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푸른 하늘이 아닌 잿빛 하늘이 아침을 맞이해 주었다. 간단하게 숙소에서 달걀 프라이와 멜론, 가스파초 수프 등으로 끼니를 하고 설거지까지 마친 다음 간편한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숙소 근처에 프라도 미술관이 있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거리와 사람들을 보면서 여유롭게 갔다. 10시 오픈이어서 첫 타임으로 예약했는데 미술관에 도착하니 이미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우리도 줄을 서고 10시 입장에 맞추어 들어갔다. 안내소에 한국어 설명서가 있어서 그걸 보고 전시실을 차례로 표시하며 관람했다.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은 미술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아는 미술관으로 스페인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미술관이다. 영국에 내셔널 갤러리, 프랑스에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 미국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있다면 스페인은 바로 이곳이었다. 1819년에 일반 공개되어 스페인 왕실의 컬렉션을 시작으로 계속 작품을 모아서 현재는 회화 작품만 8,000점 정도가 된다. 자국 작가들의 작품이 많은 것도 또 하나의 자랑인데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인 고야,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작품들과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회화 등도 상당히 보유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을 화가별로 꼽자면 고야의 '옷을 벗은 마야', 엘 그레코의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 티치아노의 '뮐베르크 전투의 카를 5세',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 루벤스의 '미의 세 여신'그리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등이 있다. 사실 예술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보는 이에 따라 그 감정과 가치는 달라지는 법이기 때문에 이외에도 좋은 회화들이 얼마든지 있다.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동상
사진 촬영이 금지여서 주요 작품을 눈에 담는데 집중했다. 다른 유럽이나 미국의 미술관은 촬영에 대해 관대한데 왜 촬영 자체를 금지하는지 이해 가지는 않았다. 전시실 곳곳에 가드가 있었지만 무심코 촬영하는 사람들을 제지하는 데에 신경을 많이 쓸 것 같았다. 익히 아는 티치아노, 라파엘로, 카라바조, 루벤스의 작품 외에 스페인의 작가들 작품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고야의 거친 붓 터치 속에 표효하는 감성, 벨라스케스의 섬세한 손길 속에 살아있는 스페인 왕실 가족들, 엘 그레코의 시대를 앞선 화풍으로 보인 신앙의 모습은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보물 같은 그림들이었다.개인적으로는 어릴 때 백과사전에서 인상 깊게 봐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뒤러의 '아담과 이브' 작품을 여기서 직관하게 되어 감명 깊었다. 그리고프라도에도 모나리자가 있어서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앉아서 쉬다가 고개를 돌리니 건너편 갤러리에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 있는 것이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을 하며 쳐다봤는데 모나리자였다. 루브르의 모나리자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다 빈치의 작품이지만, 이곳에 있는 모나리자는 동시대 작품이라는 것만 확실하지 제자의 솜씨인지 다 빈치의 솜씨인지는 불명확하다. 프라도의 모나리자는 배경이 검게 칠해져 있었는데 조사 결과 덧칠해진 걸 알아서 벗겨내는 복원을 하게 되었고 루브르의 모나리자보다 더 좋은 상태로 공개되었다. 더욱 선명하고 색도 진하고 눈썹도 있으며 보존 상태가 좋았지만, 사람들이 붐비지 않고 여기에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미술관 내 카페 가는 길
