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록 생활자 Dec 13. 2016

김씨 표류기

절망의 끝에서 만난 희망 : 당신의 희망은 안녕한가?

영화 김씨 표류기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짜파게티 봉지'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사루비아 잎을 따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던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이에게, 아니 - 그렇다고 믿고 있던 그에게 우습게도 그런 마음과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육체적 반응(허기짐과 배설에 대한 욕구)들은 새로운 희망을 선물한다.
 
영화는 한강 다리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 남자는 신용불량자로 한강 다리 위에서 자신이 갚아야 할 돈의 액수를 신용대출 상담원으로부터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고백한다. "그 말을 들으니 용기가 좀 생긴다"고. 그는 자신이 갚아야 할 돈의 액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못난 용기지만, 마지막 남은 용기를 쥐어짜내 -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건만 눈을 떠보니 자신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그는 죽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63빌딩 위라면 확실하게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그는 63빌딩을 찾다가 어딘지도 모를 무인도에 떨어졌다고 굳게 믿게 된다. 그가 물에 떠밀려 도착한 - 그가 무인도라 굳게 믿었던 그곳은 한강 근처의 밤섬. 생태보존지역인 밤섬은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사람 그림자라곤 찾을 수 없었던 것.  그러나 그는 그곳이 밤섬임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무인도에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다고 믿는다.
 
휴대폰 배터리가 닳기 전, 어떻게 해서라도 그곳을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그의 모습이 그러한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남자 김씨는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간절하게 살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흐느낀다. 죽음의 문턱에서 발견한 삶에 대한 욕구 때문에.


영화 김씨 표류기

하지만 그는 신기하게도 그 속에서 잘 적응해간다. 짜파게티 봉지나 사루비아 꽃을 우연히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는 나무에 목을 맸을지도 모른다. 사루비아 꽃잎을 따 먹으며 배를 채운 그는 어느날 짜파게티 봉지를 발견한다. 그 속에 든 스프도.
 
짜파게티를 먹고 싶은 욕망에 눈을 뜨게 된 그는, 당장 먹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지난날 자장면 먹기를 거부했던 자신을 떠올리고 참회한다. 당장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좌절감을 느끼던 그는 어느 순간 자장면을 직접 만들어 먹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자장면을 만들어 먹기 위해 그는 밀을 수확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밭을 간다. 그 밭에서 신기하게도 고추가 자라고 옥수수가 나기 시작한다. 그는 아이처럼 기뻐한다.
 

영화 김씨 표류기

그런 그를 카메라로 지켜보며 웃음을 짓는 또 한 명의 김씨가 있다. 쓰레기로 가득찬 방.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과 짐들. 커튼으로도 모자라 옷으로 가려놓은 창문이 그녀가 히키코모리임을 말해준다. 그녀는 얼굴에 상처가 있다. 이마에 나 있는 얼룩 때문에 마음에 더 큰 얼룩이 생겨버린 그녀는 집 밖으로 - 아니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를 꺼린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 안으로 자물쇠를 닫아 걸어놓고 그 안에 틀어박혀 지낸다. 3년이나 그런 생활을 지속해온 그녀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민방위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날 모든 것이 멈추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고, 달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녀는 외롭다. 달 사진을 찍는 이유도 달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아무도 없으면 외롭지 않다고 느낀다. 사람들이 자신을 외롭게 한다고 느끼는 그녀는 과거에도 외모 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으며 -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오랫동안 그런 생활을 지속해온 그녀에겐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공포고 두려움이다. 민방위 사이렌이 울리던 날. 우연히 남자 김씨를 발견하게 되는 여자 김씨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와인병 속에 담긴 여자 김씨의 짧은 영문 편지를 발견하게 된 남자 김씨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기분좋게 화답한다.
 

영화 김씨 표류기

 
외로운 존재는 외로운 존재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고립되어 있는 서로를 발견하게 되는 두 김씨는 기묘한 형태의 우정을 나누며 소통하고 서로에게 어떤 위로를 받는다. 농작물을 키워 소원하던 자장면을 먹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여자 김씨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그의 사진을 찍어 프린트한다. 그리고 그 사진 속의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아준다. 그러나 남자 김씨의 밤섬에서의 평화로운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간밤에 비가 퍼붓고 난 후, 그가 키우던 농작물은 모두 죽어버리고 - 망연자실해 있는 남자 김씨 앞에 밤섬으로 환경정화 작업을 하러 온 군인들이 들이닥친다.
 
그는 군인들에게 이곳에 있게 해달라고,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답장도 받아야 한다고 흐느끼지만 소용이 없다. 밤섬에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그는, 울면서 63빌딩으로 향하는 버스 위에 오른다.
 
여자 김씨는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 집 밖을 나선다. 그녀는 뛰고 또 뛴다. 하지만 그를 태운 버스는 멀리 사라진다. 망연자실해 울음을 터뜨리며 뒤돌아서는 여자 김씨. 그때 기적처럼 민방위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버스가 멈춰서고 그녀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결국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는 만난다. 만나서 서로의 이름을 말한다. 그때 다시 버스가 움직이고 넘어지려는 그녀를 남자 김씨가 붙잡는다. 이 장면에서 나는 맞잡은 두 손이 내내 따뜻하기를... 조용히 기도했다.
 
두 사람은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희망도 없다.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하루 하루를 버티며, 때론 견디며 살아갈 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어깨를 두드려 주는 한 사람.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김씨 표류기

여자 김씨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건 남자 김씨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였고, 남자 김씨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을 준 건 여자 김씨의 짧은 편지 한통이었다.  외로운 달과 같은 존재였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희망으로 서로의 마음 속에 자리한다. 희망이란 단어가 식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 외롭고 고독하고 - 힘든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건 어쩌면 삶에 대한 희망인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500일의 썸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