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Ciudad de México

2026년 2월 3일(화) 멕시코시티

by 오스칼

이번 여행에서는 이상하게도 숙소의 난방이 늘 아쉬웠다. 덕분에 등이 시려지는 걸 느끼는 매일 새벽 4시나 5시쯤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다시 잠들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결국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했다. 피로가 쌓이기는 했지만, 먼저 깨어나는 기분은 한 발 앞서 하루를 시작한다는 감각은 여행에서만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호텔 방 안에는 간단한 조리가 가능한 시설이 있어서 프라이팬에 달걀을 굽고, 망고와 사과를 깎아 접시에 올렸다. 오트 우유와 주스를 곁들여 소박한 아침 식사를 차렸다.


분주하면서 느긋한 아침


어제는 일정이 꼬여 보지 못했던 도서관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에, 평소보다 조금 일찍 거리로 나섰다. 막 출근을 준비하는 사람들, 길모퉁이 노점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사이로 우리도 조용히 섞여 들었다. 멕시코시티의 아침은 분주했지만, 어딘가 느긋한 리듬을 품고 있었다.


혁명기념비


첫 목적지는 혁명 기념비(Monumento a la Revolución)였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거대한 구조물이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끌어당겼다. 이 기념비는 멕시코 혁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로서, 원래는 국회의사당으로 계획되었다가 혁명 이후 기념비로 용도가 바뀐 독특한 역사를 지녔다. 거대한 돔과 육중한 기둥은 권력과 민중, 좌절과 재탄생의 역사를 동시에 상징하는 듯했다. 광장 한가운데 우뚝 선 기념비 앞에 서자, 이 나라가 겪어온 격변의 시간이 압축되어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시청에 있는 멕시코 독수리


기념비를 뒤로하고 바스콘셀로스 도서관을 향해 걷다가, 가는 길에 시청 광장 부근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과 마주했다.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손에는 컵과 음식이 들려 있었다. 처음에는 아침을 포장해 다니는 풍경인가 싶었다. 알고 보니 그날은 가톨릭 전례력에서 중요한 축일인 주님 봉헌 축일, 스페인어로는 칸델라리아(Candelaria)였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지 40일째 되는 날을 기념하는 날로서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사건이었다. 이때 시메온이 예수님을 보고 "이 아이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고백한 데서 촛불이 상징이 되었다.


칸델라리아 축제
든든하게 한 끼


멕시코에서는 이 축일이 생활 문화와 깊이 결합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타말레스 파티를 열고 타말과 아톨레를 나눠 먹는데, 사람들이 들고 다닌 것이 그것이었다. 타말(Tamal)은 옥수수 반죽에 고기나 소를 넣어 옥수수잎에 싸서 찐 전통 음식으로, 우리가 본 것은 옥수수잎에 단단히 싸인 타말이었다. 아톨레(Atole)는 옥수수 전분을 물이나 우유에 풀어 끓인 음료로서, 설탕과 계피를 넣으면 아톨레 데 카넬라(Atole de Canela)가 되었다. 우리가 마신 아톨레는 걸쭉한 수정과 같은 맛이 났다. 이런 풍경을 마주하니 자유여행의 묘미가 이런 순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사에 대해 잘 몰라 옆에 서 있던 경찰관에게 물어보니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온 천주교 신자라고 하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 스텔라


이윽고 도착한 바스콘셀로스 도서관(Biblioteca Vasconcelos)은 압도적이었다. 내부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서가 구조와 끝없이 이어지는 책의 행렬은 지식의 우주를 시각화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공간을 상상해 내고 현실로 구현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웠다. 건축적으로도 깊은 영감을 주는 장소였다.


가리발디 광장


도서관을 나와 가리발디 광장(Plaza Garibaldi)을 지나 멕시코시티 중심부로 향했다. 이 지역은 마리아치 음악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낮 시간이라 비교적 차분했다. 다만 가는 길 내내 노숙자들이 많이 보여 낯설고 묵직한 감정을 남겼다. 이 도시의 화려함과 그늘이 동시에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멕시코 국립 미술관
벨라스 아르테스 궁전


멕시코 국립 미술관을 지나 오전의 마지막 목적지인 벨라스 아르테스 궁전(Palacio de Bellas Artes)에 도착했다. 이 건물은 멕시코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으로,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내부에는 멕시코 현대미술의 정수가 담겨 있다. 특히 자유와 저항, 희생의 메시지를 담은 벽화들은 강렬한 울림을 주었다.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는 그중에서도 백미였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미술을 넘어 역사와 이념, 민중의 삶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벨라스 아르테스 궁전 내부
벽화 작품들
벨라스 아르테스 궁전 단면


