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생 때 미숫가루를 먹기 위해 신문 배달을 한 적이 있다. 많게는 100부까지도 돌렸으니 어찌보면 노동착취를 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렸을 때 살았던 아파트 4층에 부업으로 신문배달을 하는 아줌마가 살았다.남편은 대기업 출판사 부장인가, 과장인가 그랬는데 애가 셋 있었고 나는 그 집의 둘째 딸과 친했다.
사실 걔는 내 여동생과 동갑이었다. 걔네 아빠가 출판사에 다니셔서 그런지 그 집엔 책이 많았다. 그 집에 책을 읽으러 가곤 했다. 그 애의 어머니가 부업으로 신문 배달을 시작하게 되면서 사건은 벌어졌다. 사실 발단은 "오토바이" 때문이었다. 신문 배달을 좀 도와주면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워준다고 해서 어린 마음에 혹해서 시작하게 됐다. 우리 집은 형제가 많았기 때문에 그 아줌마는 우리 형제들을 모두 동원해 신문 배달 부수를 늘렸고 상도 탔다.
신문 배달 구독자 수를 늘리기 위해 그 아줌마는 주로 신문 사절이 붙어 있는 아파트 단지를 우리에게 맡겼다. 처음엔 10부 정도를 돌리게 하더니 나중엔 20부, 30부로 배달 부수가 점점 늘어났다. 신문 배달을 다 하고 나면 하루 반나절이 걸렸고 손이 새까맣게 변하곤 했다. 이동은 오토바이로 했다. 나중에는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자 아이스크림으로 꼬셨다. 신문배달을 하고 나서 먹는 아이스크림 맛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신문배달 일은 처음엔 재미있었지만 더운 여름에 하려니 힘이 꽤 많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얼음이 잔뜩 들어간 미숫가루를 먹었는데 정말 시원하고 맛이 좋았다. 태어나서 처음 미숫가루를 먹어본 것이라 그랬는지, 그 맛에 빠져서 신문배달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우리 형제들이 이웃 아줌마에 의해 신문배달에 동원됐다는 사실을 알고 그 집 아줌마와 대판 싸웠다. 다시는 신문배달을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그 미숫가루 맛을 잊을 수 없어서 다른 형제들이 그만둔 후에도 몰래 계속 신문을 돌렸다. 그러다 발각되어 호되게 혼났다.
용돈도 올려주고 간식도 많이 사주는데 왜 계속 신문배달을 나갔느냐는 엄마의 말에 나는 미숫가루를 먹기 위해 그랬다고 털어놓았다.
엄마는 어이없어 하시며 "그깟 미숫가루가 뭐라고 땡볕에 신문을 돌리느냐며 엄마가 얼마든지 타줄테니 당장 그만두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에겐 미숫가루 무한리필 천국이 열렸다. 하지만 어쩐지 신문 배달을 하고 나서 먹는 그 미숫가루보다 맛이 없었다.
그 어떤 미숫가루도 그때 그 미숫가루 맛을 이길 순 없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맛이다. 그 아줌마의 행동은 고약했지만, 덕분에 나는 내 인생 최고의 미숫가루를 맛볼 수 있었다. 또 그때의 일은 노동의 가치와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고 좋은 인생 수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숫가루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미숫가루는 걸쭉해야 진짜 같다. 왠지 그렇다.
이미지 출처 http://stefanoiuliani.pullfolio.com/(네이버 라인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