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스칼 Jan 28. 2024

동유럽의 보석, 프라하

2024년 1월 12일(금)(9일째)-베를린에서 프라하

지도를 보며 프라하에 도착해서 어떻게 다닐지 동선을 생각하다가 생각보다 늦게 잠을 청했다. 오전 6시에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일어나 베를린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고 짐 정리를 했다. 쓰레기 청소며 기본적인 확인을 하고 8시에 예약한 택시가 와서 30분을 달려 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아침 출근 시간일 텐데 서울 같은 대도시 베를린에서 도로가 제대로 막힌 적을 못 본 것이 낯설었다. 그러고 보면 베를린을 돌아다닐 때 차가 밀린다는 경험을 한 적이 없어서 신기했다. 그리고 전쟁 이후 복구되어 그러겠지만 보행로도 넓어서 걷기 좋은 도시라 느껴졌다. 이런 느낌은 독일에서 돌아다녔던 도시들에게서 전반적으로 느껴졌다.


버스 정류장은 행선지가 많은지 플랫폼은 많았지만, 건물 자체는 흔한 기차역보다 훨씬 작고 우리나라 중소도시 터미널보다도 작아 보여서 유럽이 철도문화라는 게 실감 났다. 27번 플랫폼에서 조금 기다리니 우리를 프라하로 데려다 줄 2층 대형 버스가 왔다. 철도 파업으로 갑작스럽게 바뀐 이동이지만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기는 처음이라 기대가 되었다. 항공이 아닌 육로로 국경을 넘는 건 예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벨기에 브뤼셀까지 기차로 이동한 적 이후 두 번째였다.


플랫폼만 많은 버스 터미널
독일에서 체코로 출발


버스는 달리고 달려서 체코 국경 인근에 있는 드레스덴에서 잠시 정차했다. 드레스덴은 프라하와 가깝고 관광 문화 자원이 풍부해서 프라하와 묶여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도시 자체가 파괴되어 복구된 곳이고 우리는 다른 독일 도시들보다 방문할 매력을 느끼지는 못해서 넘어간 곳이었다. 잠깐 정차할 때 휴게소를 들리거나 하는 건 아니고 드레스덴 정류장에서 프라하 가는 사람들만 태워 갔다. 드레스덴에서 넘어가니 곧 체코로 진입해 버스는 달리고 있었다. 산발적으로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날이 흐려서 제대로 여행 기분을 만끽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체코로 넘어가니 갑자기 핸드폰 인터넷이 안되었는데 전원을 다시 껐다 켜니 되었다. 창밖으로 경치를 보려는데 뿌연 하늘만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 정차한 드레스덴


4시간 넘게 도로를 달려 드디어 프라하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프라하(Praha)는 동유럽의 보석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로 작은 나라 체코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인구가 127만 명이 넘는 대도시였으나 주로 둘러보는 곳은 구시가지여서 그리 크게안 느껴졌다. 체코는 국가적으로 GDP가 우리나라와 엇비슷한 정도인데 물가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지는 국가라서 유럽 여행하기에 좋은 국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다녀보니 코로나 19 이후로 이곳도 물가가 꽤 오른 듯했다. 각 도시마다 가로지르는 강이나 하천이 있는 것처럼 프라하는 블타바강이 아름다운 도심을 가로질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폭격 피해가 거의 없어서 중세 유럽을 잘 보존한 지역으로 인기가 매우 높다. 인근 국가인 폴란드 바르샤바, 독일 베를린 등은 전쟁의 참화로 복구된 모습을 현재 많이 보는데 프라하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경우가 많아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도시였다.


