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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칼 Jan 28. 2024

Time travel to the Middle Ages

2024년 1월 13일(토)(10일째)-프라하

숙취로 인해 조금은 힘들게 아침을 시작했다. 그래도 뚜벅이 여행은 시간이 금이기 때문에 기지개 한 번 펴고 준비한 다음 호텔 조식을 먹으러 1층으로 갔다. 여행 비수기라서 그런지 홀이 붐비지 않아서 좋았다. 독일보다 정성이 더해진 조식 메뉴에 감동하며 배불리 먹었다. 아이는 와플 만드는 기계가 없어서 아쉬워했지만, 와플이 있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하루는 프라하 시가지를 둘러보는 일정이기 때문에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들 풀 충전해서 호텔을 나섰다. 시가지에서 가장 먼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트램을 타고 블타바강을 넘어서 쭉 올라갔다. 블타바강을 중심으로 원을 그렸을 때 수도원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들 중에서 가장 멀었기 때문에 트램을 타고 가며 프라하의 아침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오늘 일정의 첫 시작


스트라호프 수도원(Strahovský klášter)에 도착해 우리는 전체를 다 보지는 않고, 가장 보고 싶었던 도서관 들어가는 티켓만 발권했다. 이 수도원은 프라하의 젖줄인 블타바강 맞은편 언덕에 위치한 프라하 성 인근에 있으며 1140년에 건립되었다가 전쟁과 화재 등으로 파괴되었다가 지금은 18세기에 복원한 모습이라고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화되면서 폐쇄되었다가 다시 민주화가 되면서 수도원의 역할을 찾았다. 수도원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가 유명하지만 그것보다 도서관에는 총 14만 권의 도서가 있는데 종류에 따라서 이름을 지은 방들이 있으며 내부가 무척 화려하면서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들어가서 방을 보자마자 여타 도서관과는 다르다는 것이 확 느껴졌다. 신학의 방은 꿈꾸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철학의 방은 거대한 지식의 보고 같았다. 신학의 방에 있는 책들이 상당히 두껍고 오래되어 안내원에게 양피지로 만들어진 건지 물어보니 그렇다고 해서 안에 내용물은 관리가 잘 되는지 궁금했다. 철학의 방은 예전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보았던 북 오브 켈스(The Book of Kells)가 떠오르며 아득한 지식의 보고를 쌓아 올리기 위해 노력한 인류의 고뇌가 느껴졌다.


신학의 방과 철학의 방


밑으로 내려와 도착한 로레타 성당(Loreta)은 1626년 카테리나 로브코비츠 남작 부인에 의해서 세워진 성당으로 얀 후스의 종교 개혁으로 인해 구교(천주교)와 신교(개신교)의 대립이 격화되자 구교도의 승리를 기원하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성당 정면의 탑 안에 있는 27개의 종을 로레타의 종이라 부르는데 매 정각에 성모 마리아를 찬송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가 갔을 때에도 종소리가 울려서 그 소리를 귀에 담을 수 있었다.


종소리가 아름다운 성당


프라하성으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흐라드찬스케 광장(Hradčanské náměstí)은 13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광장에는 여러 개의 궁전과 교회가 있으며, 프라하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건축물이 모여 있다. 광장의 중심에는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이 있으며, 프라하 구시가지의 유명한 유적지가 몰려있기에 꼭 지나치는 곳이기도 했다. 우리는 처음에 이곳에서 프라하 전경이 보이는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광장을 지나가니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고 성 비투스 대성당의 첨탑이 크게 보일 때쯤 프라하 전경도 함께 눈앞에 펼쳐졌다.


탁 트린 프라하 전경


우리는 프라하성 구역으로 들어와서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성 비투스 대성당과 옛 왕궁, 황금 소로 등을 갈 수 있는 티켓을 발권했다. 성 안으로 들어오니 이미 많은 단체 관광객, 여행객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 있었다. 비수기에 이러면 성수기에는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안 갔다. 프라하는 파리, 로마, 바르셀로나에 버금가는 관광 도시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프라하 성(Prazsky hrad)은 많은 성이 즐비한 유럽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성이었다. 9세기말부터 건축되어 카를 4세가 통치하던 14세기에 지금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다. 블타바 강 맞은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로브코위츠 궁전 외에 성 비투스 대성당, 성 십자가 교회 등 많은 부속건물이 함께 하고 있다. 고딕 양식이 정립되기 전에 건설되어 처음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지다가 13세기 중반에 고딕 양식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1526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곳을 지배하면서 르네상스 양식이 가미되었다가 1753년부터 1775년 사이에는 바로크 양식이 혼합되어 지금같이 모습이 되었다. 체코는 공화국이 된 지 오래였지만 근위병이 지키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부동자세


