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4일(수) 테오티우아칸 그리고 멕시코시티
어김없이 일찍 떠진 눈으로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이 여행에서는 늘 이 시간이면 잠이 끝났다. 억지로 다시 잠들기보다, 조용히 하루를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을 가는 날이어서, 마음이 먼저 깨어 있었다.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간단히 속을 채우고, 무더운 날씨를 대비해 오렌지 주스와 1리터 생수, 프링글스를 가방에 넣었다. 이곳의 태양은 생각보다 훨씬 가깝고, 훨씬 무겁다는 이야기를 이미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었다.
택시를 타고 북부 터미널로 향하니 태양은 찬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출근 시간대라 도로에는 차가 많았지만, 정체가 심한 구간은 아니어서 비교적 수월하게 이동했다. 터미널에 도착해 미리 알아두었던 8번 출구로 향했다. 테오티우아칸으로 가는 버스 매표소에서 왕복 티켓을 사고, 잠시 기다린 뒤 바로 탑승했다. 버스 안은 예상보다 훨씬 낡고 더러워 잠시 앉기를 망설일 정도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 또한 여행의 일부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버스가 멕시코시티를 벗어나자 풍경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산등성이를 따라 빼곡히 들어선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멕시코시티로 출퇴근하는 서민들이 사는 지역이라고 했다. 이곳은 지하철 대신 케이블카가 주요 교통수단 역할을 한다고 들었다. 치안이 썩 좋지는 않다는 말도 함께 떠올랐다. 창밖의 풍경은 아름답다기보다 현실적이었다. 도시의 거대한 중심을 떠받치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달려, 마침내 테오티우아칸에 도착했다.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신비롭고 거대한 고대 도시 유적 가운데 하나였다. 이름은 나우아틀어로 '신들이 태어난 곳'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 도시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해, 서기 5세기 무렵 전성기를 맞았다. 전성기에는 약 10만 명 이상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도시를 누가 건설했는지는 여전히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스테카 문명보다도 훨씬 이전의 문명이었다.
아스테카인들은 14세기 무렵 이 폐허를 발견하고, 이미 버려진 이 거대한 도시를 신성한 장소로 여겼다. 그들은 이곳을 '신들이 세상을 창조한 자리'라고 믿었고, 그래서 테오티우아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아스테카는 이 도시의 건설자가 아니었다. 마야 문명과도 직접적인 동일 문명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테오티우아칸 문명은 마야보다 북쪽에 위치했고, 언어와 정치 체계 역시 달랐다. 다만 교역과 문화적 영향은 분명히 오갔으며, 테오티우아칸의 건축 양식과 종교적 상징은 마야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도시는 체계적인 도시 계획을 바탕으로 건설되었다. 중심축을 이루는 '죽은 자의 거리(Calzada de los Muertos)'는 도시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그 양옆으로 주요 종교, 정치 건축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거리는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종교 의례와 권력의 상징 공간이었다. 거리의 북쪽 끝에는 달의 피라미드(Pyramid of the Moon)가 자리하고, 중간 지점에는 거대한 태양의 피라미드(Pyramid of the Sun)가 우뚝 서 있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테오티우아칸에서 가장 크고 인상적인 구조물이었다. 높이 약 65m, 밑변 길이 약 220m에 달하는 이 피라미드는 오늘날까지도 그 위용을 잃지 않았다. 이 피라미드는 태양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자연과 우주 질서, 생명력을 상징하는 장소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컸다. 내부에서는 신성한 동굴과 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는 이곳이 단순한 전망대가 아니라, 종교적 중심지였음을 보여줬다.
달의 피라미드는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규모는 작지만, 위치와 조형미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죽은 자의 거리 끝에 자리 잡아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구조였다. 이곳에서 행해졌을 제의와 의식은 권력과 종교가 결합된 고대 사회의 성격을 잘 보여줬다. 달의 피라미드 앞 광장은 대규모 의식이 열렸던 장소로 추정되었다.
도시의 남쪽에는 라 시우다델라(La Ciudadela)가 있다. 이곳은 '요새'라는 이름과 달리 군사 시설이 아니라 종교 및 정치 중심 공간이었다. 중앙에는 깃털 달린 뱀의 신, 케찰코아틀을 모신 신전이 있다. 이 신전의 벽면에는 뱀과 물, 생명을 상징하는 부조가 반복적으로 새겨져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인신공양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이는 테오티우아칸 문명이 평화로운 도시 계획과 동시에 폭력적인 종교 의례를 병행했던 사회였음을 보여줬다.