프라하 도착


역사를 보면 9세기에 도시가 형성되어 프라하 성이 축조되었고 1085년 보헤미아 공국의 수도가 된 프라하는 14세기 카렐 4세 즉위 후 1346년에는 룩셈부르크 왕조가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렇게 번영을 구가하던 프라하였지만, 1378년 체코가 낳은 개혁가 얀 후스로 인해 후스 전쟁의 한복판에서 큰 전란을 겪기도 했다. 그 이후 보헤미아 왕위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가면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주요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현대사에서는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이후 1968년 프라하의 봄 사건으로 냉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1993년에는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어 체코 공화국의 수도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세 시대의 고딕 건축부터 이후 바로크 건축까지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겨 있는 도시로서 작은 파리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20분을 지도를 보며 부지런히 걸은 결과 화약탑이 눈에 들어왔다. 화약탑(Prašná brána)은 1475년 지금의 올드 타운을 지키는 13개 성문 중 하나로 대포 요새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심 한가운데 있어서 낯선 느낌이 들었다. 루돌프 2세가 통치하던 17세기 초에 연금술사들의 화약 창고와 연구실로 쓰이면서 화약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소 음산한 느낌이 드는 건 어두운 색의 외관 때문인 듯했다. 마치 관문처럼 이걸 보니 비로소 체코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온 북적이는 개별 여행객, 단체 관광객들을 보니 독일에서 보냈던 오붓한 구경은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시간 버스 이동 후 기쁨 표현


호텔은 바로 근처여서 금방 도착해 체크 인을 했다. 친절한 안내 데스크가 주변 맛집까지 추천해 주었다. 오래된 로컬 호텔이어서 객실 분위기부터가 체인 호텔들과 달랐다. 세면대 물도 돌리는 손잡이였고, 방도 우리가 쓰기에는 넓어 보였다. 옛 유럽 감성이 묻어나는 객실이었다. 짐을 풀고 오후에는 오전에 버스에서 보낸 시간을 만회하듯 부지런히 걸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발소리가 따각거리는 거리를 걸으니 독일의 여느 거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첫 번째로 방문할 성 야고보 성당으로 가는 길에 체코 전통 간식인 굴뚝빵 뜨레들로(Trdlo) 가게가 있어서 점심도 못 먹고 돌아다녀야 하니 뭐라도 먹으면서 걸어야겠다 싶어서 아이스크림을 넣은 뜨레들로 2개와 카페라테를 사서 걸어 다녔다.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 뜨레들로


성 야고보 성당(Kostel svatého Jakuba Většího)은 12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고딕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성당의 외관은 고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파사드는 성 야고보의 생애를 주제로 한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다. 본당은 90m 길이와 20m 너비로, 프라하에서 가장 큰 본당 중 하나로서 천장은 복잡한 격자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화려한 색채로 성당 내부를 밝히고 있다. 이곳은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성 야고보 성당과 더불어 기독교의 중요한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유명한 성당들과 달리 인지도가 낮아서 사람도 거의 없고, 둘러보기에 너무 좋았다.


침묵할 수 있는 성당


구 시청 광장 쪽으로 걸어오니 틴 성모 마리아 교회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틴 성모 마리아 교회(Chrám Matky Boží před Týnem)는 1365년에 지어졌으며, 랜드마크 중 하나였다. 첨탑의 높이가 80m에 달하며 첨탑에는 후스파의 상징인 황금 성배가 있었지만, 현재는 성모 마리아의 후광을 비추는 장식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 내부는 화려한 고딕 양식의 장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천장에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주요 제단에는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을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사진 촬영은 불가라서 눈에 익히는데 만족했다. 이곳은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는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를 따르는 후스파의 중심지였으며, 19세기에는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620년에는 이곳에서 후스파의 지도자 얀 후스의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온갖 나라 사람들로 북적이는 광장에서
체코는 얀 후스의 나라


마침 정각이 되기 직전이어서 우리는 부리나케 천문시계 쪽으로 갔다. 이미 많은 사람이 12 사도 모형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구 시청사 천문시계(Pražský orloj)는 1410년 시계공 미쿨라시와 얀 신델이 제작했는데, 외부 대형 시계로 세계에서 3번째로 오래된 천문 시계이면서 현재까지 작동하는 천문 시계로 알려져 있다. 구 시청 남쪽에 설치되어 있으며 3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천문 눈금판으로 태양, 달의 위치와 천문 정보를 담고 있다. 두 번째는 사도들의 행진으로 제일 유명한 부분인데 매시간마다 12 사도의 모형과 죽음을 모티브로 한 해골 모형이 움직였다. 세 번째는 달력 눈금으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해골 모형이 움직이지 않아서 조금 아쉽기는 했다.


