑이 진행된다. 그래서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느낄 수 있으며, 날것 그대로의 연애를 경험하게 된다. 한 사람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은 하지만, 마음은 변하고 쉽게 허물어지고 흔들린다. 다만, 흔들리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감정에 솔직한 그녀들의 사랑은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하고 위태롭지만, 그 자체로 행복해보이기도 했다. 그녀들은 사랑을 통해, 내가 아직도 누군가에게는 여성일 수 있으며 매력적인 여성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결혼생활과 연애. 그 두가지를 위태롭게 - 또는 행복하게 오가는 여자들의 이야기. 바로 장미 비파 레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