테오티우아칸은 갑작스럽게 몰락했다. 외적 침입인지, 내부 반란인지, 환경 변화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확정된 결론은 없다. 다만 6세기 무렵 대규모 화재와 파괴가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이후 도시는 점차 버려졌다. 그럼에도 이 도시는 완전히 잊히지 않았다. 후대 문명들에게 신화적 기원지로 남아서, 중남미 문명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유적지를 직접 걷기 시작하자, 설명으로만 알던 공간이 현실이 되었다. 겨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날씨는 더웠다. 다행히 바람이 텁텁하지 않아 숨쉬기는 한결 나았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위압적이었다. 돌계단 하나하나에 쌓인 시간의 무게가 느껴졌다. 죽은 자의 거리를 따라 걸으며, 이 길을 수천 년 전 사람들도 같은 방향으로 걸었을지 상상해 보았다.
달의 피라미드 계단을 올라섰을 때 펼쳐진 풍경은 단연 최고였다.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고, 인간이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려 했던 흔적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곳에 서 있으니, 문명이라는 것이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이어진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을 조금 더 내어 라 시우다델라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땡볕 아래에서의 이동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아이는 고산병 증세와 더위가 겹쳐 점점 지쳐갔다. 이 모습을 보며,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페루의 마추픽추는 우리 가족 여행에서는 제외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도전이 아니라, 함께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다시 느꼈다.
무사히 출구까지 나와 아이에게 수고했다고 박수를 쳐주었다. 아이도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3시간 남짓한 탐방이었지만, 체감 시간은 훨씬 길었다. 다시 멕시코시티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 몸을 싣고 나서야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창밖으로 다시 펼쳐지는 도시의 풍경을 보며, 오늘 우리가 다녀온 장소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인류의 질문이 응축된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곱씹었다.
다시 한 시간을 달려 번잡한 멕시코시티로 돌아왔다. 오전의 테오티우아칸이 고대의 침묵 속에 서 있던 장소였다면, 오후의 멕시코시티는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현재였다.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발걸음, 거리의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리고 오후의 목적지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과달루페 성모 성지였다. 이곳을 위해 멕시코까지 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었지만 이동 동선이 애매했다. 성지로 향하는 길목에는 마땅한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제과점에 들러 빵을 몇 개 사고, 편의점에서 음료를 골랐다. 근처 벤치에 앉아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성지로 향하기 전, 배를 채우기보다는 마음을 비워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다. 빵을 씹으며 저 멀리 성지의 방향을 바라보는데, 이미 마음 한편이 조용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과달루페 성모 성지(La Villa de Guadalupe)는 가톨릭 신자라면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장소였다. 이곳은 1531년, 멕시코시티 북쪽 테페약 언덕에서 원주민 농부였던 후안 디에고(Juan Diego)에게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사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성모는 스페인 정복 이후 상처 입은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말을 걸었고, 그들의 피부색과 복장을 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전해졌다. 성모는 후안 디에고에게 주교에게 가서 자신의 뜻을 전하라고 했고, 증표로 겨울에 피지 않는 장미를 틸마(망토)에 담아 오게 했다. 주교 앞에서 틸마를 펼쳤을 때, 장미와 함께 성모의 형상이 그대로 새겨져 나타났다는 것이 과달루페 성모의 기원이었다.
이 틸마에 남겨진 성모상은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있으며, 과학적 분석으로도 그 형성과 보존 상태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해 기적의 이미지로 불린다. 과달루페 성모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을 넘어, 스페인 식민 지배와 원주민 문화가 충돌하던 시기에 화해와 일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과달루페 성모는 멕시코의 수호성모가 되었고, 중남미 전역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모 신심의 중심이 되었다. 매년 수천만 명의 순례자가 이곳을 찾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성지 중 하나였고, 오늘은 그 숫자 안에 우리도 포함되었다.
성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말로만 듣던 장소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전율이 일었다. 광활한 공간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흐름, 그리고 그 모든 소음 속에서도 묘하게 유지되는 경건함이 인상적이었다. 십자가의 길을 지나서 먼저 과달루페의 성모 성당, 바실리카 산타 마리아 데 과달루페(Basílica Santa María de Guadalupe)로 향했다.