놀라운 당시 공학기술


북적이는 광장을 지나서 이디움 인스틸레이션(Idiom Installation)을 보기 위해 갔다. 신 시청사 건너편 건물에 있었는데 수백 권의 책을 원통형으로 쌓아 만든 구조물로써 책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며, 마치 무한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지식의 무한함과 다양성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책은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는 매개체로서 이러한 책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거대한 지식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책의 다양한 색깔은 지식의 다양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데 재미있는 구조물이라 많은 이들이 사진을 찍었다.


인간이 쌓아 올린 지식


근처에 있는 클레멘티눔(Klementinum)은 체코 국립 도서관이 있는 곳으로 오래전부터 지식의 산실로 자리 잡은 곳이었다. 프라하 성 다음으로 큰 건물 단지로 인류가 모은 지식의 위대함을 만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유네스코 직지상을 2005년에 수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나가니 프라하의 명소들이 구시가지에 집약되어 있어서 도시 규모에 비해 작게 느껴지는구나 싶었다. 클레멘티눔을 통과하면 바로 카를교(Karlův most)가 나오고 그걸 보여주는 다리 탑이 먼저 우리를 반겨주었다. 구시가지 다리 탑(Staroměstská mostecká věž)은 프라하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 카를교 앞에 자리한 고딕 양식의 타워로 잘 보존된 프라하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 도시에 오면 이곳에 올라 카를교와 프라하성을 비롯한 도시를 내려다보고, 특히 해가 진 후 어둠이 깔리면 불빛이 반짝이는 야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카를교 건너기 전


다리가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여러 동상이 세워져 있기 때문인데 1683년에 세워진 성 얀 네포무츠키의 동상은 체코의 수호성인으로 많은 이가 복을 빌기 위해 찾아왔다. 6번째와 7번째 기둥 사이에는 십자가가 있는데  네포무츠키가 1393년 보헤미아 왕 벤체슬라우스의 명령에 따라 블타바 강에 던져진 순교 자리를 표시했다. 왕이 왕비의 불륜을 의심해 얀에게 고해성사 내용을 물었지만 말하지 않은 그의 혀를 뽑아서 강에 던졌다. 석상 아래 동판에는 그 모습을 재현한 모습이 있는데 이를 만지면 다시 프라하에 온다는 속설이 있어서 반질반질해다. 1741년까지 블타바 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이자 지금도 프라하의 중심 거리로 그때를 추억하고 지금을 기억했다.  


카를교에서 만난 중세
성 얀 네포무츠키 동상
다시 오게 해주세요


처음에는 어차피 내일 지나가야 하니 카를교를 건널 생각이 없었지만, 왔으니 카를교를 걸으며 다른 여행객들처럼 우리도 프라하에 왔다는 신고식을 했다. 삼삼오오 혹은 혼자 와서 카를교를 거니는 사람들 중에 진짜 체코 사람, 프라하 사람은 몇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카를교를 완전히 건너지는 않고 되돌아와서 아이가 그토록 원한 레고 박물관으로 갔다. 아이를 키우니 여행 와서 이렇게 아이가 원하는 곳도 가는 게 우리 여행이었다. 가는 길에 매달린 지그문트 프로이트 동상(Socha zavěšeného Sigmunda Freuda "Viselec")이 거리 위에 매달려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조각가 데이비드 체르니의 작품으로 2001년 5월에 설치된 이 동상은 높이 2.1m의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프로이트가 양복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무게도 상당할 텐데 떨어질까 보면서도 조마조마했다. 프로이트의 얼굴은 표정이 없으며, 한 손으로 막대기를 잡고 있고,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으며, 프로이트의 발은 공중에 떠 있는 자세였다. 이 동상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역사적으로 프라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였으며,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떨어질까 조마조마