가장 중요한 성 비투스 대성당(Katedrála svatého Víta)은 첫인상으로 노트르담 대성당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천주교 대주교좌 성당으로 체코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성당으로 손꼽혔다. 여러 체코 국왕과 성인, 영주, 귀족, 대주교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으며 프라하에 왔으면 꼭 들리는 곳 중 하나였다. 시작은 925년 벤체슬라우스 공작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받은 성 비투스의 팔을 보관하기 위해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1344년 카를 4세 때 짓기 시작해서 1929년에 완공된 오랜 건축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딕 양식 등이 혼재되어 지금과 같인 모습을 만들어 냈다. 천장 높이 33m, 첨탑 높이 100m에 이르는 굉장히 거대한 성당이었다. 건축적으로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체코가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알폰스 무하가 제작한 아르누보 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었다. 카를교에서 보았던 성 네포무츠키의 무덤이 이 성당 안에 있어서 그것도 유심히 보았다. 일일이 사진을 찍으며 보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장소였다. 나와서 화장실이 굉장히 급했는데 마침 아이가 1유로를 가지고 있어서 덕분에 쉽게 볼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입장권까지 끊고 들어왔는데 정작 화장실을 유료로 쓰게 하다니 조금 이해가 가질 않았다. 후련해진 몸으로 이어서 우리는 카를 4세의 뜻을 반영해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된 옛 왕궁을 둘러보고, 황금 소로로 향했다.


명화같은 스테인드글라스
화려하고 엄숙한 성당 내부
성 네포무츠키의 무덤
성 비투스 대성당을 본 감격
생각보다 크지 않은 옛 왕궁


황금 소로는 건물이 아니지만 길을 막아 지하철 개찰구처럼 표를 찍고 들어갈 수 있게 해 놨다. 황금 소로(Zlata ulicka)는 영어로 'Golden lane'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16세기 후반부터 연금술사와 그 은세공사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그리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프라하 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막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했다. 작은 골목길로 양쪽에는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어서 정감 있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작가 카프카때문인데,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1961년 11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여동생이 마련해 준 이 골목 22번지 집에서 매일 글을 썼으며, 프라하 성에서 모티브를 타서 지은 작품 '성(城)'도 이때 완성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거리가 크진 않았지만 그때 생활상을 알아볼 수 있어서 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정말 골목길 같던 황금 소로와 파란 카프카의 집


우리는 프라하 전경을 바라보며 시가지로 내려왔다. 정상에서 봤을 때도 멋졌지만, 내려와서 보는 프라하도 낭만이 있었다.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이곳에 온 기쁨을 말하고 있었다. 시가지로 내려와서는 성 삼위일체 기둥과 성 니콜라스 성당까지 걸어갔다. 프라하 성 삼위일체 기둥(Morový sloup Nejsvĕtĕjší Trojice)은 바로크 양식의 기념물로써 1715년 요한 바티스타 알리프란디가 설계하고 건설했다. 1713년부터 1715년까지 프라하를 휩쓴 흑사병을 종식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다. 바로 옆에 있는 성 니콜라스 성당(Kostel Sv. Mikulase)은 그전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어 1704년부터 짓기 시작해 1755년에 완성된 다른 유서 깊은 성당과 비교했을 때 적은 건축 기간을 보인 성당이었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첨탑 높이는 80m였다. 본당 천장에는 우리에게 산타클로스로 잘 알려진 성 니콜라스를 주제로 한 대형 프레스코화가 있는데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고 했다. 모차르트가 자주 방문해서 오르간 연주를 한 곳이기도 하고, 1791년 12월 그가 사망했을 때 추모미사가 열린 곳이기도 했다. 1787년 모차르트가 연주한 오르간이 남아있다.


내려올수록 낭만이 짙어지는 프라하
성 삼위일체 기둥과 성 니콜라스 성당
낭만을 싣고 가는 노면 전차


노면 전차가 다니는 정감 있는 거리를 거닐면서 분위기에 흠뻑 빠져보았다. 곳곳에 성당이 참 많았는데 성 비투스 대성당과 더불어 꼭 가보고 싶었던 승리의 성모 성당에 다 달았다. 승리의 성모 마리아 성당(Kostel Panny Marie Vítězné)은 1278년에 처음 건설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1704년부터 1755년까지 다시 지어졌다. 바로크 양식이며 첨탑의 높이는 80m에 달했다. 본당 천장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인 어린이들의 수호성인인 성 니콜라스를 찬양하는 대형 프레스코화가 있다. 그리고 특히 유명한 아기 예수상이 있는데 이는 1560년대에 만들어졌으며,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생각보다 조용하고 사람들이 없어서 좋았다. 프라하에 오게 되면 꼭 오고 싶은 성당이었기에 천천히 둘러보았다.

