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기범 Feb 14. 2020

[아빠매뉴얼#3]엄마의 하루를 느껴보자

본격 엄마가 써서 아빠한테 준 기고문(?)

당연하겠지만 엄마도 이 브런치를 본다. 한 번 지나가듯 "엄마도 글 써볼래? 자기 글 잘 쓰잖아" 했는데, 얼마 전 정말로 써서 줬다. 혼자 읽기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는 탓에 이곳에 슬쩍 올려본다. 8개월 아기와 함께하는 처절한(?) 엄마의 하루가 펼쳐진다. (내거보다 잘 팔리면 어떡하지..)


전문저서를 쓴 사람들은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아이를 믿고 육아에 정답은 없으니 기본을 지키되 완벽하게 할필욘 없으니 부담을 가지지 말라는데.. 아니 이런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주세요 같은 말이 어디 있어!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난 이제 8개월이 된 아기 때문에 힘들다. 나는 전문 서적 및 전문가들의 블로그를 미친듯이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아기들은 렘수면이 짧고 잠을 자는 법을 모르니 루틴한 잠자리 의식을 해주고 인내심을 갖고... 고형식 준비를 위한 이유식을 시작할때 숟가락을 갖고 싶어하고, 장난을 치려고 할 수 있으니 인내심을 갖고... 분리불안이 오는 시기이니 칭얼대도 아이를 사랑으로 다독이고 인내심을 갖고... 더 이상의 말은 생략하련다. 


그리고 적혀있다. '8개월 아기는 하루에 이유식을 2-3번 먹고 대변은 1~2회 , 낮잠은 1시간 반 정도 2회를 잡니다. 밤잠은 8~9시 사이에 자는 것이 좋습니다. 렘수면 주기가 짧기 때문에 새벽에 한 두번 깰수 있으나 스스로 잠들게 다독여주세요.' 


딸은 한개도 안 지키는게 없다. 근데 왜 나는 힘들까. 그리고 왜 또 맘카페를 찾는 것일까.  물론 육아책은 주절 주절 쓸 수는 없으니 평균을 적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 책만 보면 , 모르는 사람들은 또 "이정도면 순한거야~ 잘 하고 있네"라고 하겠지. 위의 몇 문장에 걸친 저 하루 일정을 제대로 한 번 적어보겠다. 


(여기까지 적다보니  예비 엄마들에게도 말씀드리고 싶다. 본인들의 시간표를 적어보세요. 베이비타임 같은 앱으로 보면 하루 네 번, 밥과 똥 두 번, 밤잠 쿨쿨 이렇게 보이겠죠. 그건 본인들의 하루 스케줄표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시간표를 적어보세요.)



8개월 아기 '엄마'의 스케줄표  


오후 8시 45분: 밤잠 시작 

오후 9시 20분: 30분 정도 지나면 살짝 깨기 때문에 그때 더 깊게 재워주고 나옴(시간 죽이기 텀이라서 무의미한 인터넷 서핑이나 인스타나 기웃거림) 

오후 10시: 밀린 집안일 남편과 하고, 샤워 , 머리 말리기

오후 10시 30분: 남편과 얘기도 하고 슬슬 미드나 한편 볼까 했는데 아기가 비명을 지르면서 울기 시작 

오후 10시 40분: 5분 정도 기다리다 들어가 다독임, 아기는 다시 잠듦 (3분 정도 걸림) 

오후 11시~오전 12시: 개인시간(남편이랑 대화좀 하다가 수면)

오전 1시: 뒤집다가 아기가 쿠션에 걸려서 낑낑 거림 다시 다독임. 아기는 바로 자고 나는 잠에서 깨 한 10분 정도 있다가 선잠에 듦

오전 2시: 또 뒤집고 혼자 잠들려고 아기가 노력은 하지만 낑낑거려서 손잡아주니까 잠듬.. 나는 또 10분 정도 뒤에 선잠 시작(이 때부턴 뭐가 현실이고 꿈인지 구분이 안간다. 온갖 비현실이 뒤섞인 장면들이 뇌에서 돌아가고 있어서 자도 자는게 아니다)


오전 3시: 아기가 뒤척이기 시작해서 잠에서 또 깸 

오전 3시 10분: 스스로 잠들게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는 중(당연히 잠은 못잔다) 

오전 3시 20분: 스스로 잠을 못자는거 같아서 몰래 실눈뜨고 지켜봄(눈 마주치면 안되니까.. 이미 슬프네) 

오전 3시 30분: 뭔가 계속 엎치락 뒤치락 하는데 못자고 있어서 손을 잡아주고 토닥임

오전 3시 45분: 힘으로 엄마를 뿌리치고 우주의 지령을 받아 무한 구르기 시작.. 본인도 왜 하는지 모르겠는지 찡찡거림 /다시 재우기 시작/ 자려고 하지만 또 우주의 지령이 시작되면서 위의 상황 무한반복 

오전 4시 30분: 재우다가 잔뜩 예민해져 아이에게 계속 화를 내는 나때문에 남편과 신경전 시작, 아기 딸꾹질 함- 나는 물을 먹여야겠고 남편은 그냥 지금 졸기 시작했으니 냅두라지만 고집부리고 물 먹임. 물 먹고 딸꾹질 멈추고 한결 숨이 무거워짐 그러나 우주의 지령을 또 받아서 움직이려고 함. 남편의 더 큰 손과 힘으로 우주와 교신 실패-잠듬 (잠들때까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라 못 자고 허공만 노려봄) 

오전 5시: 나는 겨우 잠에 다시 들었다. 