매달린 동상 바로 근처에 있는 하벨시장(Havelské tržiště)은 우리가 묵는 호텔 바로 근처이고 구시가지 광장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시장으로 1232년부터 개시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시장이었다. 주로 과일, 식재료, 기념품 등을 판매해서 현지인뿐만 아니라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 시장으로 이곳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좋아 보였는데 날이 쌀쌀해서 그런지 기념품 파는 곳만 많고 음식 파는 건 거의 안 보여서 아쉬웠다.


한산했던 하벨시장


그리고 아이가 고대하던 레고 박물관은 지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시리즈 별로 레고가 나름 알차게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 보면서 나도 만족스러웠는데, 아이만큼 나흥분하게 된 건 지금은 단종된 레고가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캐슬, 해적, 우주 시리즈 등 내가 어린 시절 사고 싶었지만 사지 못했던 레고들이 쭉 있었던 것으로 입에서는 감탄을 연발하며 한시도 눈을 가만둘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이보다 나를 위한 장소가 된 듯했다. 하늘에 걸린 노을의 미소처럼 얼굴에 미소를 짓고 나온 우리는 어느덧 어둑해진 거리를 따라서 마지막으로 댄싱 하우스를 보러 갔다.


두근거렸던 레고 타임


프라하 댄싱하우스(Dancing House)는 모습이 말 그대로 춤추는 듯한 해체주의 건축물로서 1996년에 완공되었으며,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와 체코의 건축가 블라도 밀루닉이 공동으로 설계했다. 두 개의 타워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유연한 형태의 타워이고, 다른 것은 콘크리트와 유리로 이루어진 단단한 형태의 타워였다. 춤추는 커플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프레드와 진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밝을 때 봤으면 더 좋았겠지만 저녁에 보는 것도 나름 매력이 있었다.


야밤의 댄스


프라하의 첫 저녁 식사는 아내가 찾아놓은 코젤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Kozlovna U Paukerta)을 갔다. 체코는 독일, 벨기에 못지않게 맥주 강국이고 내가 알기로는 1인당 소비량이 세계 1위라고 했다. 그리고 미국 버드 와이저 명칭 원조가 체코라고 하니 그 맥주 맛이 얼마나 대단할지 궁금했다. 클래식 라거, 다크, 마스터 비어 등 다양하게 주문해서 마시는데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도 어떻게 이렇게 시원하고 목으로 청량하게 넘어가는지 궁금할 정도의 맛이었다. 식사로 주문한 꼴레, 굴라쉬, 스파이시 윙 중에서 꼴레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먹었던 학센과 매우 비슷한데 이것도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서 맛있었다. 굴라쉬는 나라마다 편차가 있는지 내가 예전에 러시아에서 먹었던 것과 다른 요리 같았는데 맛 자체는 좋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 분위기를 즐긴 듯했다. 코젤 맥주 한 모금이 여기가 체코 프라하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체코 맥주
꼴레노와 굴라쉬


어느덧 깜깜해진 거리로 나와서 아내와 아이, 나는 불어오는 바람마저 포근한 카를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프라하의 첫날을 마무리했다. 항상 같이 있는데 또 이렇게 여행 와서 함께 걸으며 또 할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이 여행이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해 줬다. 서로 손을 잡고 가로등 켜진 좁은 길을 구불구불 따라 걸어가며 우리의 여행도 이렇게 기억되었다.


프라하의 밤






매거진의 이전글 포츠담&브란덴부르크의 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