                                                                         

승리의 성모 마리아 성당 내부
기도하는 아이


프라하의 아기 예수는 승리의 성모 성당에 있는 유명한 아기 예수 상으로 나무로 조각되었으며 크기는 60cm 정도로 그리 크지 않다. 처음 봤을 때 조금 멀리 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작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도 아기 예수가 여기까지 오게 된 역사를 알고 있기에 결코 위용은 작지 않았다. 3살 정도 아기 모습에 거대한 왕관을 머리에 쓰고 있으며 값비싼 대관식 외투를 입고 있다. 왼손에는 십자가가 달린 지구의가 있고 오른손은 축복을 주는 것처럼 위로 들고 있다. 스페인의 과달키비르 지역에서 발현한 아기 예수는 한 수사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모습을 만들었고, 후에 그곳의 귀족이 보헤미아 지역 영주와 혼인하면서 이 지역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도 함께 바라보며 기도하고 축복을 빌었다. 아기 예수가 입는 제의는 때때로 다른데 그걸 전시한 박물관이 성당 위층에 있었다. 나오는 길에 성물방에서 선물을 사며 이때의 감동을 기억하며 추억하기로 했다.



성당을 나와서 잠시 지친 다리를 쉬어가게 하기 위해 카페에 들러 카페 라테, 플랫 화이트, 핫 초콜릿과 케이크를 먹으며 숨 고르기를 가졌다. 1시간 정도 쉬었다가 다시 승리의 성모 성당으로 갔다. 아까 산 성물을 신부님께 축복받기 위해서 인상 좋은 수녀님께 물어봤는데 부재중이어서 시간에 맞춰 다시 방문한 것이었다. 마침 계셔서 한국에서 왔다고 여쭙고 축복을 말하니 흔쾌히 우리 모두 성수로 축복을 받고 아기 예수 상을 들고 사진을 찍는 영광을 누렸다. 따뜻한 환대에 감동하고 성당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어둑해질 때쯤 마지막 찾아갈 장소인 레논 벽으로 갔다.


프라하의 아기 예수 상과 함께


레논 벽(Lennonova zeď)에는 몇 사람만 있고 한산했다. 천주교 성당과 광장을 구분하기 위해 세워진 벽으로 1980년 비틀스의 존 레넌이 암살당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의 화가와 음악가들이 벽에 초상화와 노래 가사를 그리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평화와 투쟁으로 꾸며졌고 1989년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학생 시위대들이 모이는 장소로 유명세를 탔다. 공산당은 이 벽을 철거하려 했지만 시민들의 반대로 철거하지 못했고 지금은 여행객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여기서도 그렇고 나에게 사진 찍어달라는 외국인들이 종종 있었는데 진심을 다해 찍는 한국인의 DNA를 발휘하며 찍으니 다들 감탄하며 프로 같다며 칭찬했다. 내려가는 길에 보랏빛으로 물든 거리가 너무 아름답고 몽화적이어서 아내를 사진 찍어줬더니 아이가 자기도 찍어주겠다며 나와 아내를 함께 서보라고 하고는 조약돌 같은 손으로 찍어줬다. 


Imagine all the people
보랏빛 세상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카를교를 거닐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내는 이곳을 무척이나 마음 들어했다. 아내는 이번 여행에서 베스트를 꼽자면 단연 프라하, 카를교를 말할 것 같았다. 카를교(Karlův Most)는 파리의 알렉상드르 3세 다리만큼이나 화려하지는 않아도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다리가 아닐까 싶었다. 체코의 유수한 건축은 거의 다 손댔을 만큼 유명한 카를 4세가 유디트 다리를 대체하기 위해서 만든 다리로서 성 비투스 대성당을 설계한 독일인 페테르 파를러가 1357년에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프라하에 도착한 여행객이라면 다른 곳은 안 가더라도 이곳은 꼭 가서 인증 사진을 남길 만큼 유명해서 항상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동화같은 프라하 카를교에서

                                                                                 
카를교를 건너지 않고 전망 탑 끝까지 갔다가 다시 블타바강 서쪽 구역으로 돌아와서는 생각해 둔 레스토랑에서 프라하의 마지막 저녁 만찬을 즐겼다. 먼저 아내는 필스너 우르겔 맥주, 아이는 아이스 복숭아 티를 주문했고, 나는 체코의 국민 콜라인 코폴라(Kofola)를 시켰다. 코폴라는 옛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에 만들어진 콜라로 허브와 과일 등을 섞어 만들었다. 맛은 콜라와 꽤 다른데 콜라에 시럽 약을 탄 맛이 났다. 식사 메뉴는 훈제 혀 요리, 빵에 담긴 소고기 굴라쉬, 꼴레노를 시켜서 어제만큼 푸짐하게 즐겼다. 굴라쉬는 사실 그만 먹고 싶어서 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영어 메뉴로 보았을 때 주문한 소고기 수프가 굴라쉬였다. 그래도 맛은 나쁘지 않고 촉촉한 빵과 어우러져 맛있었다. 굴라쉬도 먹기에 많았는데 꼴레노의 크기가 엄청나서 먹기에 다소 버거울 정도였다. 배는 너무 불렀으나 음식은 모두 맛있고, 종업원도 친절해서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가 마지막으로 뜨레들로를 먹고 싶다고 해서 오리지널로 하나 샀다. 우리는 별들이 반짝이는 체코의 북적이는 밤에 뜨레들로를 돌돌 뜯으며 달콤한 중세 거리를 걸었다. 


아이 손보다 큰 꼴레노
맛으로 기억될 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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