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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칼 Jan 28. 2024

 Sbohem, Praha!

2024년 1월 14일(일)(11일째)-프라하에서 빈

프라하를 떠나는 날이면서 일요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미사 참례를 하기 위해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성당으로 갔다. 아침 미사를 위해 간 곳은 천주교 성당인 성 하벨 교회(Kostel sv. Havla)로서 이곳은 12세기 체코의 수도원 수도사들이 지은 교회로서 1679년부터 1704년까지 바로크 양식으로 개보수를 하였다. 미사 시간은 8시 30분이라 생각보다 일찍 시작했는데, 작은 성당이고 주변에 워낙 성당이 많다 보니 출석 신자가 많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오붓한 분위기에 더 좋았던 것 같다. 체코어로 진행되어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만 전 세계 천주교 미사 전례 순서가 거의 비슷하고, 미사 강론 내용은 동일해서 순서를 따라 가는데 어렵지 않았다. 복사 아이들이 많아서 좋았고,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봤던 신부님처럼 이곳 신부님 풍채와 미소가 좋아 보여 인상 깊었다. 가기 전에 축복을 청하고 우리 여행 일정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짧은 시간이지만 다른 신자들도 정말 따뜻하게 맞이해 줘서 프라하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좋아졌다.


아담하지만 화려한 성당 내부
후반전 여행을 축복받은 후


호텔 체크 아웃을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카를교를 향해 아침 산책을 했다. 프라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도시였다. 걷고 있자니 오늘이 이틀 전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은 체코를 떠나 우리는 여행 후반전의 시작인 오스트리아로 떠날 준비를 했다. 이번 동유럽 여행이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였는데 딱 중간에 해당되는 기간이 체코 일정이었다. 체코를 떠나는 아쉬움과 여행 전반전이 끝났다는 아쉬움까지 더해져 멀어지는 블타바강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캐리어를 끌고 바츨라프 광장으로 가니 또 다른 프라하의 모습이 펼쳐졌다. 우리는 구시가지 중심으로 있어서 격동의 근현대사에 중심지였던 바츨라프 광장을 이제야 만나게 되었다. 바츨라프 광장(Václavské náměstí)은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시위대와 진압군이 충돌하여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장소였다. 하지만 1989년 수 십만의 시민들이 모여 결국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 정권이 몰락하는 벨벳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안녕 프라하


우리는 광장을 지나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 중앙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서 기다리니 얼마 안 되어 기차가 도착했다. 프라하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데 2시간쯤 갔을 때 갑자기 기차가 예정되지 않게 정차해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제대로 못 들었을 수도 있지만 역무원의 영어 안내가 없어서 우왕좌왕하며 내렸는데 기차가 고장 났다고 한 것도 같고, 어쨌든 외국인 아주머니가 영어로 다른 플랫폼 가서 타야 한다고 친절하게 알려줘서 이동해서 탔다. 색다른 경험이지만 아는 사람 없이 혼자였다면 굉장히 당황했을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선로 변경 때문에 열차를 갈아탄 것이었다. 


우리가 탈 기차 플랫폼 확인
어리둥절하게 선로 변경


드넓은 평원을 지나고 지나서 장장 4시간을 넘겨 드디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도착했다. 중간에 갈아 탄 것 때문에 20분 늦게 우리는 기차에서 내렸다. 이미 주위는 깜깜해지고 밤이 되었다. 일반 마트는 일요일이라 영업을 하지 않아서 역 내에 있는 마트에서 오늘 저녁 식사와 내일 아침 식사할 것만 간단하게 샀다. 숙소까지 캐리어를 끌고 가는데 자잘한 돌길이 아니라 콘크리트 길이어서 끌기에 좋았다. 빈에서의 숙소는 호텔이 아니라 현지 숙소로 지금까지 묵었던 그 어떤 곳보다 최소 3배는 넓어 보였다. 돌아다니다 보니 너무 커서 낯설을 정도였다.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식사로 소고기 스테이크, 독일에서 가져온 소시지 구이, 뇨끼 파스타와 샴페인으로 빈에서 시작할 여행 후반전을 자축했다.


지나가는 광활한 평원
오스트리아 도착


빈(Wien)은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 수도로서 명성이 드높았던 파리만큼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 수도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이기에 파리만큼 유럽 역사에서 빛나는 도시 중 하나였다. 파리가 예술 중에서 미술의 도시라면 빈은 음악의 도시이기도 했다. 과하게 말하자면 클래식 음악의 수도가 아닐까 싶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 요한 슈트라우스 등 기라성 같은 클래식 음악가들이 살았고, 연주했고, 숨 쉬었던 도시이기 때문이다. 인구는 200만 명 정도로 우리에겐 그리 크지 않은 도시지만, 인구가 적은 유럽의 도시 특성상 거대 도시로 볼 수 있는 규모였다. 현재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EU에서는 5번째로 인구가 많다. 세계 도시 지표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항상 꼽히는데 치안, 교육, 환경, 문화, 교통 등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빈의 느낌은 참 화려하고 그래서 다가가기 어려운 귀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 화려한 역사가 쌓여있기 때문인 듯했다.


사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작은 영주 가문에서 시작해서 정복 활동보다는 혼인 정책을 통해 나라와 가문 규모를 키워왔기에 실상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위대하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 예술 수준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향유하고, 보존하고 있어서 그 정도면 충분히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침략으로 점령당했지만, 그의 몰락 후 빈 체제에서는 유럽의 수도 역할을 했었다. 중세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번영을 구가했지만 20세기 들어서는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서 오스트리아는 결국 나치 독일에 합병당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전쟁 이후에는 제국에서 일개 작은 국가가 돼버린 오스트리아는 1955년에 영세 중립국 선언을 하게 되고 빈은 국제 외교의 무대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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