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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Jun 21. 2017

도쿄!

도쿄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봉준호, 레오 까락스, 미셸 공드리. 세명의 감독이 도쿄를 무대로 만든 영화 '도쿄'.
  
개인적으로는 일본 감독도 껴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외국인들이 바라본 도쿄(일본)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서.  영화를 다보고 난 후 일본인이 바라본 일본의 모습은 어떤지 살짝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제일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레오 까락스 감독의 '광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광인을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인종 차별에 관한 이야기로 봤다.
 
외국의 언론인들은 하나같이 일본은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추성훈이라든지, 국내에도 다수의 팬을 확보하고 있는 가네시로 가즈키 같은 재일 교포 출신의 작가에 의해 국내에도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대체로 국내에서는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라고 하면 미국을 가장 먼저 떠올리며 일본에 대한 젊은이들의 시선은 동경이나 선망에 가까운 것 같다.


일본에서는 한국인, 재일 조선인,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특히 심하다고 한다. 부라쿠민은 일본의 신분 제도 아래에서 최하층에 위치해 있었던 천민의 후예를 가리키는 말로 신분제도가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에 대한 차별은 사라지지 않고 있어 일본인들이 언급 자체를 꺼리는 말이라고도 한다.

영화 도쿄! <광인> 레오 까락스 감독

광인에서 광인은 맨홀에 산다. 맨홀에서 사는 그는 가끔 세상 밖으로 나온다. 세상으로 나온 그는 그러나 사람들을 괴롭히고, 돈을 씹어먹는가하면 꽃을 먹기도 한다.  꽃과 돈은 상반되는 이미지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의 이미지는 충돌한다. 어쩌면 꽃과 돈은 그의 내면의 혼란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도쿄! <광인> 레오 까락스 감독


그가 좋아하는 것은 꽃이지만, 현대 사회는 꽃처럼 아름답지 않다. 돈이 꽃의 역할을 하며 돈다발이 꽃다발보다 환영 받고 사랑받는다.  혹자는 돈이 사람 노릇하는 세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꽃처럼 아름답게 살고 싶지만, 현실은 꽃만 바라보며 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소외된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그는 과거를 그리워한다.


맨홀로 숨은 것을 보면 그는 세상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는 일본인들을 경멸한다. 특히 돈의 가치를 쫓아 도쿄로 몰려든 일본인들을 혐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독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아마도 돈은 그가 증오하는 것이었을 테고, 꽃은 사랑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두 가지를 씹어먹는다. 둘다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그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돈도 꽃도 온전하게 가질 수 없는 세상이, 그리고 자신이 미웠을 것이고 그래서 미쳤을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그저 '맨홀 밑에서 가끔 튀어나오는 무섭고 두려운 광인'일 뿐이다. 아무도 그를 사람으로 대해주지 않는다. 일본인들에게 그는 그저 자신들과 피부색도, 머리색도, 눈동자 색도 다른 외국인일 뿐이며 소통하기 어려운 미친 사람일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광인은 사형을 선고 받는다.  사형이 집행되지만 그는 죽지 않으며 갑자기 사라진다.  그는 끝내 이해받지 못했고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받아들여줄 나라를 찾아. 세계를 떠돌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광인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들에 대한 비판이 담긴 이야기로 봐도 될 것 같다.


첫번째에 등장했던 미셸 공드리 감독의 '아키라와 히로코'에서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성 없는 영화를 만드는 남자 친구를 따라 도쿄로 상경한 히로코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남자친구로부터 어느날 포부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히로코.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꿈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 우울해지지만, 자신의 장점을 나열하는 남자 친구의 말을 듣고 다시 힘을 내기로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친구 집에 얹혀지내는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물 포장 일을 하려고 하지만 자신은 떨어지고 남자 친구만 붙는다.
 
그런데다 남자 친구가 영화상영을 마친 밤. 친구가 친구의 애인과 누워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일도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는 히로코야 말로 아무 쓸모도 없다는 말을 듣게 되고... 그 말에 상처를 받게 된다. 이후에 히로코는 자신의 몸이 나무로 변해가는 것을 경험하고 흐느낀다.
 
의자로 변했다가, 사람으로 변하기를 반복하는 히로코. 거리에서 의자로 변했을 때 자신을 집어가주는 남자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의 쓸모를 찾게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이해하려고 들면 상당히 골 아프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은유로 봐야 한다. 히로코는 정말 의자로 변한 것일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녀가 의자가 되고나서야 자신의 삶에 만족하게 됐다는데 있다.
 
