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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칼 Jan 26. 2024

Hallo, Berlin!

2024년 1월 10일(수)(7일째)-베를린

어제 파티 덕분인지 잠을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났다. 오히려 약간 졸리기까지 해서 완전히 시차에는 적응한 듯했다. 아침 식사로 어제 장 봐온 딸기잼 바른 빵과 청포도, 삶은 달걀, 소시지, 양배추 절임, 샐러드, 커피와 코코아로 나름 푸짐하게 먹었다. 먹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현관문 페인트 칠하려고 인부가 와있었다. 바깥이라 호스트가 말을 안 해줬는지 우리는 모르는 일이어서 일단 알겠다고 하고 호스트에게 물어보는 해프닝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마드리드에서는 보일러, 리스본에서는 문 손잡이를 고친다고 인부들이 온 적이 있었던 만큼 우리가 이렇게 묵을 때 일이 있는 게 특이했다. 설거지까지 하고 나오니 이미 오전 한 때였다. 베를린을 쭉 걸으며 둘러보기로 한 날이라 핫팩을 까며 다들 각오를 단단히 했다.



베를린 둘러보기 첫 시작은 퓌러벙커(Führerbunker)였다. 이제는 주차장과 아파트가 들어선 공터에 팻말 하나가 이곳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가 살고 최후를 맞이했던 벙커였다는 걸 설명해 줬다. 아이가 이곳이 퓌러벙커 맞냐고 개 산책을 나온 동네 주민에게 물어보니 입구가 막혀있어서 팻말로만 알 수 있다고 친절히 알려줬다. 이 공간을 보니 히틀러에 대해 경계는 하되 기억을 삭제하기 위한 독일 정부의 노력이 보였다. 완전히 공터로 변해서 모르고 지나쳤다면 이곳이 히틀러가 자살한 곳인지 몰랐을 것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근처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 공원으로 걸어갔다.


그냥 보면 모를 역사의 흔적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은 유대인을 기리는 것 중에서 참 인상 깊었던 장소였다. 홀로코스트로 살해된 유대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서 2005년에 만들어졌다. 2,711개의 어두운 콘크리트 비석이 격자 모양으로 늘어서 있는데 다양한 높이로 세워져 있었다. 나치 독일이 지배하던 시절 유대인들이 600만 명 넘게 희생되었기 때문에 독일은 이에 부채 의식을 지고 지금까지 보상 및 역사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로서 독일은 패전 이후 새로운 유럽의 지도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는데 같은 전범 국가인 일본이 동아시아에 보인 행보를 보면 대조가 되었다. 비석 사이를 걸어가니 깊이가 달라지면서 높아질수록 공허함과 외로움이 배가 되었다. 아이는 미로 공원 같다면서 재미있어했지만 그 의미를 알려주면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생각해보게 했다. 추모 공원에서 나오니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였다. 이때부터 여행객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브란덴부르크문(Brandenburger Tor)은 독일의 상징이자 베를린의 상징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오갔다. 미국 뉴욕 자유의 여신상, 프랑스 파리 에펠탑, 영국 런던 빅벤 등 도시를 넘어 그 나라를 떠올릴 정도의 인지도를 지닌 브란덴부르크문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지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관문인 프로필라이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문 위에 있는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Quadriga)에 탄 여신상은 평화를 형상화에 조각한 것으로 180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올리브 나무 관은 철 십자가로 대체되어 여신이 들고 있게 되었다. 나치 독일 시절에는 이 문으로 행진하는 것을 자주 선전용으로 촬영해 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동서 베를린 사이의 관문으로 역할을 했는데 1971년에 폐쇄되었다가 동독이 무너진 이후 다시 열리게 되어 통일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베를린에 왔다


베를린은 연합국이 점령한 서베를린과 소련이 점령한 동베를린으로 나뉘었고 동독 안에 있던 베를린은 동독에서 서베를린을 둘러싼 장벽을 둘렀는데 이것이 베를린 장벽이었다. 장벽은 1961년 8월 13일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3.6m가 넘는 높이의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100km 넘게 세워졌고 이 장벽이 세워지기 전에 350만 명의 동독인들이 국경을 탈출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11월 9일 모든 동독인은 서독과 서베를린을 방문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장벽의 철거는 1990년 6월 13일에 시작되어 1994년에 끝났다. 베를린 기념품 가게를 보면 이 장벽을 쪼개어 파편으로 팔고 있었다.


