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물과 숙성된 위스키, 그리고 반부패 시스템의 조건
조직 부패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입니다.
특히 금융권이나 공공기관처럼 민감한 정보를 다루는 조직에서는
순환보직이 마치 ‘필수 코스’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위스키가 위대한 이유는 단지 오래된 시간 때문이 아닙니다.
오크통 안에서 위스키는 공기, 나무, 온도, 습도와 끊임없이 반응합니다.
그 과정이 향을 깊게 하고, 맛을 복합적으로 만듭니다.
이걸 우리는 ‘숙성’이라고 부릅니다.
오래 머문다고 다 썩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잘 관리된 시간’은 자산이 됩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말했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단순한 의지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이 결정한다.”
시간은 때로 부패를 부르지만, 좋은 환경 안에서는 숙성을 만듭니다.
결국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관리입니다.
숙성은 단순히 부패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숙성은 바로, 전문성입니다.
시간을 들여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반복 속에서 발견되는 규칙,
오랜 경험 속에 쌓이는 직관,
그리고 깊어진 신뢰.
특정 부서에서 오랜 기간 일한 사람만이 아는
미세한 리스크의 징후들이 존재합니다.
아담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강조했습니다.
“분업과 전문성의 축적이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다.”
시간은 때로 거대한 경쟁력이 됩니다.
하지만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적절한 통제, 지속적인 피드백, 그리고 투명한 견제.
이것이 없다면 숙성은 ‘방치’로 변하고, 결국 썩게 됩니다.
최근 금융권 횡령 사건들을 보면,
문제는 "오래 근무한 것" 이 아니라 "방치된 자리"였습니다.
감시받지 않는 자리,
문제 제기가 억압된 분위기,
“잘 돌아가니까 그냥 둬”라는 안일함.
플라톤은 『국가』에서 말했습니다.
“만약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결국 부도덕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을 신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신뢰를 시스템으로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숙성은 방치가 아닙니다.
깊은 경험을 자산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조직이 건강하게 ‘오래된 힘’을 활용하려면, 다음 네 가지가 필요합니다.
· 정기적인 교차 점검 : 내부 감사나 셀프 점검으로 ‘보이는 자리’를 만드는 것.
· 복수의 결정 구조 : 중요한 권한은 한 사람에게 몰리지 않게 분산하는 것.
· 심리적 안전이 확보된 내부 고발 체계 : "이상한데?" 싶으면 언제든 말할 수 있는 분위기 만들기.
· 숙련자의 전문성 인정과 활용 : 오래된 경험을 '숙성'으로 보고 전략적으로 쓰는 문화.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강조했습니다.
“권력은 권력으로 견제해야 한다.”
사람의 선의에 기대지 않고,
구조와 시스템으로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정기적인 자리 이동은 부패를 막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순환만 강조하다 보면,
전문성의 축적은 막히고 숙성의 기회는 사라집니다.
조직은 사람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신뢰가 부패하지 않도록 투명한 통제 장치를 설계해야 합니다.
오래된 것을 관리하는 능력, 이것이 조직의 깊이와 건강을 좌우합니다.
숙성과 부패 사이, 그 둘을 가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환경입니다.
조직도 위스키처럼, 깊이 있게 숙성되고, 오래도록 가치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단, 그 안에 투명한 통제와 살아 있는 질문이 계속 살아 있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