점심은 근처의 작은 타코 식당에서 해결했다. 이번에도 번역 어플이 큰 역할을 했다. 타코 세 개와 퀘사디아 하나, 망고와 멜론 주스, 오르차타를 주문했다. 추천 메뉴와 우리가 직접 고른 것을 섞어 먹었는데, 어제 먹었던 타코보다 훨씬 맛있었다. 음식의 깊이와 균형이 인상적이었다. 사람들도 전반적으로 친절해서 언어의 장벽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식당 내부
점심 타코
타코 부자


식사 후에는 근처 추로스 카페에 들러 잠시 여유를 즐겼다. 길고 바삭한 추로스를 한 입 베어 무니 스페인 여행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커피로는 어제와 똑같이 카페 데 오야(Café de Olla)를 마셨다. 이 커피는 점토 냄비에 계피와 흑설탕을 넣어 끓이는 멕시코 전통 커피로써 달콤하면서도 향신료의 향이 인상적이었다. 멕시코 커피 하면 바로 떠올릴 만한 맛이었다.


추로스 카페 가는 길
추로스 카페
스페인이 생각나는 맛
성 펠리페 네리 성당


잠시 쉼표를 찍은 뒤 멕시코시티 메트로폴리탄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de la Ciudad de México)으로 향했다. 볕이 좋아 걷기 좋은 오후였다. 대성당으로 가기 전에 성 펠리페 네리 성당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유럽의 여느 성당 못지않게 화려하지만 고요한 분위기를 풍겼다. 잠시 기도를 드리고 나와서 다시 걷자 멕시코시티의 센트로에서도 중심인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이 보였다. 처음에 들어가는 정문을 못 찾아서 옆문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대성당과 붙여있는 사그라리오 메트로폴리타노 성당이었다. 이 대성당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성당 중 하나로서,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신앙과 권력이 응축된 공간이었다. 고딕과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내부는 장엄하면서도 무게감이 있었다. 수세기 동안 이어진 기도와 침묵이 공간에 스며 있는 듯했다.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사그라리오 메트로폴리타노 성당
용서의 제단
과달루페 성모 신심
매듭의 성모
대성당 내부


대성당과 맞닿아 있는 소칼로 광장(Plaza Zocalo)은 멕시코를 대표하는 광장이었다. 광활한 규모와 역사적 상징성은 명성이 아깝지 않았다. 이곳은 아스테카 문명의 중심지였고, 이후 스페인 식민 통치와 현대 멕시코의 정치적 사건들이 겹겹이 쌓인 장소였다. 광장 한가운데 서니 이 나라의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성당을 나와서
소칼로 광장
국립 궁전


마지막 방문지는 국립 궁전(Palacio Nacional)이었다. 이곳은 멕시코의 정치 중심지로서, 대통령 집무실과 역사적 공간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내부에는 디에고 리베라의 또 다른 벽화들이 있어 멕시코 역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서 나름 인기가 있는데, 이날 행사가 있어서 그런가 출입이 통제되어 볼 수는 없었다. 다시 우리는 호텔까지 다른 길로 해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대성당 옆 템플로 마요르 유적지를 지나갔다. 아스테카의 전통 영적 정화 의식을 볼 수 있었는데, 소칼로 광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허브 다발로 몸 주변을 쓸어내리듯 움직이는 건 말라 에네르히아(나쁜 기운, 피로, 스트레스)를 떼어낸다는 의미였고, 연기가 나는 그릇은 코팔(copal)이라는 수지 향인데, 고대 아스테카 전통에서 신성한 정화용 향이었다. 무용수는 의식의 보호자, 중재자 같은 역할을 했다. 이 전체 행위를 스페인어로 보통 '림피아(limpia)', 즉 정화라고 불렀다. 이 일대가 아스테카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이었을 때 사원이었고, 이러한 의식이 행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사원 피라미드를 파괴하면서 나온 석재로 대성당을 지었다고 하니, 유적지를 바라보면 이곳의 뿌리를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거리에서 만나는 각양각색의 멕시코 사람들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노숙자들도 많았지만, 노점이나 매대를 열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참 많아서 삶의 생동감을 엿봤다.


센트로에서 일정 끝
템플 마요르 유적지


저녁 식사는 호텔 길 건너에 있는 로컬 타코 식당에서 먹었는데, 동네 맛집이라 그런지 선택은 탁월했고, 우리 입맛에도 점점 맛있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어제 레스토랑보다 더 맛있었다. 진한 본토의 맛이 느껴지는 타코에 오르차타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늘은 멕시코시티의 현대 문화와 역사, 신앙과 일상을 몸으로 느낀 하루였다. 처음 획대로 되진 않아도 그 순간에 계획을 만들어가며 그 모든 것이 모여 제대로 된 여행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란 그렇게 완벽을 만들어가는 서사의 과정이었고,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인생과 닮았.


진정한 타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