브란덴부르크문 근처에는 의사당이 자리 잡고 있는데 국가의회 의사당(Reichstagsgebäude)은 1894년에 완공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국이 해체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선포한 곳이었다. 음모론이 있으나 나치 독일 집권 직전 당시에는 공산당원의 방화가 있었으며 이후로는 의사당으로 쓰이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게 파괴되었으며 분단 당시 서독 위치에 있었으나 바로 옆에 베를린 장벽이 있어서 다시 하나가 될 독일을 기다리는 장소가 되었다. 서독의 수도는 본으로 지정되어 이 의사당 건물은 폐허처럼 변해갔다가 통일 이후 재건축을 거쳐 1999년 다시 의회가 열렸다.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쭉 뻗은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대로를 따라 걷는데 러시아 대사관 앞에 있는 평화 광장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련 피해 사실을 전시하고 있었다. 아직도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키고 있었다.



제대로 겨울 공기를 호흡하며 대로를 따라서 쭉 걸어오니 베를린 훔볼트 대학이 보였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Humboldt-Universität zu Berlin)는 베를린에 위치한 공립 대학으로서 1810년 프로이센 왕국의 교육 개혁가인 빌헬름 폰 훔볼트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대학은 12개의 학부로 구성되어 다양한 학문 성과를 이루고 있는데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노벨상 수상자 57명을 배출한 세계적인 명문 대학이라는 것이었다. 칼 마르크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 세계적인 학자들이 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가르쳤다. 뭔가 아이도 석학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눈부신 훔볼트 대학을 배경으로 선 아이


쭉 걸어가니 프리드리히 2세 동상을 지나 곧 슈프레강이 나타났다. 그건 박물관 섬에 왔다는 뜻이었다. 흔히 라인강의 기적으로 인해 베를린을 흐르는 강이 라인강인 하는 착각을 하지만 그건 옛 서독의 수도 본에 흐르는 강이고 베를린은 슈프레강이 흘렀다. 박물관 섬(Museumsinsel)은 섬(Island)이라는 명칭이 다소 이상하지만 슈프레 섬의 북쪽 끝에 위치한 5개의 박물관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곳은 199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슈프레강 위 박물관 섬


첫 번째 박물관인 알테스뮤제움(Altes Museum)은 1797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명으로 결정되었으며 1823년부터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로마 판테온 신전을 연상시키는 이 건물에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 유물, 예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보다 북쪽에는 노이에스뮤제움(Neues Museum)이 있는데 1843년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고대 이집트와 유럽의 선사시대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섬 중앙에 있는 옛 국립미술관(Alte Nationalgalerie)은 1867년부터 지어졌다. 여기에는 고전주의부터 인상주의, 초기 모더니즘까지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북서쪽에는 보데 박물관(Bode-Museum)이 있는데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1897년부터 지어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유명한 박물관은 페르가몬 박물관으로 독일의 박물관 하면 많이 연상하는 곳이기도 했다. 1910년부터 지어졌으며 바빌론의 성문이었던 이슈타르 문(Ishtar Gate) 등 현장 발굴된 거대한 유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유명했다. 현재 공사 중이라서 관람은 어려웠다.


이곳의 대장이라 할 수 있는 베를리너 돔은 감탄을 자아내는 위용을 드러냈다. 가장 큰 개신교 교회인 베를리너 돔(Berliner Dom)은 대성당이라고 불리지만,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성당이 아니고 루터 교회가 되었다가 칼뱅파 교회가 된 다음 현재는 프러시아 복음주의 교회로서 1450년에 완성되었다. 1905년 독일제국 황제였던 빌헬름 2세의 명으로 거대한 돔을 갖춘 모습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폭격을 받아 크게 파손되었지만, 복구되어 지금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복구 기간도 꽤 되어 1975년부터 2008년까지 복원을 했다. 지금도 고치는 곳이 있어서 부분적으로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다. 청동빛이 도는 거대한 돔과 화려한 벽면이지만 파손 전에는 더 화려했다고 하니 그 모습이 상상이 안 갔다. 프로이센 왕실로 유명한 호엔촐레른(Hohenzollern) 가문의 묘지를 겸하는 교회였기에 지금도 90개가 넘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관들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7,269개의 관으로 이루어진 파이프 오르간은 유럽 최대 오르간으로 유명했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같은 위용


