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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생활자 Dec 29. 2017

낙하하는 저녁

어느날 찾아온 이별의 시간

지은이 에쿠니 가오리 옮긴이 김난주 출판사 소담 출판사 페이지 248쪽 원제 落下する夕方


이 책의 표지에는 '에쿠니 가오리의 실연을 담은'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책을 읽을 때는 몰랐는데 저자의 경험이 담긴 자전적 소설이었나 보다.




나는 다케오가 나간 후에도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긴 시간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해버리면
헤어짐이 현실로 정착해버린다.
앞으로의 인생을, 내내 다케오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날, 사랑을 잃어버린 여자의 이야기.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의  여주인공은 어느날 오랫동안 동거해온 남자로부터 느닷없이 이별을 통보 받게 된다.
 
<낙하하는 저녁>은 이별을 쉽게 받아들이지도,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미혼의 여자가, 이별을 앓는 과정을 덤덤하게 그려 내고 있다. 익숙한 것을 어느날 떠나보내는 것은, 그 결별의 과정은 그 익숙함이 주는 일상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고 힘들다. 또 아프기도 하다.
 
사랑은 어느날 갑자기 시작되고, 이별 역시 갑자기 다가온다. 그렇게 예고도 없이 다가온 사랑과 이별은 송두리째 우리의 삶을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 시점부터 변화를 겪게 된다. 사랑이 온 후, 또 가고 난 후. 사랑은 둘이서 주고 받는 것이지만, 이별은 혼자만의 것이다. 누군가와 나눠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나보다 더 그를, 그녀를 아는 이가 없으며, 사랑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 그를 욕해도 눈물이 나고,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위로를 해도 눈물이 난다.
 
어떤 감정을 소리내어 말하면 그것은 그 순간부터 진실이 된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낙하하는 저녁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이별'을 소리내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직 그에 대한 사랑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집에서 이사 보내되, 마음에서 떠나보내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이별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시작할 때는 동시에 시작되는 사랑은 끝날 때는 일방적인 통보로 끝이 난다. 그와 내가 같지 않을 때 오는 이별은 그래서 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그래서 그 이별의 시간은 '낙하하는 저녁'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케오의 별 볼일 없는 얘기를, 왜 그토록 정성스럽게 듣는 것일까. 한 마디 한 마디에 심장이 이리도 무너지는데.


그 답은 그녀도 이미 알고 있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기 때문이다. 다케오는 어땠을까? 그 역시 사흘에 한 번씩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털어 놓는다. 그 역시, 익숙함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했던 것이리라. 사랑이 오래되면 낯설음이 가고 익숙함이 온다. 익숙함은 편안함을 데리고 오지만, 긴장감, 설렘, 떨림은 가지고 가버린다.
 
그럴 때 - 그 떨림과 설렘을 찾아 떠나는 이들이 있고, 거기에 안착하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 후자라면 당연하다는 듯, 결혼을 할 것이다. 전자라면? 이별을 하겠지. 다케오는 전자였다. 안정되고 익숙한 사랑 보다는 그는 떨림과 설렘을 동반한 짝사랑을 선택한다. 어리석은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그리고 싫어하게 되는 일이. 어디 사람 마음대로만 되는 것일까.
 
그게 마음 대로 되는 것이었다면, 그녀도 조금 더 쉽게, 그리고 홀가분하게 다케오를 떠나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듯, 이별에도 시간은 필요한 법이다. 함께 했던 기억들, 둘이서 공유한 시간들을 정리하는 데 짧은 시간이 걸린다면 - 분명 그 사람은 그 사람과 함께 한 추억이 없거나 그 추억이 쉽게 지울 수 있을 만큼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겠지.
 
사랑이 깊은 만큼, 이별의 시간 역시 길어지는 법이다. 어떤 사람은 평생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는 1년, 또는 다른 누군가는 10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의 기억은 그 깊이만큼이나 깊어서 머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다.
 
하긴, 그렇게 쉽게 뿌리 뽑혀질 사랑이었다면, 뿌리 뽑혀도 좋을 사랑이었다면, 사랑이라 이름 붙이기도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 쓸쓸한 사랑의 기억을 끌어 안고 사는 여자의 이야기. 낙하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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