의자는 한군데에 가만히 있지만 쓸모가 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군데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사람을 누가 사람으로 보겠는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사람 취급 안할 것이며 무능력하다고 욕을 할 것이다.
 
히로코는 친구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다. 의자만도 못한 존재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히로코 역시 광인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며 소외된 사람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존재를 인정 받지 못한다. 일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암튼 무언가를 해야한다. 남자 친구는 일을 하느라 바쁘고, 자신은 만날 친구가 없다. 그녀의 행동반경 안에서 만나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남자 친구와 자신이 신세를 지고 있는 친구. 자신의 쓸모를 찾기 위해  의자가 되어버린 히로코의 모습은 그래서 슬프다.  

영화 도쿄! <아키라와 히로코> 미셸 공드리 감독


우리는 늘 바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뒤떨어진 사람이 되고 만다.  때로는 인간 취급을 못 받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쉴틈없이 일하는 속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일하는 기계가 되어버린 현대인들의 모습을 미셸 공드리는 히로코를 통해 보여줬다.  미셸 공드리 감독에게 일본인의 모습은 휴식을 모르는 워커홀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도쿄! <흔들리는 도쿄> 봉준호 감독


봉준호 감독의 도쿄는 국내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히키코모리' 문제를 다룬다. 어쩌면 앞에 등장한 두 가지 이야기에서 언급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일을 하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는 남자 주인공은 어느날 피자를 배달하러 온 여자를 만나게 된다.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되는 남자 주인공은 그녀 때문에 세상 밖으로 나올 결심을 하게되지만 그녀는 집 안으로 숨어버린다. 히키코모리가 된 것이다.


영화 도쿄!


남자가 여자를 찾아갔던 날.  집안에서 한발짝도 나오려하지 않는 여자에게 지금 나오지 않으면 영원히 못 나온다고 말하며 나오라고 권하지만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때마침 지진이 일어나게 되고 남자는 여자에게 나오라고 소리를 친다. 여자는 나오지 않는다. 지진이 멈춘 후 여자가 등장하고, 여자는 흔들린다고 말한다.
 
히키코모리나, 세상 속으로 숨어버린 사람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을 봉준호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상이 두려워, 세상 바깥으로 나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가 외면하고 싶고, 잊고 싶어했던 그들의 이야기가 도쿄에 있었다.  눈을 돌리니 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손을 내밀어주고 싶다. 따뜻하게 웃으며 등을 두드려 주고 싶다. 다시 시작해보자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남보다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우리는 많은 것을 외면한 채 앞만 보며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뒤돌아보면 그가 있고, 옆에도 그가 있다. 넘어져 울고 있는 그가, 또는 그녀가.  세상 밖으로 나가려하고 있다. 손을 잡아당겨 주어야 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도쿄는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영화다.




영화 도쿄! <흔들리는 도쿄> 봉준호 감독


* 봉준호 감독의 흔들리는 도쿄가 다른 두 감독의 영화와는 달리 굉장히 일본틱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한국적이다. 왜냐하면 보통의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의 일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사람이 선로 아래로 떨어지거나, 물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그건 그 사람의 운명이라며 상관하지 않는다.  


남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태도는 쿨해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히키코모리 문제나 왕따 문제가 유독 심한 나라도 일본이다. 이는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며 그만큼 남에게 무관심한 것이 일본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선로에서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 대신 죽은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한국인이었고 일본 사회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그의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지하철에서 사람을 구하는 일은 물론 쉽지 않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앞에서는 누구나 몸을 사리게 된다. 하지만 이를 방관하는 태도는 일본인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국인의 정서와 일본인의 정서는 그런 것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그녀가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그녀를 찾아간다.  


물론 처음 시작은 보고 싶어서였겠지만 그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그녀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려 한 것이다. 이런 정서는 사실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의 정서에 더 잘 맞는다.
 
지진이 났을 때, 집 안에서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밖으로 뛰쳐나온다. 하지만 그 뛰쳐나온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녀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친 남자는 그 뿐이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삶에는 상관하지 않는 것이 일본인들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잘 모르는 이의 일에 관여하는 것은 결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런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일본틱하며 일본의 풍경을 제대로 못 살렸다는 이야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영화는 도쿄의 풍경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영화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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