1시간 정도 보다가 아내는 졸음으로 힘들어하고 아이는 관람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해서 잠시 미술관 카페에 가서 쉬어가기로 했다. 카푸치노와 멜론 슬러시, 크루아상, 초콜릿 빵 등을 주문해 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평일 비수기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세계적인 미술관다웠다.예전 같았으면 나 혼자 관람을 하다가 만났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다닐 수는 없어서 이번에는 끝까지 함께 다니기로 했다. 그래서 속도를 내어 관람을 했는데 아이도 조금 컸는지 질문을 하곤 했다. 특히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 작품에서 파리스 왕자와 3명의 여신, 트로이 전쟁 등의 이야기를 해주니 관심 있어했다. 이렇게 아이도 커간다는 게 느껴졌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지나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우리보다 2시간 늦게 식사를 해서 현지에서는 점심시간이나 우리에겐 이미 지난 시간이어서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다. 점심을 숙소에서 해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돼지고기와 닭고기 중 뭘 먹고 싶냐고 묻자 닭고기라고 해서 닭다리 구이, 샐러드,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과일 요거트 등을 해 먹었다. 아이는 어제 식당에서 먹은 닭다리 구이보다 훨씬 맛있다며 남김없이 해치웠다. 집에서 먹던 감바스 요리가 스페인에서 먹은 감바스 요리보다 더 맛있다고 해주는 아이였는데 오늘 점심도 만족해하니 흐뭇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흐린 하늘 아래 거리로 다시 나갔다. 오후 일정은 레티로 공원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간단히 숙소에서 점심 먹기
레티로 공원은 스페인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가 세운 정원으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 파괴되었다가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했다. 본래 왕실의 여름 별장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았지만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공개되기 시작했다. 크리스털 궁전과 벨라스케스 궁전은 이곳에서 눈여겨봐야 할 건축물로 기대가 되었다.쌀쌀한 겨울 날씨 때문인지 아내가 좋아하는 장미는 거의 없었지만, 드넓은 부지 속에 아름드리나무가 많았고 조깅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여서 뉴욕 센트럴 파크 같은 느낌이 났다. 유리창으로 지붕과 벽면이 만들어진 크리스털 궁전 안으로 들어가니 인공적으로 안개를 피워내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진을 몇 장 찍다가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하던 아이 때문에 벨라스케스 궁전으로 갔는데 물 내리는 버튼을 못 눌러 관리인까지 불렀다. 단순히 버튼을 강하게 누르면 되는 문제여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이어서 인공 호수로 조성된 레티로 호수에 갔다. 거대한 사각형의 호수 안에는 노 젓는 보트를 탄 많은 사람이 있었다.
레티로 공원의 크리스털 궁전
레티로 공원의 벨라스케스 궁전
레티로 호수
호수를 지나서 1599년 세워진 스페인 최초의 개선문인 알칼라 문 쪽으로 나왔는데 보수 공사 중이라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거기서 메트로폴리스 빌딩 쪽으로 걸어갔는데 수많은 관공서가 자리 잡고 있어서 마드리드의 중심가다웠다. 메트로폴리스 빌딩은 1911년에 세워진 건축물로 지붕 위에 날개 달린 여신상이 매우 유명했다. 다시 숙소를 향해 가는 길에 아내가 찾은 추로스 가게가 있어서 아이와 아내는 꼭 먹고 가야 한다고 했다. 스페인 전통 디저트인 추로스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 간식으로 걸쭉한 초콜릿에 찍어서 먹는데 스페인 사람들이 아침에 즐겨 먹고 해장으로도 먹는다니 신기했다. 가게에 들어가 추로스와 그보다 크고 굵은 포라스, 카페 콘 레체를 주문했다. 포라스는 생각보다 컸지만 찍어먹어 보니 추로스보다 더 초콜릿이 입 안에 들어와 달콤 쌉쌀한 것이 맛있었다.
수리 중인 알칼라 문
메트로폴리스 빌딩 앞
포라스와 추로스
해 저무는 마드리드 거리를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빵집에 들러 내일 아침에 먹을 크루아상, 엠파나다 등을 샀다. 저녁 식사는 돼지 목살 스테이크, 샐러드, 양송이버섯 구이였다. 스페인은 돼지가 유명해서 이번에 등심, 삼겹살, 목살 등 다양하게 먹었다. 내가 숙소에서 해주는 걸 보고 아내는 레스토랑에서는 조금씩 나오니 우리가 아껴먹은 듯하다고 했다. 후식 아닌 후식으로는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 2개를 먹었다. 딱히 한국 음식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짐을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생각나지 않았던 건 아무래도 파에야 덕분인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짐 정리를 하고 내일 그라나다로 갈 준비를 마쳤다. 아침 7시 버스 출발이어서 꽤나 서둘러야 해서 자기 전에 최대한 정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