오전 6시? : 시간은 사실 잘 모르겠지만 남편 출근 알람소리에 깼다. 아기는 잘 자고 있다.


여기까지가 일과 그래프 상으로는 '전날 오후 8시 45분에 잠들어서 다음날 오전 8시까지 수면' 한 줄이 된다. 중간에 한시간 반만 하얗게 비우면 된다.

 


출처: pixabay.com


그리고, 다음날 


오전 8시: “아아오오우우 아빠바바바바 맘마 음마음마 아빠아빠바바바음마”가 들리기 시작. 모른척했지만 이미 잠은 깸. 어떻게든 밍기적 거렸다. 애기가 안우니까 일단 냅둠

오전 8시 45분: 첫 수유 (분유를 타러 비몽사몽인 몸을 침대에서 일으켜 젖병에 물을 붓는데 머리가 너무 아프고 눈이 침침해서 눈금이 잘 안보임, 물을 부엇다 버렸다 하면서 겨우 분유 탐) 

오전 8시 50분: 그새 아기가 뒤집어 있는데 냄새가 나길래 보니 똥쌈.. 이미 젖병을 봐서 흥분했는데 내가 안주니까 배고프다고 울고 불고 난리. 일단 새기저귀랑 물티슈 침대로 던지고 젖병부터 물림, 아기는 먹고 나는 똥기저귀를 갈기 시작함. 


이게 간단하게 '첫 수유'로 기록된다.


기저귀 갈려고 하는데 두 다리를 번쩍 들고 휘두르며 가만히 안 있고 발가락으로 내 무릎을 엄청 꼬집고 찍음. 아픔. 그 상태로 옆으로 누으려고 해서 두 다리를 꽉 잡음. 다리를 미친듯이 흔듬. 기저귀 갈고 바지를 입히려고 하는데 다리를 계속 뺀다. 한쪽을 넣으면 다른 쪽을 빼고 두 다리를 한꺼번에 입히려고 하니 허리를 비튼다....우주와의 교신이 또 시작됐나보다. 그럼 이제 여기까지 일정이 그냥 한줄로 요약된다. 바로 이렇게.

 

오전 8시 50분: 대변 


이제부터 '분리불안'이라고 몇 줄로 요약하는 오후 일과다. 


오후 내내: 장난감 갖고 놀다 자꾸 뒤를 돌아보며 엄마 있나 확인. 없으면 징징 대거나 장난감에 집중 안함 . 장난감 집중 안하면 내가 더 힘드니까 화장실 대충 다녀오고 아기 뒤에 앉아있음. 몇번 말 걸고 놀아준다. 10분 정도 지나면 노잼. 정말 어제도 엊그제도 일주일전에도.. 늘 보던 장난감과 기능이라 새로울게 없는데 또 설명하고 재밌는 척 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아기는 너무 못 논다. 손가락 근육도 팔도 아직 제대로 못쓴다.


7-8개월 아기들이 그렇다. 디테일한 동작은 당연히 힘들고 운동기능을 담당하는 뇌가 저 위에 어떤분과 이제 막 교신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 보고있다 보면 정말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발전하는게 보여 기특하고 귀엽긴 하나 그 생각이 3시간 내내 가진 않는다는거 다 알잖아? 


(가끔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다면 진짜 열받는 댓글들이 많다.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특히 육아 관련 컨텐츠에 마치 어린 아이처럼 달아놓은 얼척 없는 댓글들 말이다. 모성만 신성시하는 내용은 정말 줘 패고 싶을 정도다. 엄마들이 육아를 노잼이라고 말하면 안된다고? 아이와 있는 시간이 행복만 할줄 아냐고 멱살 잡고 흔들고 싶네.)


여기까지 쓰다보니 기가 빨려서 더 이상 못쓰겠다. 낮잠 재우고 다른 방 구석에 홀로 앉아 꾸역꾸역 햄버거를 먹다보니 더 우울해지겠어서 시작한 글이었는데 나름 해결책이 되긴 하네.. 차분해진 마음이다.


아빠의 한 줄 독후감: 이 글은 쓴 날 엄마는 그 날 햄버거가 얹혔는지 마구 목말라하다가 늦게 잠이 들었다. 글을 보고 마음이 헛헛해진 아빠는 엄마 대신 애기 밤잠 관리를 했다고 전해졌다. 엄마 화이팅.


출처: pixabay.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