돔 안에 있는 카페에서 나와 아내는 커피, 아이는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잠깐 쉼표를 찍었다. 뜨끈한 카페 라테가 목으로 넘어가니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 시간 정도 쉰 다음 알렉산더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날이 살짝 풀려서 걷기 좋은 온도가 되었다. 걷다 보니 멀리 텔레비전탑이 나왔다. 베를린 텔레비전탑(Berliner Fernsehturm)은 방송탑으로 높이 368m에 달해 독일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인데, 우리나라 남산 타워나 일본의 도쿄 타워 같은 포지션이었다. 1969년에 동독 정부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최초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모델로 디자인되었다. 타일 형식의 스테인리스 돔에 햇빛이 비치면 반사되는 빛이 십자가 형태라서 교황의 복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는 동베를린 교회에서 십자가를 철거한 동독 정부에 대한 신의 보복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송곳 같은 텔레비전탑


탑을 지나니 알렉산더 광장이 나타났다. 알렉산더 광장(Alexanderplatz)은 미테 지역의 중심지로서 지역 상인과 농부들의 시장이었던 곳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통치 당시 러시아 알렉산더 1세가 1805년 방문해서 이를 기념해 이름을 붙였다. 제1차 세계 대이 끝나고 1920년대 힘들었던 독일의 대공황 시기 베를린 모습을 쓴 알프레드 되블린의 소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잠시 출출해서 아내가 추천한 커리부어스트 가게에 가서 두 가지 소시지와 감자튀김을 주문해서 먹었다. 커리소스를 팍팍 묻혀서 먹으니 진한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베를린 명물 커리부어스트


광장의 랜드마크인 세계시간 시계는 1969년 10월 27일에 개장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세계 시계로 알려져 있다. 알렉산더 광장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가 10.6m, 지름이 10m에 달했다. 시계는 24개의 시간대를 나타내는 24개의 원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원반에는 해당 시간대의 도시 이름과 현재 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시계는 24시간마다 한 번씩 표시가 바뀌며, 12시 정각에는 모든 원반이 동시에 바뀌었다. 명성에 비해 생각보다 크거나 멋지게 보이지는 않아서 감탄을 자아내지는 못했다. 광장에서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알렉산더 광장의 세계시간 시계 앞에서


15분 정도 버스를 타고 도착한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는 1990년 9월 28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부터 105명의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명소였다. 길이가 1.3km에 달하는 장벽에 그려진 벽화는 자유, 평화, 사랑, 희망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가장 유명한 '형제의 키스'에서 우리도 사진을 남겼다. 이 작품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주네프가 1979년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에게 축하 입맞춤을 한 것을 그린 건데 양국의 우정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유명해서 벽화로 남겨졌다. 다시 버스를 타고 마지막 저녁 산책을 위해 베를린 전승 기념탑에서 내렸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베를린의 하늘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키스를 향한 3인 3포즈


베를린 전승 기념탑(Berliner Siegessäule)은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쭉 뻗어나간 도로 끝에 있었는데 화물연대 파업을 하는지 도로 가운데에 화물 트럭이 많이 있었다. 기념탑은 티어가르텐 공언에 위치하며 프로이센이 보오전쟁, 보불전쟁 등 유럽 국가들과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탑으로 빌헬름 1세가 1873년에 완성되었다. 본래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 있었지만 나치 독일이 게르마니아 수도 계획에 따라 현 위치로 옮긴 게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탑 꼭대기엔 승리의 여신상이 있으며 높이는 8.3m에 달했고, 전체 높이는 67m를 넘었다. 전체적으로 붉은빛이 감도는데 이는 붉은색 화강암을 썼기 때문이다. 탑의 4개 부분은 사암 블록인데 3개는 3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한 것이고, 4번째는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함락한 기념으로 금으로 장식한 것이다.


날아갈 듯한 승리의 여신


기념탑에서 브란덴부르크문까지 25분 정도 대로를 따라 걸어오니 멋진 조명이 켜진 문을 만날 수 있었다. 벌써 어둑해진 밤이 되면서 베를린의 야경을 두 눈에 담았다. 숙소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데 오늘 2만 보 걷기를 약속했기 때문에 다들 열심히 걸어왔다. 저녁 식사로는 닭다리 스테이크, 풍기 파스타, 샐러드로 와인과 함께 즐겼다. 아이가 무척 먹고 싶어 한 닭다리는 내 손바닥만 했는데 7개를 삶고 껍질을 벗기고 양념 시즈닝을 해서 다시 팬에 구워냈다. 제대로 즐긴 베를린 나들이여서 다들 만족스럽게 밤을 만끽했다.


깊어가는 베를린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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