이 대성당은 1976년에 완공된 현대식 성당으로 한 번에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했다. 원형 구조의 내부는 어느 자리에서도 제단과 성모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제단 뒤편에는 바로 그 틸마에 새겨진 과달루페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미사에 참례하며 그 성모상을 직접 바라보는 순간에 긴 설명이나 해석이 필요 없었다. 신앙이라는 것이 결국 이 조용한 떨림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지만, 그 앞에서는 저마다의 침묵이 지켜지고 있었다.
성당을 나와서는 지반 약화로 기울어진 옛 과달루페 대성당(Templo Expiatorio Cristo Rey)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그리스도 왕께 봉헌된 속죄 성전으로, 과달루페 성지의 영적 깊이를 더하는 공간이었다. 비교적 소박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 기도와 묵상을 드리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화려함보다는 회개의 의미와 침묵이 강조된 장소로 느껴졌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파로키아 데 산타 마리아 데 과달루페 '카푸치나스'(Parroquia de Santa María de Guadalupe 'Capuchinas')였다. 이 성당은 성모 발현 당시 후안 디에고가 주교를 만났던 장소와 관련이 깊은 곳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역사적 의미가 담긴 공간으로 초기 과달루페 신심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성지 곳곳에 울려 퍼지는 카리용(Carrillon)의 종소리도 인상 깊었다. 일정한 시간마다 울리는 종소리는 넓은 성지 전체에 시간의 리듬을 부여하는 듯했다. 바쁜 발걸음 속에서도 사람들은 그 소리에 잠시 고개를 들었다. 일정 시간이 되면 후안 디에고 성인이 과달루페 성모를 만난 이야기를 보여주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이어 방문한 안티구아 파로키아 데 인디오스(Antigua Parroquia de Indios)는 원주민들을 위해 세워진 옛 본당 성당이었다. 과달루페 성모 신심이 원주민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장소였다. 소박한 외관과는 달리, 이곳이 지닌 역사적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포시토 소성당(Capilla del Pocito)은 테페약 언덕 아래 위치한 작은 성당으로, 성모 발현과 관련된 샘이 있는 곳이었다. 둥근 형태의 독특한 건축은 생명과 치유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잠시 머물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사그라도 테페약 정원(Jardín del Sagrado Recinto del Tepeyac la villa)은 성지의 숨을 고르는 공간이었다. 잘 정돈된 정원과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다. 실물 크기로 제작된 원주민들과 성모상이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카피야 델 세리토(Capilla del Cerrito)로 향했다. 테페약 언덕 위에 위치한 이 소성당은 성모 발현의 장소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언덕을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지만, 올라서서 바라본 성지 전경은 그 수고를 충분히 보상해 주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본 과달루페 성지는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믿음의 흐름 그 자체처럼 보였다.
과달루페 성모 성당 아래에 있는 성물방에서 성물을 몇 가지 구입했다. 그리고 신부님께 성물 축복을 청했다. 신부님은 성물 축복과 함께 우리 가족에게도 축복을 내려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 여정의 의미가 또렷해지는 시간이었다.
저녁이 되자 배가 고파졌다. 매 끼니 타코만 먹다 보니, 오늘은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중국 음식을 떠올렸지만, 결국 스페인 음식으로 방향을 틀어 시내의 스페인 레스토랑으로 갔다. 아내는 멕시코 맥주를 마시고, 나는 상그릴라를 마시며 스페인의 좋은 기억을 불러 냈다. 음식은 훌륭했고, 서비스도 정갈했다. 다만 물가는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아 세금과 팁까지 붙으니 꽤 좋은 레스토랑 수준의 금액이 나왔다. 하지만 오늘은 멕시코에서 가장 뜻깊은 하루였기에, 파티하는 기분으로 계산서를 받아 들었다.
식당을 나서자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낮 동안의 뜨거움이 조금씩 식어가는 저녁이었다. 빗방울을 맞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 날은 오래 기억될 하루였다. 테오티우아칸에서 과달루페까지 보낸 시간은 여행의 한 장면을 넘어, 마음 깊은 곳에 남을 기도가 되었다.